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어린이표 - 웅진 푸른교실 1, 100쇄 기념 양장본 웅진 푸른교실 1
황선미 글, 권사우 그림 / 웅진주니어 / 1999년 12월
평점 :
절판


나쁜 어린이표란 주인공 건우반 선생님이 아이들의 잘못된 습관을 고치기 위해 잘못을 한아이가 있으면 이름 옆에 붙여주는 것이다. 녹색의 스티커가 나쁜 어린이표다. 착한 어린이표는 노란색. 책 표지에 나온 입이 삐죽하게 나온 저 아이가 나쁜 어린이표를 받은 주인공 건우이다. 저 아이가 입이 삐죽 나온 이유는 무엇이고, 나쁜 어린이표는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으로 읽어내려갔다. 

 

책을 보면서 초등학교때 선생님이 숙제나 일기에 찍어주던 도장이 생각났다. "참 잘했어요." 라는 그 도장을 받고 싶어 일기를 거짓말로 쓰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는 선생님의 사랑이 절대적이다. 집에서는 부모님의 사랑이 절대적이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은 선생님께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할 때 손을 드는 것도, 숙제를 졸음을 물리치며 하는 것도, 일기를 진짜 이야기보다 거짓이야기를 더 적는 이유는 칭찬과 관심을 받기 위해서이다. 선생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숙제를 하고, 일기를 적고, 청소를 하면서 생각했었다. '선생님은 다 알거야.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거. 그러니까 나를 예뻐하겠지?" 그때는 선생님이 산타할아버지 같았다. 보지 않아도 누가 착한 아이인지 나쁜 아이인지 다 알고 있을것 같았다. 

 

이 책의 주인공 건우에게도 선생님은 절대적이다. 그런데 그런 선생님께서 건우에게 나쁜 어린이표를 자꾸만 주신다. 건우는 초등학교 3학년이다. 과학상자를 사다주신 아빠를 위해 밤에 몰래 구두를 닦아드리는 착한 마음을 가진 아이이다. 그런데 학교에서 건우는 나쁜 어린이표를 많이 받은 아이로만 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말이다. 건우는 자신의 등에 나쁜 어린이라고 쓰여있는 기분이 들어 슬퍼진다. 건우가 가장 속이 상하는 건 선생님께서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나쁜 어린이표를 준다는 것이다. 장난도 친구가 먼저 걸어온 것이고, 여자애를 울린 것도 사실은 여자애가 혼자서 넘어진 것 뿐이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건우에게만 나쁜 어린이표를 준다. 마치 모든 나쁜 일은 건우밖에 할 사람이 없다는 듯이.

 

건우는 선생님이 자세한 이유도 묻지 않고 나쁜 어린이표를 주기 시작하자 자신도 수첩을 꺼내 몰래 선생님께 나쁜 선생님표를 주기 시작한다.

 

나쁜 선생님 표 하나!
고자질한 애한테도 나쁜 어린이표를 줘야지요.
나쁜 선생님 표 둘!
싸움은 지연이가 먼저 시작했어요.
나쁜 선생님표 셋!
저도 발표 좀 시켜 주세요.
나쁜 선생님표 넷!
창기는 떠든 게 아니라 수학문제를 물었을 뿐이에요.
나쁜 선생님표 다섯!
선생님은 친절하지 않아.
나쁜 어린이표 여섯!
노란색은 싫어.

 

 


건우는 선생님께 나쁜 선생님표를 주면서 통쾌하게 웃을 수 없다. 건우는 수첩에 적으면서도 가슴이 아프고 무섭다. 왜 선생님과 자신은 노란색 스티커 한장에 이렇게 슬퍼져야 하는지 건우는 알수 없다. 착한 어린이표를 받은 아이들은 나쁜 어린이표를 받을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건우는 이해가 가지만 안쓰럽다. 건우는 노란색 스티커를 받아서 슬픈게 아니라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자신이 나쁜 아이라고 불려지는 것 같아 슬픈 것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쁜 어린이라고 불린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슬프겠는가. 건우의 좋은 점은 알려도 하지도 않고 그저 나쁜 어린이로만 보는 것이 건우도, 나도 안타깝다.  

 

학교에서 체벌대신 사용했을 나쁜 어린이표, 그건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낙인을 찍는 것과 같지 않을까. 다른 반 아이에게 친구를 말 할때도 "쟤는 나쁜 어린이표 5개나 받은 애야"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말한 것은 틀림이 없이 항상 옳은 말이 된다. 나쁜 어린이표는 분명, 좋은 취지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으로 아이들은 스스로를 점수 매기는것이다. 건우라는 시험지에는 이미 나쁜 어린이표가 다섯개인 것이다. 아이들을 잘 가르친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아이의 마음을 다 알아주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다. 그렇기에 더 많이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드와르도 세상에서 가장 못된 아이 비룡소의 그림동화 127
존 버닝햄 지음, 조세현 옮김 / 비룡소 / 200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 버닝햄의 책은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믿음이 간다. 그는 아이의 마음을 잘 헤아릴 줄알고, 아이를 둔 부모가 어떻게 아이를 대해야하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가끔 그의 책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항상 아이인채로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믿지못할 상상을 혼자 하고는 한다. 아이를 이렇게 잘 아는 작가는 드물다. 이런 이유로 존 버닝햄의 책을 좋아한다.
 
이 책은 아이와 부모가 함께 봐야할 책이다. 그림책은 어른의 심장을 따끔하게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 책이 그러하다. 부모는 아이를 무조건 부모의 눈높이로 볼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 아이가 부모가 던진 고함이나, 비난에 상처받지 않을거라 여기며 혼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가슴에 고스란히 그 상처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아이는 더 삐뚤어지게 되고, 부모는 아이에게 더 소리를 지르게 된다. 말썽을 부리는 아이에게 좋은 말로 타이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아이가 성장해나가는 만큼 부모도 성장해나가야 한다. 아이의 성장은 몸이 성장하기에 알기 쉽지만 부모가 되는 마음의 성장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부단히 노력해야한다. 아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존 버닝햄의 그림책을 보기를 권하고 싶다.
 
책의 주인공 에드와르도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말썽꾸러기이다. 말썽꾸러기를 보고 좋게 말해주는 어른은 드물다. 그렇기에 에드와르도가 하나의 행동만 하면 어른들은 에드와로에게 화를 내고 에드와르도는 더욱 말썽을 부린다. 예를 들자면,
 
<가끔씩 에드와르도는 물건을 발로 찼어. 그럼 "세상에서 가장 버릇없는 녀석"이라는 소리
를 어른들이 하지. 그럴 때마다 에드와르도는 점점 버릇없게 굴었어. 다른 아이들처럼 에드와르도도 시끄럽게 떠들었어.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녀석 같으니라고"라는 말에 에드와르도는 점점 더 시끄럽게 떠들었어.>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에드와르도의 혼이 나기전의 행동은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한 자각없이 한 것이지만 혼이나고 나면 에드와르도는 그것이 나쁜지 알면서도 어른에게 화가나서 일부러 그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에드와르도는 어른들이 자신을 나쁜 아이라고 단정짓는 것이 싫다. 자신도 잘 할수 있는데 어른들은 먼저 단정지어버린다. 그것이 왜 나쁜지 어른들은 설명도 해주지 않고, 자신이 실수로 그랬다고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에드와르도를 혼내기 때문에 에드와르도는 점점 더 장난이 더욱 심해지는 아이가 된다. 
 
여기까지는 존 버닝햄이 아이의 마음을 잘 나타낸 부분이라고 보면된다. 이제 부모의 역할이 남았다. 예를 들자면,  
 
<버릇없고, 시끄럽는 에드와르도는 어느 날 발로 찬 화분이 흙 위로 떨어졌지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구나. 정말 예쁘다." 라는 말을 듣고 에드와르도는 열심히 식물을 가꾸고 실력도 제법이었어.>
 
아이는 칭찬에 변화한다. 비난은 아이를 변화시키는게 아니라 상황을 더욱 좋지 않게 만들어간다. 아이를 혼내더라도 아이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의 실수로 벌어진 상황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그렇기에 그 상황에 대해 화를 내기 보다는 아이에게 이런 상황이 주는 문제를 같이 이야기하고 왜 실수를 하게 되었는지 들어보고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다음부터는 조심하는 방법을 서로 찾아보는 것이 좋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깨달은 것중 하나는, 비난의 말보다 격려의 말에 행동을 변화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에드와르도는 어른들이 자신을 그렇게 단정짓자 정말 말썽쟁이가 된 것뿐이었다. 그러나 에드와르의 내면에는 잘 할수 있는 마음과 칭찬받고픈 마음이 항상 준비되어있었다. 아이를 단정짓지 않고, 아이의 내면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것. 그것이 부모의 할일이 아닐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휘소 - 못다 핀 천재 물리학자 청소년인물박물관 3
이용포 지음 / 작은씨앗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이휘소박사의 잔잔한 미소의 표지를 보는 순간 가슴이 따끔했다. 그 웃음이 너무 따뜻해서 놀람과 동시에 이분은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저렇게 따뜻한 웃음을 가진 분이 내게는 어렵고 차갑기만한 과학을 공부하신 분이라는 믿기지 않았다. 왠지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꼬장꼬장한 모습이 떠오르곤 했는데 이 책에 있는 이휘소님의 사진을 본 순간 이런말이 실례가 될지는 모르나 천진난만한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온 우주가 진통을 겪어야만 생겨날 수 있지. 하지만 풀꽃은 온 우주에게 감사할 줄 아는 것 같은데 인간들 중에는 자신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온 우주가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알게 되었다 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더구나."

 

한 아이가 태어났다. 온 우주가 진통을 겪어서 태어난 아이가 있다. 이휘소는 부모님이 모두 의사인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의사집안이지만 부모님은 검소하셨고, 가난하고 아픈 사람을 위할줄 알았으며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이휘소가 먼 타국땅에서 열악한 조건에서도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자신을 사랑해주던 가족때문이었을 것이다. 아프고 병든 사람을 위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자란 휘소도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린시절부터 호기심이 넘쳐났고, 세상 모든 것에 궁금증을 갔던 휘소는 어머니의 설명으로도, 책 속의 해답만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아이였다. 책 속에서 답을 찾지말고 질문을 찾기 위해 책을 읽으라던 어머니의 말씀에 책을 읽던 아이 휘소. 

 

이휘소만큼 시대를 잘못 태어난 사람이 또 어디있을까라는 안타까움이 든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공부 하고자하는 열망이 넘쳐났지만 그가 태어난 시대는 그를 뒷받침해줄 버팀목이 되지 못한 시대였다. 더 배우고 싶었기에, 더 많은 사람을 위하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기에 서울공대 화공과에 수석 입학한 뒤 2학년 때 미국 마이애미대로 유학을 갔다. 그곳은 그의 열정을 태우기에 충분했다. 공부밖에 모르던 그는 단기간에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입자물리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본교와 뉴욕주립대, 시카고대 교수 등을 지내며 노벨물리학상 수상을 의심하지 않는 과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42세의 나이로 죽고만다. 정말 덧없이 죽고 말았다.

 

책에는 그의 연구한 분야에 대해서는 그리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이휘소를 인간으로 보는 것을 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이휘소에 대해 다시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그를 얼마나 오해했던가. 그는 핵물리학자가 아니였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연구를 미국이 핵전쟁을 하는데 사용한 것에 분노했고 과학이 국가들의 권력다툼에 쓰이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과학을 연구하고 싶었다. 소립자연구를 하면서 그는 세상에 물질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알갱이로 나눠지는 것을 보면서 전 세계의 사람은 모두 형제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전쟁은 불필요한 거라 생각한다. 그는 부모님처럼 사람을 위하는 과학자가 되고 싶었고, 그렇게 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연구하고 진리를 탐구해갔다.  

 


<"휘소야, 파란 바닷물에 빨간색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지?"(중략)

"잉크는 곧 사라져서 눈에 보이지 않게 되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아주 사라진 걸까? 바닷물에 떨어진 빨간 잉크는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란다. 잉크는 바닷물이 되어 온 바다를 떠돌게 되지. 생각해 보렴, 얼마나 신나겠어. 고래의 뱃속을 탐험하기도 하고 하늘의 구름을 떠돌다 비가 되어 사막의 낙타 혹 위에 떨어져 그 낙타를 타고 사막을 여행할지도 모르지.
휘소야, 죽는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란다. 모양을 바꿀 뿐이지.">

 

 

하지만 덧없는 그의 죽음은 그의 소망을 가로막았다. 그가 어머니와 주고받던 편지 안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의 사랑과 존경 그리고 함께 있지 못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엄마가 죽는 것이 싫어 죽지 않는 약을 만들겠다는 이휘소 박사는 그렇게 사랑한 어머니를 두고 죽었다. 어머니의 대한 사랑이 가슴에 넘치고 넘치던 그는 하늘나라에서도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을까.

 

노벨상이 눈앞에 보일만큼 훌륭한 과학자가 되서 이제 겨우 조국에 할 일이 생겨 좋아했던, 돈이 없어 어머니를 뵙지 못해 보고픔으로 타국생활을 해야했던 그가 이제야 어머니를 마음대로 볼 수 있는데 죽고 말았다. 그는 세계가 먼저 알아주었던 사람이었다. 조국에서는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의 가슴 속에는 항상 조국이 있었것만 우리는 그것을 미처 알아봐주지 못했다. 이렇게 뒤늦게 그의 진실을, 그의 가치를 알게 되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죄송하다고 말해야할까. 대체 누구에게 죄스러움을 빌어야할까. 그는 이제 없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영주권신청도 미루고 미뤄서 한 이휘소 박사에게 한국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죄송하다는 말도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밀려든다. 그를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겁쟁이 빌리 비룡소의 그림동화 166
앤서니 브라운 지음, 김경미 옮김 / 비룡소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카를 재우려고 할 때면 조카의 걱정은 시작된다. 자신의 장난감이 도망갈까 걱정이고, 냉장고에 있는 맛있는 젤리를 동생이 먹을까봐 걱정이고, 자신이 자고 있을 때 만화영화에서처럼 악당이 나타나 자신을 잡아갈까 걱정을 한다. 그럴 때면 조카의 걱정에 하나씩 응답을 해주어도 조카의 고민은 줄어들지 않고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 많을수록 그날 본 책이 많을수록 만화영화에 등장하는 악당이 많을수록 늘어갔다. 이런 조카를 두었기에 이 책을 봤을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림책을 읽어내려가면서 나도 빌리와 조카처럼 겁이 많은 아이였다는 것이 기억났다.
 
빌리는 침대에 누워 잠을 잘 때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신발이 걸어서 도망갈까 걱정이고 큰 새가 날아서 자신을 잡아갈까 걱정이다. 빌리에게는 자신이 잠든 시간에 일어날 일이 너무 걱정이 된다. 나도 그랬다. 나는 잠이 드는데 세상은 잠들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고 생각하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이 되지 않아 걱정을 했다. 특히 나의 걱정은 인형들이 모두 일어나서 춤을 추고 놀다가 나를 밟으면 깨어나야 하는건지, 잠든체 해야하는 건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깨어나면 인형들이 자신들의 비밀을 들키고 다 도망가버릴까봐 겁이 났기때문이다. 비가 많이 오는 날, 눈이 많이 오는 날은 더 걱정이 된다. 빌리처럼 말이다. 물에 잠겨 집이 떠내려가지는 않을까,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집이 파묻히는 것은 아닌가하는  걱정으로 밤을 보내다가 비가 그치고, 눈이 그치는 것을 보고 겨우 잠든 적도 있다.
 
빌리의 부모님은 그런 것은 쓸데없는 고민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말한마디로 풀릴 걱정이라면 겁쟁이라는 별명이 붙지않았을 것이다. 빌리는 부모님이 자신의 걱정을 가볍게 보는 것에 슬펐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께서 나의 걱정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을 때 슬펐던 것처럼 말이다. 걱정은 걱정해본 사람이 안다. 걱정은 걱정할 수록 더욱 커진다. 걱정을 멈추기위해 다른 생각을 해봐도 그 다른 생각이 걱정이 되어버린다. 조카를 달래는 나를 보면서 나역시 부모님처럼 조카의 걱정을 가벼운 것으로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아이는 밤잠을 설칠만큼 무서운 것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빌리에게는 빌리의 걱정을 알아주는 할머님이 있다. 할머니 집에서 자게 된 빌리는 더 걱정이 된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밤을 보내다가 할머니한테가서 도움을 청하는 빌리. 할머니는 빌리에게 그동안 힘들었겠다며 토닥여준다. 그리고나서 빌리에게 빌리대신 걱정을 하는 인형을 만들어준다. 빌리가 자는동안 그 인형들이 빌리대신 걱정을 해주는 것이다. 그날 빌리는 편하게 잠을 잔다. 하지만 그 다음날 또 고민이다. 자신은 편하게 자는데 걱정인형들은 걱정이 너무 많아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이다. 빌리의 걱정은 정말 끝이 없다. 빌리는 걱정인형의 걱정을 덜기 위해 좋은 방법을 생각한다.
 
아이들을 돌볼때면 나는 아이를 거치지 않고 어른이 된 것처럼 아이를 대하게 된다. 나역시 그 아이들처럼 걱정과 고민을 하며 자라났는데 말이다. 아이들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가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원하듯 말이다. 오늘은 조카에게 이 책을 읽어주고 걱정인형을 함께 만들어 봐야겠다. 두개는 내 베개밑에 넣어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남자에게 전화하지 마라
론다 핀들링 지음, 이경식 옮김 / 서돌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누군가가 그랬다. 이별하고 난 뒤에 세상의 모든 슬픈 노래는 자기를 위한 노래같다고, 나역시 그랬다. 어떻게 그렇게 내맘을 대변하는지, 노래를 들으면서 울기도 여러번이다. 노래 속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헤어진 사람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다가 나오지도 않는 그,그녀의 집앞을 서성이거나 혹은 차갑게 끊어버릴 전화를 건다. 그런 노래를 들을때면 주인공의 맘이 내 맘음 같아 나역시 헤어진 이에게 전화를 하고만다. 결과는 노래 속의 아픔보다 훨씬 더 참담했다. 그는 내가 잡을수록 달아났고 내게 전화하지 말라는 말을 아주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문제는 한번 한 전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게 된다는것이다. 어차피 한번 무너진 자존심인데 뭐 어때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비참하게도 전화를 할 때마다 더이상 무너질게 없을 것 같던 자존심은 계속 해서 무너지고 남은 것은 회복하기 힘든 마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는데 자존심이 뭐가 대수냐라는 말을 믿었었다. 그러나 자존심은 대수다. 이별 후에 자존심을 지킬 줄 알아야 나를 지킬 수 있다. 이별하고 온전할리 없지만 나 스스로만 무너지면 되는 것이지 이제는 헤어진 타인에게까지 무너진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렇게 무너져가던 시절, 이 책을 만났다면 참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랬다면 분명 헤어진 그 남자를 힘들게 하지도, 전화를 했다는 이유로 나를 자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책을 덮으며 내 생각은 하나로 일관되었다.
"이별을 잘 견디어 내는 것은 다음 사랑을 잘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라는 생각이었다.이별에 서툴러서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하고, 매달리다 거절당하고, 그러다 다시 그남자와 같은 사람을 찾게 되고, 또 다시 이별을 맞이하고 쳇바퀴 도는 사랑을 계속 하게 된다. 저자는 쳇바퀴 도는 잘못된 사랑을 하지 말기 위해 몇개의 충고를 한다.
 
첫째, 나 자신을 알라.
헤어지는 이유는 두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남자가 이상하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내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두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은 고맙게도 하나다. 바로 나를 제대로 아는 것. 과거부터 현재까지 같은 패턴의 연애를 계속 하고 있다면 그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인줄 알았다면 치료를 하면된다. 스스로 아픈 부분을 인식하고 솔직해지는 것은 상당히 어렵지만 앞으로 여러번 실연의 고통을 겪는 것에 비하면 스스로를 제대로 알고 사랑하는 것이 낫다. 나를 제대로 알아야 소중히 여길 수 있고 상대방도 나를 소중히 여길 것이다.
 
둘째, 헤어졌다면 마침표를 찍어라.
 
한번 깨진 컵은 붙을 수 없다. 붙였더라도 흔적은 남아서 깨진 컵임을 인식하게 된다. 연인과의 헤어짐도 마찬가지이다. 깨진 인연이라면 미련을 갖지 말아야한다. 다시 붙이기 위해서는 서로의 마음이 둘다 한곳을 향해야 한다. 그런 연인을 본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상대방은 이미 떠났는데 나만 계속 그 사람의 등만 보고 인연이 붙길 바라는 건 헛수고이다. 그 행동으로 추억마저 간직할 수 없게 된다. 서로가 다른 곳을 보기로 결정했다면 끝이라는 글자 옆에 마침표를 찍어야한다.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한다.
 
셋째,감정을 인정하되 후회할 일은 하지 마라.
 
헤어지면 슬프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아픔과 숨을 쉴 수 없다는 고통마저 느낀다. 이 사람이 아니면 다시는 사랑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은 옵션이다. 누구나 아픈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부정하게 되면 헤어짐을 인정하지 못하게 되고 미련이 생긴다. 헤어지게 되면 그 슬픔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좋다.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그 아픔의 시간동안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다스린다는 말이 포함되어있다. 하지만 간혹 아플대로 아프지만 성숙함이 아닌 미숙함을 얻는 경우도 있다. 나도 그랬다. 더이상 아플 수 없을만큼 아팠지만 후회할 일을 하기를 여러번이다. 그남자에게 찾아간다거나, 전화를 한다거나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너무 사랑해서 그래라는 말로는 그 행동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후회할 행동을 하기 전에 30초만 생각하는 버릇을 들이는 게 좋다. 나의 경우에는 발신 금지를 해놓기도 했다.
헤어짐의 아픔을 인정하고 이겨내야 그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남자만이 아닌 동성친구에게도 정성을 쏟아야한다. 내 아픔을 들어줄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 그 남자에게 전화하고픈 횟수를 3번은 줄일 수 있다. 친구, 여행, 독서, 공부, 취미 연애하는 동안 못한 것을 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다.
 
마치면서,
헤어지고 나서 다음 사랑을 시작하는 친구들을 보면 두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번째 유형은 전의 남자보다 더 나은 남자를 만나는 유형이다. 이런 유형의 경우는 정말 마음껏 그 헤어짐에 슬퍼하되 절대로 마침표를 찍은이상 되돌이표를 그리지 않는다. 끝은 끝이되 그 끝을 온전히 느끼는 유형이다. 또한 헤어진 이유에 대한 자기반성과 상대방의 단점도 꼼꼼히 따지는 합리성을 들어내기도 한다. 같은 단점을 가진 남자는 아무리 끌려도 만나지 않으려고 하고 자신도 상대방을 지치게 하는 행동은 자제한다.
 
두번째 유형은 전의 남자와 같거나 그보다 못한 남자를 만나는 유형이다. 이런 경우는 주위 친구들에게 헤어짐이 정말 헤어짐인지 아리송하게 한다. 헤어졌다고 해서 기껏 위로해줬더니 다음날 다시 만나고 있는 경우도 있고 얼마 못가 다시 헤어지고 누군가 한쪽은 상대방에게 매달리고 만다. 결론은 역시나 그래도 다시 만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좋지않은 모습을 끝까지 보이며  상대방과 자신에게 둘다 실망을 안긴다. 이런 경우는 헤어짐을 잊기 위해 바로 다른 사람을 만난다. 그러다보니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없어 실수를 되풀이 하고 만다.
 
나는 첫번째 유형을 꿈꾸지만 두번째 유형에 가깝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이상 두번째 유형이 되지는 않겠다고 말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