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와 분노의 강도는 항상 주관적으로 체험된다. 감정에는 객관적인 척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은 사회화 과정에서 가족이나 배우자의 욕구에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학습하며,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라면 아이가 뭔가를 필요로 할 때 ‘호출‘에 곧장 응하는 일에 너무나 익숙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배우자가 이런 ‘상시대기‘ 상태를 이용할 때도 많다. 이런 상황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욕구를 제대로 파악하기는커녕 인지하기조차 어렵게 만든다. 끊임없이 무슨 일이 생기고 누군가는 뭔가를 늘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금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생각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경우도 흔하다. 어차피 자유시간도 없다. 자신의 욕구 충족은 대개 ‘아이가 잠든 뒤‘나 주말, 방학 때 등으로 미뤄진다. 심지어 아이가 다 큰 뒤로 한없이 유예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가 충분히 컸을 때란 언제인가? 열 살, 열다섯 살, 스무 살, 아니면 서른 살?

경멸은 때로 비꼼과 냉소의 형태로도 나타나는데, 유년기에 분노를 제대로 표출하지 못했던 사람에게서는 특히 더 그렇다. 누적되다 못해 어느 정도 고착돼버린 분노가 신랄하고 빈정대는 언사로 표출되는 것이다. 빈정거림과 냉소는 당사자의 생각과 말에 후추 한 알 만큼이나 적은 용량으로 첨가되는데, 이때 화와 분개의 감정은 ‘농담‘의 가면을 쓰고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 불쾌한 반응을 보여도 당사자는 "농담으로 한 소린데 뭘 그래"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기 일쑤다. 그 뒤에 숨어 있는 화의 의미와 정도는 차단되거나 축소된다. 냉소주의자는 자신이 직접 표출한 화에 대한 책임을 이런 식으로 면하려 드는데, 그 이면에는 비판적인 부모자아가 숨어 있다.

화를 인지하고 그 근거까지 파악했으면서도 ‘당신이 이러저러하니까 내가 화를 내는 거야‘라는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타인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충족되지 않은 나 자신의 욕구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다른 누군가에게 화가 나는 이유 역시 그가 내 욕구를 충족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욕구가 현재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이를 관철하기 위해 목소리를 낼 만큼 중요한가? 현재 상황이 다툼을 벌이기에 합당한가? 아니면 욕구를 자제할 수 있는 상황인가?

우리에게는 분노할 권리가 있다. 화가 치밀면 언제든 화를 낼 수 있다. 다만 ‘그 분노가 누구 탓인가, 누가 분노를 유발했는가?‘가 아니라, ‘지금 이것은 누구의 문제인가?‘가 중요하다. 상대방의 행동거지를 두고 흥분하는 건 내 문제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것도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남부터 변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일단은 내가 상대방의 행동거지 때문에 화가 나는 이유를 고민해보는 것이 좋다. 우리의 욕구 중 어떤 부분이 충분히 인지되지 못했는가?

화에 건설적으로 대처한다는 것은 남을 비난하거나 몰아세우는 게 아니라 나의 욕구를 표출하고 내가 받은 실망과 상처를 내보인다는 의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