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하나. 아픔을 만져주는 상상력
상상력에 반했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는 걸까? 작가 인터뷰를 보니 소설은 시뮬레이션이며 , 인물들이 알아서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 작가 안의 인물들은 어떻게 알아서 그 기발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까? 정말 궁금하고, 부러운 마음이 한가득이다.
소설에는 갖가지 심토머들이 나온다. 평범한 인긴이라 하기엔 낯설고 당황스런 사람들. 보통 생각으로는 작가의 말대로 ‘세상의 이런 일이’같은 TV프로그램에 나와서 시청자들을 잠시 놀래켜주는 역할을 할 법한 사람들, 가만 듣다보면 정신과 상담을 권유하고 싶어지는 사람들.
하지만...
심토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수록... 아! 이런 마음이였구나! 무릎을 탁 치게 돼버리는... 아! 나도 꿈꾼 적이 있었지. 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나는 가끔 생각한다. 이 세상을 살면서 보통 인간.. 평범한 인간..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참 독특하구나! 나와는 참 다르구나! 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다 비슷해 보이지만, 가까워지거나, 특정한 상황에서 특별한 일면을 보았을 때는 “인간 참 제각기다”하게 된다.
일상의 반복 속에 무력감을 느끼며 은행나무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 삶의 바닥까지 곤두박질치고 긴 잠을 자게 되는 사람, 고양이에게만 감정을 느끼는 여자를 사랑한 때문에 고양이가 되고픈 사람 등등
이 사람들은 모두 아픈 사람들이다. 마음이 아프다가 그런 “증상”들을 겪는다. 그리고 그 아픔은 내 마음으로 전해져 내 마음 구석 구석에 있던 아픔들을 일깨우기 시작한다.
죽고만 싶을 때... 죽을 자신은 없어서 오래 오래 긴 잠이 들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바라보며 그가 원하는 모습이 되고 싶어 안타까웠던 기억도 있었고, 일상의 무력감 속에 내가 아닌 다른 인생을 꿈꿔보기도 했고...
그 아픔에 상상력을 더해 심토머를 만들어낸 작가의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참 멋있고 재미난 상상력이다.
두울. 공대리를 그려본다.
이 소설을 끌어가는 화자, 공대리...
이 소설에서 평범함을 대표하는 인물. 주인공.. 인가? 암튼 캐비닛 안에 들어있는 심토머들을 우리에게 소개시켜주는 인물.
난 공대리를 상상해본다. 그다지 유쾌한 모습은 아니라고, 그렇다고 냉소적이지도 않는, 사람들 틈에선 다분히 평범하지만 일대일로 마주하면 꽤나 엉뚱할 것만 같은 사람.
일이 없는 연구소에 취직을 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은 정말 정말 공감가는 모습이였다. 그 시간을 견디는 것이 주어진 일이라고...
인생은 주어진 그것을 견뎌가는 것... 그것이라고. 안달복달하지 말고 그저 견디라고... 안달복달하지 않으면 아프지 않으니깐.
물론 요즘 사람들이 힘든 세상을 산다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안달복달하는 재미도 있지 않나? 그래서 이 부분에서 잠시 물음표를 찍어두었다. 물론 작가는 과유불급을 의미한 것이겠지만...
또... 손정은이라는 이해불가의 여자에게 말을 건네는 모습과 마지막 심문을 받을 때 공포에 휩싸여 두려움에 떠는 모습은 소시민의 바로 그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맥주만 먹으며 생활한 것이나, 권박사와의 관계 그리고 괜한 느낌... 이 사람도 보통은 아니다! 했다.
공대리는 이질적이고 낯선 것을 대했을 때 여느 사람이 느낄 법한 그런 인상들을 차분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그 차분하고 솔직한 말들이 쿡쿡 웃음을 나게 한다.
가끔씩 쿡쿡거리는 웃음이 좋아서 또 한번 이 소설이 좋아졌다.
세엣. 구라의 끝은 어디인가?
나는 앞서 이 소설의 상상력에 감탄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감탄은 작가의 구라치는 솜씨였다. 가끔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은 이거 진짜야?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에서 작가는 뻔뻔하고 당당하게 말한다. 이 소설에 쓰인 이야기와 책의 저자, 상식처럼 설명되는 모든 것들은 구라라고... 망신당할 수 있으니 어디가서 써먹지 말라고. 그 뒤도 돌아보지 않는 뻔뻔한 구라란...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구라와 그걸 더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공대리와 구라지만 아픔을 만져주는 이야기들이 어우러져 참 괜찮은 소설이 나왔다. 맘에 든다.
물론 조금 길다는 흠이 있다. 다양한 심토머들의 모습을 보여주려다 자칫 늘어질 뻔도 한 거 같다. 심사평에 이런 내용들이 몇 군데 나와 있어서 역시 느끼는 건 다들 똑같구나 했다.
하지만 이런 단점을 모두 상쇄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책이다.
특히나 이런 작품이 우리나라 소설이였단 사실이 맘에 든다. 자꾸만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을 상상하게 됐는데, 그럴 때마다 ‘아니야..우리나라 작가야“하면서 좀 뿌듯한 기분이랄까?
요즘 일본소설을 많이 읽으면서 참 상쾌하단 생각을 많이 했다. 왜 우리나라는 이런 느낌이 아닐까?도 생각했는데... 조금 더 진지하고 무겁단 느낌이였다. 같은 주제여도 좀 가볍게 풀어낼 수는 없을까 아쉬움이였던 거 같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뿌연 마음은 사라졌다. 우리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삶이 조금 따분하다거나, 마음이 좀 아프다거나, 오랜 겨울잠을 자고 싶다거나, 좀 지쳐서 쉬고 싶다거나, 등등...
이런 ~거나를 느끼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좀 위안을 느꼈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