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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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나보다.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린 후  얼음 동동 띄운 물을 벌컥벌컥 마셔버리듯이 그렇게 단숨에 읽어내렸다.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겠다. 그저 대학생이였을 때, 스무살 정도였을까?

신경숙 작가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이 책이 유명했고, 제목도 독특해서 그녀의 책을 기웃거렸었나보다. 도서관에서 그녀의 책을 검색해 보니 모두 대출 중이였다. 도대체 어떤 작가이길래? 그녀의 글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고 난 후 내가 처음 만난 그녀의 소설은 "깊은 슬픔" 이였다.
엇갈린 사랑을 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지독하게 가슴이 먹먹해 오는 소설이였다.서로의 뒤만을 바라보는, 몹시도 마음을 주는 때가 어긋나 사랑이 아닌 상처만을 주는, 그런 세 사람의 이야기.   
제목 그대로 깊은 슬픔이 느껴져 마음이 아려오고, 감당하기 어려웁게 슬퍼지는 그런 소설이였다.

 

"깊은 슬픔" 이후... 그녀가 쓴 책은 거의 챙겨 보았다. 외딴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바이올렛 등등... 그때만 해도 그녀의 글은 너무 자신 안에 박혀 있는 게 아니냐고들 했다.
모르겠다. 그래서 난 더 좋았는지도...
나지막히 말하는 그녀의 소설이 좋았다. 내 귀에 대고 조곤조곤 말하는 듯한 그 느낌이 좋았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 항상 조곤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다 한동안 그녀의 소설을 잊고 살았다.  엄마를 부탁해는 읽었지만  엄마 이야기라 그런지 예전 소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였다.
여전히 그녀는 내게 속삭이고 있지만... 

그동안 육아책 본다고 소설을 멀리(?) 해왔던 터라 나는 이 책을 받자마자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저 내 손에 이 책을 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갈증이 해소되는 기분이랄까?

읽으면 읽을 수록 "깊은 슬픔"이 떠오르는 이 소설. 맘에 들었다. 
그동안 내가 이런 것들에 목말라했구나 새삼스러웠다. 
사랑이야기라서 그랬던 걸까? 죽음이 나오는 이야기라서?
"깊은 슬픔"이 자꾸 떠올랐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 조금 더 밝았다고 할까?
 

스무살을 갓 넘은 윤, 명서, 미루, 단...이들의 사랑  이야기와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이야기라고 하면 적절할까?
"깊은 슬픔"이 상처로 속이 곪아터진 은서를 두고 그냥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면 이 책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과  희망이 엿보인다. 그게 바로 차이점이다. 

 
그녀는 작품 속에서 무수히 '견뎌내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녀 소설 속의 인물들은 뭐 그리 견뎌낼 일이 많은지...
윤은 어머니와 단이의 죽음을, 미루는 언니의 죽음과 그 죽음을 통해 알게된 의문투성이인 사람들의 죽음을, 명서는 미루언니인 미래의 죽음과 미루의 죽음을, 단이는 윤에 대한 짝사랑과 시대의 어두움과 그 속에서의 자신의 방황을...견.뎌.내.야.한.다.

끊임없이 걷고, 쓰고를 반복하며...그들은 그렇게 견뎌간다.
혼자 견디기 힘든 순간에 그들은 함께였고, 서로의 손을 어루만져주며 다시 견뎌낸다. 견디지 못한 이들이 떠나갈 때, 자신들은 무얼 하고 있었나 분노하며 그 상실을 또 견뎌낸다. 

삶의 무게...크리스토프의 이야기를 통해 나온다.
산다는 것 자체가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가야 하는 일이라고.
이미 강을 건너기로 한 이상, 멈출 수도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일 그저 묵묵히 물살을 가르고 건너야만 한다고.

 
[우리는 지금 깊고 어두운 강을 건너는 중입니다. 엄청난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강물이 목 위로 차올라 가라앉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생가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짊어진 무게만큼 그만한 무게의 세계를 우리가 발로 딛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불행히도 지상의 인간은 가볍게 이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비상하듯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산다는 것은 無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中 291쪽 ]

 

이십대의 마지막에 서 있는 나...

나 역시 견뎌야만 했던 무수한 순간들이 있었다. 잊으려 할수록 또렷해지는 기억을 밀쳐내려고.. 고개를 저어도, 소리를 쳐봐도 잊혀지지 않는 순간들이 있었다. 고민했고, 방황했고, 아파했으며 너무 아파서 신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순간들.

견디고 있었다. 그저 말없이 견디고... 생각나면 생각나는대로  잊혀지면 잊혀지는 대로 그렇게 내버려 두었다. 실은 할 수 있는 일이 내겐 없기도 했다. 그렇게 지나온 시간들도 있었다.

나도 명서처럼 그랬다. 누가 말해주었으면....하고 애타게 바랬었다. 
 

괜찮다거나, 잊혀질 거다 아니면 다들 그렇게 견디며 살고 있다 라거나...아득해 지는 순간 아니 시간이 언.젠.가.는 올 거라고 말해주었으면 했다. 

[누군가 약속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의미 없는 일은 없다고 말이야. 믿을 만한 약속된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쫓기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보내고 나면 다른 것들이 온다고 말이야. 이러느니 차라리 인생의 끝에 청춘이 시작된다면 꿈에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

◀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中 107쪽 ]

 
돌이켜보니 청춘의 시간만큼 아름다웠던 시간은 없을 듯 싶다.
뭐 하나 바르지 않아도 뽀얗던 곱디 곱던 피부며, 며칠 밤을 세도 끄덕없을 체력이며,무엇보다 계산할 줄 몰라 상대에게 순수하게 온마음을  줄 수 있었던 시간들.
아름다웠던만큼 고민과 방황도 컸던 시간들,   
상처가 감당하기 힘겨워 점점 내 안으로 갇혀가던 시간들. 눈이 부시던 봄날과 같던 사랑의 순간이 한순간에 무릎이 꺽이는 실연의 상처로 다가오던 시간들.
순수했기에 마음을 다 주었고, 마음을 다 주었기에 찬란하게 사랑했고, 너무나 찬란했기에 그만큼 상처도 컸으며, 상처가 컸기에 가슴을 도려내는 듯 아파했다. 그만큼 아파했기에 이제는 추억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견뎌냈던 시간들...나는 견뎌내는 동안 내 안에서 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윤과 명서가 하염없이 걸었듯이, 끊임없이 글을 썼듯이...
나도 나를 살펴보았다. 내 자신이 참 낯설단 생각을 했다. 그렇게 들여다보니...내가 무엇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이러는지, 내가 어떻게 내 자신이 되었는지,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왜 아파하는지...
매번 나를 살펴보다보니 내 안의 상처도 아물어 가는 듯 싶다. 
 

아직도 청춘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청춘을 지나쳐 오고 있나보다.
충분히 아프고 방황하고 고민해야만 견딜 수 있다. 아프다는 건 살아있다는 또다른 말이 아닐까?

작가는 그런 말이 하고 싶었나보다. 언.젠.가.는 그 상처가 아물테니까 너무 두려워 말라고...

이 책을 덮고 노란 책 표지를 더듬어 보았다. 잘 살펴보니 가로로 아주 작고 흰 글씨로 문장들이 적혀 있다. 

 
내가 그쪽으로 갈까?

너를 좋아해 그때의 그 기쁨만큼 그때의 그 슬픔만큼 절망만큼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나를 무작정 걷게 하던 그 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쓰라린 마음들은

우리는 숨을 쉬고 있다

 
...내 마음에도 하얗게 새겨진다. 그녀의 문장들...

  

소설 끝에 나오는 그녀의 당부...

 
함께 있을 때면 매순간 오.늘.을.잊.지.말.자. 고 말하고 싶은 사람을  갖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언제든 내.가.그.쪽.으.로.갈.게.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언제 어느 시간에라도 서로를 향해 달려가던 윤과 명서가 떠오른다.
새벽에 술 취해 어디에 쓰러져 있을지도 모르는 명서를 찾아  헤매는 윤이 눈 앞에 가물거린다.
서로의 상처를 위해 그들은 '달려가는 일'을 할 수 밖에는 없었겠지.
상처받은 이에게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사람. 그래... 그런 사람이 돼야지. 

 
혼란스럽고 아득하기만 하던 청춘의 시간들이여... 

눈이 부셔서 바로 볼 수 없었던 시간들이여...안. 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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