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영 [타락한 저항] 


1장 블랙리스트와 저항, 밑줄긋기. 




‘쓸데없이‘ 진지한 사람에게 흔히 하는 말이 있다. ‘개그를 다큐로 받는다.‘ 이럴 때 실패한 개그를 돌아보기보다는 ‘왜 웃자고 한 소리에 죽자고 달려드냐‘며 도리어 화를 낸다. 유머를 생산하는 행위도 일종의 권력행위다. 유머에 대한 진지한 반응은 어느 정도 권력에 대한 도전이 된다. 지루한 ‘부장님 개그‘에도 직원들이 웃음으로 반응을 보이는 이유다.

19세기 유럽에서, 제국주의가 퍼져나갈수록 에로틱한 여성 누드는 활발해졌다. 남성 누드가 군사력과 영웅을 상징한다면 여성 누드는 수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살롱에서 여성 누드의 비중은 전체 미술 작품의 50퍼센트에 가까웠다. 식민지를 개척할수록 여성 누드는 번창했다. 여성의 수동적인 벗은 몸은 식민지 지배의 메타포였다. 동물과 식물은 수집되어 진열되었다. 인간 남성이 그렇게 ‘보는 존재‘의 위치를 점한다. 오늘날에도 흐트러진 머리와 말없이 초점 없는 눈동자의 모습은 자연과 여성을 조합한 여성적인 이미지로 통한다. 여성-동물-자연은 남성-문명에 의해 철저하게 타자화되고 지배받는 대상으로 존재한다. 간혹 남성 지식인이 자연 훼손을 비판한다며 ‘강간‘이나 ‘매춘‘이라는 표현을 극구 고집하는 이유는 이렇게 나름의 논리(?)에 근거한다.

표현의 자유는 어떤 창작물을 발표하거나 발언을 했다고 해서 개인이 부당하게 법적 처벌을 받거나 제도적으로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창작물이나 발언을 두고 비판할 때 자동적으로 ‘표현의 자유‘라는 방어막을 치는 태도는 표현의 자유라는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표현의 자유가 비판받지 않을 권리는 아니다.

서구 국가에서 주로 국가의 상징으로 가상의 인물인 여성을 활용하는 이유는 여성의 깨끗함과 관련이 있다. 프랑스의 마리안느, 영국의 브리타니아, 그리고 독일의 게르마니아, 모두 여성이다. 미국의 자유의 여신도 그 연장선에 있다. 실제 여성이 국가에서 권력을 행사하거나 시민으로 인정받은 역사는 짧다. 그러나 가상의 ‘여신‘들은 일찌감치 국가의 상징이 되었다. 여성을 존중해서가 아니다. 국가와 제도가 남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어머니처럼 자애로운‘ 이미지인 여성 인물을 국가 상징으로 내세워온 것이다. 또한 피 터지는 전쟁과 혁명의 이미지를 여성의 깨끗하고 온화한 이미지로 씻어낸다. 여성 인권과는 무관한 여성의 이미지일 뿐이다.

여성, 장애인, 이주민, 아이 등을 통한 타자화에 문제의식을 못 느끼고 관성에 젖은 체제 비판의 언어가 활발하다. 말과 글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조차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창녀‘나 ‘자폐‘를 언급한다. 잘못된 비유와 예시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혐오는 놀이가 되고, 게임이 되고, 개그가 되고, 심지어 저항으로 둔갑해 문화사를 축적한다. 지하철 스크린에 얹힌 시민의 차별적 감수성과 부적절한 시어는 이러한 사회의 반영에 불과하다. 우리는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분노하지만, 일상은 이미 소수자와 약자의 블랙리스트가 견고하게 작성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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