눈과 사람과 눈사람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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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단편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 



[줄 게 있어] 

위로의 위험한 방법. 상대방이 아닌 자신을 위한 위로는 그에게 폭력이 될 수 있다. 

고통은 누군가가 가져가야만, 그렇다고 믿어야만 덜어질 수 있는 것인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자기 방어. 


" "우리 영후가 참 멋지게 아프고 있구나." 

아버지는 내 어깨를 토닥였다. 덴 것처럼 어깨가 뜨거워졌다. 나는 부엌으로 나가 냉동실 문을 열었다. 얼음을 쥐고서 어깨에 문질렀다. 입안 가득 얼음을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발바닥이 뜨거워 양말을 신고 다니기가 힘들어졌다. " (20) 





[병원] 

누구를 위한 사회보장인가. 법의 테두리. 부정수급. 소년소녀가장. 가난. 빈민자를 등쳐먹는 세상. 노동력 착취. 병원비 조달을 위해 미친자가 되어야 하는 현실. 


"미쳤다는 건 도대체 어떤 건데요?"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증상은 환각을 본다거나 환청을 듣는다거나......" 

"환각과 환청만으로요?"

"그런 것들 때문에 일상생활이 망가지느냐 아니냐......" 

"제 일상이 망가지지 않았더라면 병원에 오지 않았을 거예요."

"정유림씨는 자신의 폭력성의 원인을 외부로 전가하고 있어요. 어떤 것들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이나 어떤 것들에 대한 원망 같은 감정이 바로 잠재적인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징후죠.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50) 




[다시 하자고] 

함께 생활한다는 것의 이면. 함께 하지만 다른 생각들. 동의하지만 반대였던 마음. 묘하게 너무도 알 것 같은 그 마음. 


"싫은 것을 의문형으로 표현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치를 보게 만드는 버릇이 내게 있다고 지은이 말한 적이 있었다. 지은은 내가 그런 방식으로 매사에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한다고 했다.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말로 세이프 존을 확보해놓고 상대를 시험한다고 했다. 싫지만 싫다고 말할 수가 없거나 싫지만 양보가 가능할 때 사용하는 어법이었지만, 지은을 괴롭게 만드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지은에게는 내가 고쳐보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은을 제외하면 내 의문형을 신경쓰는 타인은 없었다." (67)





[추앙] 

* 같은 놈들이 교수하고 작가하고. 선민의식 쩌는 놈들. 말이 험해 안 미안하다. 소설이 소설만이 아닌 것이 분통터지는데 현실은 이보다 더할 거라 더 분통터진다. 




[뻔한 세상의 아주 평범한 말투] 

'내가 도와주니까 좋지?' 선의를 가장한 조종과 감금과 정신폭력. 정상과 비정상. 제발 두 개로만 나누지 좀 말라고. 


"아프면 멀게 느껴졌다. 천장이 너무 높아 보였다. 방문이 너무 멀어 보였다. 물에 잠긴 것처럼 눈을 뜨고 있어도 초점이 흩어졌다. 소리들이 웅얼거렸다. 자세를 바꾸려면 공기를 밀어내는 느낌으로 몸을 움직여야 했다. 숨을 참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걸 잊어버릴 수가 없없다. 아프다는 것은 나 자신이 나 자신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을 듣고 있어야만 하는 느낌이었다." (112)




[신체 적출물] 

"'각자의 애원은 각자의 것을 지키려는 욕망이었다. 애원도 욕망의 일종이었다. 애원은 각자의 내부에서만 공명할 것이다. 은하는 애원이 무서워졌다. 유리병 속에 갇힌 애원이 무서워졌다. 애원의 고립이 가장 무서워졌다." (141-142)


어디까지 욕망하고 어디까지 애원할 수 있을까. 




[선샤인 샬레]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 도망.(그거 정말 도망?) 아무도 나를 모르는, 한번쯤 상상하는 세상. 손님이었다가 시중 드는 사람이었다가 다시 손님이 되는 인생. 




[눈과 사람과 눈사람]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 알지 못하는 이면. 위로와 도움과 연대의 의미. 의미 뒷편의 의미. 


"...이십 년 동안 가정폭력 피해자들과 연대한 사람은 배에 칼을 맞았고, 화재사건 피해자와 연대해온 사람은 방화 때문에 집이 불탔고, 피해자의 협박에 시달리다가 이민을 간 사람도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고 의사는 말했다." (194) 



*** 


첫 두어 편을 읽을 때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다가 점점 뒤로 갈수록 어 이게 뭐지 싶은 생각이 든다. 

어떤 사건의 잘 보이지 않는 이면을, 생각하기 어려운 것들을, 말해지지 않는 것들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결말이 이런 건 좀 내 스타일이 아닌데 싶다가 모든 단편을 다 읽은 후에야 수긍이 간다. 슬프고 힘든데 가슴이 뛴다. 모든 단편이 그렇다. 사놓고 제대로 읽지 않은 임솔아의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꺼내온다. 소설을 읽기 전엔 대충 훑었던 시가 다시, 새롭게 보인다. 



나는 날씨를 말하는 사람 같다. 


봄이 오면 봄이 왔다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전한다. 


이곳과 그곳의 날씨는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그래서 날씨를 전한다. 


날씨를 전하는 동안에도 날씨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 


날씨 이야기가 도착하는 동안에도 내게 새로운 날씨가 도착한다. 


이곳은 얼마나 많은 날씨들이 살까. 


뙤약볕이 떨어지는 운동장과 새까맣게 우거진 삼나무 숲과 


가장자리부터 얼어가는 저수지와 빈 유모차에 의지해 걷는 노인과 


종종 착한 사람 같다는 말을 듣는다. 


못된 사람이라는 말과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나의 선의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미래 시제로 점철된 예보처럼 되풀이해서 말한다. 


선의는 잘 차려입고 기꺼이 걱정하고 기꺼이 경고한다. 미소를 머금고 나를 감금한다. 


창문을 연다. 안에 고인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창밖으로 민다. 


오늘 날씨 좋다. 


- 예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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