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지향 6개월째.
오늘의 화두는 (확대)가족 내의 비건지향자,이다. 이때의 가족은 나만 빼고 모두 육식주의자.
일요일 점심에 모처럼 고기를 먹겠다고 했다. 나는 내가 먹을 밥을 미리 준비해서 옆지기가 식사 준비(채소 손질)를 하고 있는 옆에 앉아 먼저 먹었다. 고기를 볶기 시작할 무렵, 식후 산책을 하고 오겠다고 집을 나섰다. 점심을 먹고 바로 산책을 나가는 것이 습관이 되기도 했고, 고기 볶는 냄새를 견딜 수 있을지 몰라서였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옆지기는 식탁의 빈자리가 마음에 걸렸다고 말한다. 앞으로 고기를 먹을 때는 이렇게 한자리가 비게 되는 거냐고, 이런 모습으로 우리 식탁의 모습이 변해가는 거냐고. 밥 먹을 때는 꼭 모두가 식탁에 앉아 있어야 하는 거냐고 되물을 수밖에. 밥 먹는 속도가 느린 나는 저녁마다 혼자 남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한 시간 준비한 식사를 10분만에 먹어치우고는 먼저 자리를 뜨는 사람들은 누구였지? 어이는 어디 가고 맷돌만 있는 셈이구만.
고기 냄새를 견디지 못하는 내가 그걸 참고 앉아 있어야 하는 이유는 없지 않나? 내가 그걸 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 이유는 없지 않나? 이런 의문은 네 식구의 식사에서는 오히려 쉬운 문제가 된다. 나는 내 주장을 할 수 있다. 가족을 확대해 보자. 모이면 고기를 구워 먹는 게 당연한 양쪽 집 식구들, 저는 고기를 먹지 않아서요, 고기 냄새를 못 맡겠어요, 하고 빠질 수 있는가? 이 지점에 이르면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 같다. 더군다나 나는 외국에 사는 딸이고 며느리다. 자주 보는 것도 아니고 2~3년에 한번 보는 게 다인데, 매달 매주 보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는 니가 맞춰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 말은 동생이 한 말이다. 다같이 고깃집에 가자고 하면 어쩔 테냐, 못 간다고 빠질 수 있느냐, 가서 다른 거 먹으면 되지 않느냐. 이 논리는 다른 대화에서도 자주 적용된다. 얼마나 해봤다고, 멀리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지, 현실을 모르는 소리, 자주 하는 거 아니니 눈 딱 감고 그냥 해. 옆지기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본가에서 고기 먹자 하면 어떻게 할 거냐 묻는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되묻는다.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고기 굽는 냄새를 참으며 그 자리에 있기는 싫다. 고깃집엘 갈 거면 나는 빠지겠다고 했다. 그게 맞는 거 같았다. 집에서 고기를 굽는다면 나는 외출을 하겠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친정 식구들이 모여 고기를 구워먹는다고 하면, 외출하겠습니다 할 수 있다. 욕은 좀 들어먹겠지만 그걸로 끝일 테고. 장소가 옆지기 본가로 바뀌면 이 장면은 어떻게 연출될 것인가? 과연 나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외출하겠습니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집에서의 모든 식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가족을 위해 '융통성'을 발휘해야 한다면서, 왜 그 방향을 거꾸로 돌리지는 못하는지 궁금하다. 나의 위치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
확대가족 안에서 비건지향자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무지 궁금해서 검색도 조금 해보았지만 딱히 나오는 게 없다. 비건 까페에 가입해야 하려나? 도대체 어떻게들 살아가고 계신 건가요? 좋은 아이디어 있으시면 좀 던져주세요. 이런 고민 있는 비건 관련 책도 아시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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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적어두고 <비건 세상 만들기>를 읽었다. 뒷부분 슬렁슬렁 넘겨보니...
이론과 증거를 들이대도 꿈쩍하지 않을 사람들을 회유(?)하기 위해서는 일단 숙이고 들어가라,는 요지의 글들. 윤리를 내세우지 말 것, 주장하지 말 것, 설득하려 하지 말 것, 판단하지 말 것, 상대방을 이해할 것. 대나무 말고 풀이 되라는. 좋아요 좋아. 그렇게 한다고 치자. 같이 고깃집 간다. 그런데 정말 생고기 굽는 냄새는 못 맡겠단 말이다. 중간에 뛰쳐나오는 것보다 내가 안 가는 게 낫지 않나? 고기 먹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못 먹고 못 맡는 사람이 있으니 중간 어디메쯤에서 타협하자는 거지. 양념한 건 좀 덜하니 그럼 불고기집이나 아니면 중국집, 이런 데로 갈 수도 있지 않은가? 아주 나중에 만약 내가 그마저도 정말 못 가겠다고 뻗대는 때가 오면, 그때는 어찌 할 텐가?
오늘 읽은 두꺼운 빨간 책에 이런 문장이 나왔다.
"목표는 의제에 남겨두고, 현존하는 제약 안에서 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부엌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그곳에서 하는 일이 정치경제가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하나의 억압된 범주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뛰는 식으로 체제를 공격하지는 못한다.""
하아. 모든 노력이라. 대나무가 되어 들이받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막상 뻔히 드러나는 내 위치에 서서 안 쪼그라들고 들이받을 자신은 없고. 안 그래도 미운털(?) 박힌 둘째 며늘 이제는 꼴값 한다는 소리까지 듣게 생겼다. 그 꼴값, 아드님이 같이 하면 좀 나을까요. 더 가슴 아프실까요. (그럼 또 나만 나쁜x?)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노력한다. 결론은 이거지 싶다. 그런데 정말 내가 노력해야만 하는 걸까, 정말 그런 걸까.
"'나는 옳은가?' 혹은 '이것은 나의 진리인가?'는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은 효과적인가?'이다." (178) (- 방법론적인 면에서 글쓴이의 주장의 일부를 내 경우에 비추어 가져온 문장이므로, 전체 책의 내용이라 볼 수 없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