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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의 연애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평점 :
나는 이진.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입니다.
내 이름은 이현.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
오늘 내가 좋아하는 그녀가 차()를 보내왔다. 펄 쟈스민이란 차를. 은은한 쟈스민 향이 뜨거운 물에 우리기도 전에 내 코를 자극해서 몽롱하게 만든다. 진주모양으로 동글하게 만 펄 쟈스민은 이현이 사랑한 여자 이진을 떠올리게 한다. 책을 덮은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나는 이 책에 대해 말할 수가 없었다. 이진의 마음도, 이현의 마음도 짐작이 될 것 같아서. 이현의 사랑을, 이진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 미안해서 어떤 말을 적기가 망설어졌던 내게 친구가 준 차가 그녀를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은은한 향기를 가진 그녀를.
본론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그녀는 내게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라고 알려주었다. 아니, 이진이 결혼할 남자 이현에게 보내는 편지를 내가 훔쳐보았다는 말이 맞겠다. 책의 시작, 나는 이진과 이현의 삶을 몰래 훔쳐보는 이가 되고 말았다. 아니 이현의 기록을 읽는 사람이 된 것인지도.
#이진,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지요, 그게 전부랍니다.
영혼을 기록하는 게 삶의 목적이고 그게 전부인 여자 이진. 특이한 점은 그녀가 기록하는 영혼은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것이다. 그녀가 바라는 건 단 하나, 영혼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는 작은 카우치가 들어갈 수 있는 방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록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생계비. 조용하고 소박한 생활, 들리는 건 사각사각 연필 쓰는 소리. 그게 이진이 바라는 삶이었다.
하지만 이진의 아버지는 명성있는 시인이었음에도 이진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자립을 요구한다. 그의 아내를 그대로 닮은 이진은 아버지 이세에게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아버지로부터 자립해야 하는 이진에게 이현이 나타난다. 이현, 그는 그녀가 영혼을 기록하는 일을 존중해주겠다며 결혼을 요구하고 그들은 3년동안 계약 결혼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녀는 결혼을 받아들였다. 아늑한 집에서 영혼을 기록할 수 있기에!
#이현,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를 사랑했습니다.
이진을 처음 보는 순간 이현은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아버지의 앨범을 뒤져 이진과 같은 얼굴을 한 여인의 결혼식 사진을 꺼내들고 이진을 만나러 간다. 우린 오래 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너무나 똑같은 여인이겄만 그녀는 이진이 아니라 이진의 어머니라고 한다. 6살이었던 이현이 첫사랑이라 불리는 사진 속 여인에게 나는 살구향기를 이진에게도 맡으면서 이현은 이진을 사랑하게 된다.
두번의 이혼도 흠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남자, 이현은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라는 독특함에도 이진을 사랑한다. 아니 그건 정해진 운명인지도 모른다. 6살 때 정해진 운명. 이현은 자신 있었다. 언젠가는 이진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리라, 응해주리라. 그런 믿음이. 영혼을 기록하는 일 이외의 시간에는 자신과 있었으므로.
#기록은 존재를 대신해요-이진
살아있는 영혼들을 기록하는 이진을 보며 궁금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서 어떻게 영혼만 따로 만날 수가 있는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이진은 어떻게 영혼들을 기록할 수 있는지. 영혼이 이진을 고르는 것이 아니었다. 돌아다니던 영혼들은 이진에게 덜미가 잡혀 원하든 원치않든 그들이 밝히고자 하지 않는 내밀한 이야기까지 모두 기록되어야 했다. 이진은 기록하는 순간 이진이 아니라 그 영혼이 되었으니.
영혼이 빠져나간 내 몸. 언제부터인가 영혼은 내가 눈 뜨고 있는 순간에는 내 몸에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던 내게 살아있는 영혼을 기록하는 이진은 충격이었다. 자신의 영혼이 어디를 갔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는 건 아닐까란 생각에 놀랐다. 차차 그 영혼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누군가 한명은 내 삶을 철철히 알아주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면서 이진이 가여워졌다. 영혼을 기록하며 살 수밖에 없는 그녀가 슬펐다.
살면서 누군가 한명은 자신의 이야기를 은밀하게 모두 들어주어야 한다는 생각, 그건 우리 모두에게 숨겨진 진실일까? 이진은 그래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걸까?
#사랑, 언제가 한번쯤은 통하리라 생각했었습니다. -이현
살구즙 향기가 가득한 여자, 많은 사람들 중에서 눈에 튀지 않지만 그녀를 한번 본 남자들은 그녀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여자. 두번 그녀를 만난다면 절대 놓치고 싶지 않으리란 꿈을 꾸게 만드는 여자. 하지만 절대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한마디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여자. 그래서 남자들의 삶을 더 아프게 하는 여자. 그런 여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 이현.
항상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보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얼마나 힘이 들까? 그녀가 내 곁에 있는데 마음이 내게 없을 때 그건 얼마나 외로운걸까? 내 마음은 사랑임이 틀림 없는데 사랑이 아닐리가 없는데 그녀만 몰라준다면? 그녀가 알면서도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사람은 얼만큼 절망하게 될까?
이현의 아픔을 보며 이진을 탓할 수 없음에 아프다. 그녀라고 오죽할까. 영혼의 기록 이외에는 마음을 써보지도 써 볼 수도 없는 그녀라고 오죽할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두사람 다 아프다.
#이 책의 보물찾기-이진의 기록
책에는 이진의 기록으로 4개의 단편이 등장한다. 2개는 이미 그녀가 발표한 작품이고 뒤의 두개는 신작이라고 한다. 그걸 모르고 이 4개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지나 고민하며 읽었는데 다 읽고 보니 이 단편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심윤경, 그녀의 독특한 이력으로 인해 매번 놀란다.
작가의 첫번째 책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다 읽고 나서 작가가 이공계 전공이란 사실에 놀랐다. 아름다운 문체와 마음을 울리는 글쓰기를 하는 그녀가 대학에서 전공한 것은 분자 생물학이었다. 작가의 2개의 책을 마저 읽고도 역시나 놀란다. 이공계라고 감성이 부족하리라 생각했던 내 오해가 작가 심윤경으로 인해 깨졌다.
<좋았던 구절>
1.
기록이란 중요한 거예요. 원초적으로 그래요. 기록이 남지 않은 것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아니라고요? 실존이란 엄연하고도 무거운 거라서, 지켜보는 눈길이나 기록하는 손가락 따위의 존재 여부로 달라지지 않는다고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나요. 나하고는 생각이 다르군요.
존재했던 엄연하고 무거운 현실도,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져버립니다. 그 반대로, 존재하지 않았던 일도 일단 기록되어버리면 존재했던 것으로 착간되어요. 세월이 흘러 증언자들이 모두 늙어 죽어버리면 더욱 그렇죠. 기록은 기억의 확장이니까요. 우리는 기억을 믿듯이 기록을 믿어요. 결국 기록은 존재를 대신해요. 존재는, 기록이 남아 있는 그 범위까지만 유효성을 가지죠. 그렇기 때문에 영리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 그 기록이 어떻게 유지될 것인지에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2.
나는 사랑을 쉽게 보았습니다.
한 잔의 붉은 와인처럼 말입니다.
그 사랑이 나의 심장을 갈라 쏟아져 나오는 붉은 피처럼 처절한 것이었음을 알았더라면
나는 차마 그녀를 사랑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3.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랑이 있다.
하나는 잠시 불타올랐다가 곧 이전의 광채를 잃어버리는,
금세 지루한 일상의 범주로 편입되는 평범한 사랑이다.
또 하나는, 전자에 대한 대칭적 개념으로 정의하자면 비범한 사랑이라고 해야 할 테지만,
그보다는 신비로운 사랑이라고 해야 좀더 그 자체의 성질에 가까울 것이다.
후자 쪽의 사랑은 좀더 희귀하고 벼락같다.
전자 쪽의 사랑만 경험하고서도 신비롭고 벼락같은 경험이었노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후자 쪽의 사랑을 만나면 금세 깨달을 수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흔해빠진 다른 사랑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 순수, 운명, 복종, 이런 복고적 단어들이 섬광같이 정수리를 내리치는 그런 감각은 일반적은 사랑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