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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랑이 있다.
 
하나는 잠시 불타올랐다가 곧 이전의 광채를 잃어버리는,
금세 지루한 일상의 범주로 편입되는 평범한 사랑이다.
 
또 하나는, 전자에 대한 대칭적 개념으로 정의하자면 비범한 사랑이라고 해야 할 테지만,
그보다는 신비로운 사랑이라고 해야 좀더 그 자체의 성질에 가까울 것이다.
 
후자 쪽의 사랑은 좀더 희귀하고 벼락같다.
 
전자 쪽의 사랑만 경험하고서도 신비롭고 벼락같은 경험이었노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후자 쪽의 사랑을 만나면 금세 깨달을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흔해빠진 다른 사랑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 순수, 운명, 복종, 이런 복고적 단어들이 섬광같이 정수리를 내리치는 그런 감각은 일반적은 사랑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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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차가운 밤바람 속에 나와 있기도 했어?"
 
"가끔."
 
"추워서 금방 들어갔겠지?"
 
"아니요, 얼어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까지 서 있었어요."
 
"왜?"
 
하늘의 달은 깨진 얼음조각같이 날카롭고 스산했다. 이현은 그녀의 어깨에 두툼한 파카를 덮어주려 했으나 이진은 고개를 저어 사양했다. 이진이 다시 입을 연 것은, 이현조차도 서서히 추위가 견디기 어렵게 느껴질 만큼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온몸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추위 속에 서 있으면 더 견디기 쉬운 일들이 있어요."
 
이진은 새파랗게 바랜 입술로 얼음 부스러기를 토해내듯이 힘들게 말했다.
 
"몸에 온기가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기쁘니까요. 온 힘을 다해 품안으로 파고들게 돼요. 만사가 순조롭죠."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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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란 중요한 거예요. 원초적으로 그래요. 기록이 남지 않은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아니라고요? 실존이란 엄연하고도 무거운 거라서, 지켜보는 눈길이나 기록하는 손가락 따위의 존재 여부로 달라지지 않는다고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나요. 나하고는 생각이 다르군요.

존재했던 엄연하고 무거운 현실도,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져버립니다. 그 반대로, 존재하지 않았던 일도 일단 기록되어버리면 존재했던 것으로 착간되어요. 세월이 흘러 증언자들이 모두 늙어 죽어버리면 더욱 그렇죠. 기록은 기억의 확장이니까요. 우리는 기억을 믿듯이 기록을 믿어요. 결국 기록은 존재를 대신해요. 존재는, 기록이 남아 있는 그 범위까지만 유효성을 가지죠. 그렇기 때문에 영리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 그 기록이 어떻게 유지될 것인지에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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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무덤은 있을 것 같아. 무덤은 산에만 있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에도 , 그것도 공동묘지처럼 많이 있을 것 같아. 세상을 오래 산 사람일수록, 남보다 불행하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더 많겠지. 왠지 그런 생각이 들어.

무덤마다 묻혀야 될 것들이 묻혀 있겠지. 그래, 도무지 저절로 잊혀지지 않기에 묻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들, 어떤 뼈아픈 말이라든지 잊지 못할 표정, 운명이 결정되던 순간의 잔인스런 장면 따위가 묻혀 있을거야. 그런 걸 마음의 땅에 꼭꼭 묻은 이는 물론 그 마음의 주인이지. 산 임자가 자기 산에 부모나 자식의 무덤을, 아니 누구보다 자기 자신의 무덤을 만들 듯이 제가 제 기억을 자기 속에 묻는 거지. 슬퍼하고, 후회하고, 자책하며.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는 그 무덤들마져 무너지고 잊혀질거야. 그러지 않는다면 어떻게 평화롭고 즐겁게들 살아갈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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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빛난다.

 

무언가가 빠졌다.

 

얘기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의 엉뚱한 착각인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의 기억따위는 사람들 대부분이 아주 자연스럽게 잊어버린다.

 

그런데 달빛이 환한 밤에 밖에 있다 보면, 안절부절 못하는 일이 있었다.

 

먼 하늘을 올려다보며 바람을 맞다보면, 너무도 그리운 일들이 떠오를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 거기에 있는데, 좀 더 생각하려 하면 소리도 없이 모습을 감추고 만다.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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