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카 솔닛의 책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앞부분에 버지니아 울프와 관련한 솔닛의 강연 일화가 나온다.
"그때 나는 청중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우리가 울프의 출산 상태를 추궁하는 건 그의 작품이 제기하는 멋진 질문으로부터 벗어나는 따분하고 무의미한 짓이라고. (기억하기로 그때 나는 어느 시점엔가 내 뜻을 그럭저럭 담았다고 할 수 있는, "이딴 얘기는 집어치우죠"라는 말로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이끌었다) 따지자면 아이를 낳는 건 많은 사람이 하는 일이지만, [등대로]와 [3기니]를 쓰는 건 오직 한 사람만이 해낸 일이었으며 우리가 울프를 이야기하는 건 후자의 일 때문이다." (p.15)
혹시 새로 올라올까 싶어 가끔 전자도서관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검색해본다. 얼마전에도 본 제목인데 위 구절을 읽은 후라 유독 눈에 띄는 제목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솔닛이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다고 했는데. 구미가 당겨 대출했더니, 소설이다.
안이희옥, <버지니아 울프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문학동네, 2000년 10월
소설의 도입부를 읽으며 아 그만 읽을까 생각했다. 문체가 내 스딸이 아닌데. 평범하면서 거친데. 고민하는 사이 알라딘 정보 검색. 응? 성폭행? 설명도 간단하고 리뷰도 페이퍼도 없다. 좀더 읽어보기로 한다.
"한영의 말대로 비극은 어차피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멸해가는 남녀간 사랑의 제도 속에 몸을 던져버리고 싶은 이 강렬한 유혹. 해체되어가는 가족 제도로 회귀하고 싶은 이 안일함. 그러나 못 이기는 체 감상과 낭만에, 감각에 자기를 맡기는 자는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죽음을 극복하려면 새로 탄생하는 것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
무엇이 새로 태어나고 있는가? 희생당했던 여자들의 반란, 가족의 해체, 새로운 공동체의 실험, 거기에는 적어도 신선함이 있다. 그러나 그 신선함의 싹을 집요하게 뭉개버리려는 보수적 문화의 끈끈한 압력들, 이성간의 사랑을 우상시하는 지배 담론, 결혼 제도의 권력, 가족의 관습과 전통, 로맨스를 맹종하는 집단 무의식...... 가족 가운데서 온갖 고통을 받아오고, 남자 때문에 삶이 해체되는 극심한 고통을 겪은 나조차도 새로운 대안을 집요하게 추구하지 못하고 집단 세뇌의 끈끈함에 말려들고 만다면, 세상에서 주입하는 생각대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그들은 허구의 행복을 신기루처럼 쫓다 불행을 마주치고는 어쩔 줄 모르고 파멸해간다. 누가 구원할 것인가? 아무도 없다. 불행한 사람 스스로가 자신을 구제해야 한다. 나처럼 파괴된 여성들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끈질기게 자신을 치유하고 집단의 압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야 한다. 그렇다. 지금은 환상을 꿈꿀 때가 아니라 반란을 꿈꿀 때다. 여자들의 반란은 오래 전에 시작되었고, 점점 더 끓어오르고 있다."
흠. 어느새 여기저기 밑줄을 긋는 나를 발견한다. 밑줄을 그으며 가만 보니 주인공의 목소리로 대변되는 작가의 분노가 느껴진다. 성추행, 성폭행, 윤간, 2차 가해, 사회적 낙인, 트라우마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경험으로 말하는 세계.
" "친족 성폭행이 꽤 흔한 일이지?"
"그럼. 영국의 버지니아 울프도 일찍이 사촌오빠에게 성추행당했지, 흑인 작가 앨리스 워커도 근친강간의 경험이 있어. 그리고 한국에선 김보은, 김진관 사건이 있잖아. 평생을 성폭행한 의부를 찔러 죽인 거...... 성폭행의 삼십 프로 가량이 근친에 의해 일어나고 있어."
...
"성폭행에 관한 소설들은 나도 꽤 읽었어. 미국의 안드레아 드워킨이 쓴 [신에게는 딸이 없다] 같은 거...... 아홉 살 때 성폭행을 당했는데, 부모는 남자의 성기가 삽입됐는지 안 됐는지에만 관심을 갖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주인공이 엄청난 방황을 하는 아주 극단적인 작품이야. 일본 사람 오치아이 게이코의 성폭력 소설이나 흑인 작가 사파이어의 [푸시], 그리고 김형경의 [세월]도 읽어봤어. 그런데 뭔가 할 말이 더 있을 거 같다는 느낌이 자꾸 드는 거야."
"그러면 너, 소설을 써보면 어떠니?"
"내가 소설을 어떻게 쓰니?"
"아니, 내 생각엔 누군가 써야 돼. 그리고 넌 쓸 수 있어. 생각해봐. 한국에선 성폭행 체험자들의 글이 많지 않아. 강간 범죄율은 세계 2위라는데...... 당한 여자들이 성폭행의 고통을 몰라서 그럴까? 왜 모두 침묵하는 걸까? 아니야, 침묵을 강요당하는 거야. 그러다가 김부남같이 병들 대로 병들어서 이십 년 전 자기를 성폭행한 동네 아저씨를 찔러 죽이는 극단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거야. 영국보다 미국보다 일본보다 더 과격해. 왜? 감히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이야. 이래서는 안 돼. 말을 해야 해. 미치기 전에, 살인하기 전에 말을 해야 해." "
주인공 현주와 친구 해경의 대화다. 해경은 여성단체에서 일하고 있다.
"현주의 가랑이는 정육점에 걸린 죽은 고기처럼 벌려졌다."
이 문장에서는 <육식의 성정치>가 떠올랐고.
" "사이킥 에너지라구요? 그래요. 사실 내 안에는 박영미씨처럼 칼이라도 휘두르고 싶은 분노가 있어요. 그 분노는 전 세계라도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에요. 더구나 어릴 때부터 계속 남자들한테 당해왔다는 생각이 들면 모든 남자를 살해하고, 거세시켰음 좋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남자들이 멸종했으면 해요."
남자 원장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남자들이 멸종하면 인류는 어떻게 유지되고요?"
"인간 복제 기술이 발달하면 여자들끼리 과학적으로 단성 생식을 할 수 있을 거예요." "
"왜 남자들은 성폭행을 할까?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 남자들의 힘, 남자들의 세력. 남자들은 그들의 힘을 이용해서 여자와 아이들을 지배하면서 가장이 된다. 남자 가장들이 모이면 사회가 되고 국가가 된다. 그들은 법을 만들고 기업을 경영하고 정치를 하면서 남자들 중심의 사회 제도를 만든다. 남자들 중심의 역사를 만든다. 흔히 말하는 가부장 제도이다. 가부장 제도 속에서 남자는 돈과 힘을 가지고 여자를 선택해 결혼하고, 대를 이어줄 아이를 낳고 기르게 한다. 일부일처 제도다. 그러나 사실은 여자에게만 순결과 정절이 강요된다."
"그래, 삶의 방식이란 책꽂이에 분류된 책들이나 서류들처럼 일목요연하게 나누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게 아냐. 잘 정리된 이론은 삶의 해명에 도움이 되지만, 그 이론이 곧 삶의 전부를 설명하는 건 아니지. 내 경험을 정리해 주고 분노를 대변해주며 상처의 극복에 도움을 주는 여성해방 이론들은 더없이 소중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지도 몰라. 여성주의 이론에 내 경험을 꿰어맞추려는 시도는 어쩌면 또하나의 식민주의인지도 몰라. 앞으로 페미니스트들과 열심히 만나고 배워야 겠지만, 내 생활을 여성주의 이론틀에 꼭 맞추려고 애쓸 필요는 없겠어. 그냥 내 상황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해. 그리고 내 경험을 해석하고 극복해온 사고의 모험도 그냥 그대로 지켜보자. 그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조심할 것. 무조건 '여성주의 이론에 내 경험을 꿰어맞추려는 시도'는 위험하다고 나도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기는 아주 쉽다.
현주에게 오랜 연정을 품고 있는 한영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좀 아쉬웠다. 그가 젊은 시절 한 일(짓)은 앞뒤 상황을 재어보지 않아도 확실히 잘못한 거라는 생각이 든다. (현주가 애인의 투신-죽음으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 한영에게 옷을 벗고 덤벼들었다. 그는 그래 내가 책임질게 하며 그녀와 잔다.ㅠㅠ) 현주는 어린 시절 성추행을 당했고 그래서 남자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인물인데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는지가 우선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는 있지만, 애인의 이름을 부르는 현주를 안은 한영은 잘못이 없는 것일까? 여자는 제정신이 아닌데? 그런 맥락에서 시간이 흘러 만난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소설 전체에서 느껴지는데 이 부분만큼은 설명이 부족한 것 같다. 아니면 한영의 캐릭터 자체가 작가의 의도였을까?
하고 싶은 말을 꿈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나 인물의 대사로 표현하는 방식이 직접적이라고 할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너무 많다고도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격함이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제목에 끌려 읽게 된 소설이지만, 강렬했다. 2000년에 나온 소설이라 더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권하는 건가요 물으면 쩜쩜쩜,이 답이 될 듯. 10년 전 20년 전에 쓰여진 이런 소설들이 어딘가에 더 있을까?
(최근에 구입한 책이 떠오른다. 최진영, <이제야 언니에게>, 절반쯤 읽었다.)
읽었으니 기록.
함께 빌린 다른 책의 제목은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새다> 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