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무슨 국내 저자 책이 표절이라 해서 절판되었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했는데, 뒤늦게 궁금해서 관련 기사를 검색해 보니 돌베개에서 2023년 7월에 간행한 윤여일의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라고 나온다. 


그런데 어떤 내용을 다룬 책인가 궁금해서 알라딘에서 제목으로 검색해 보니 나오지 않는다. 혹시 제목을 잘못 썼나 싶어서 이번에는 저자명으로 검색해 보니 죽내호 번역서까지 포함해서 여럿 나오는데 그 책만 없다.


이상하다 싶어서 다시 "윤여일 + 1990년대"로 통합 검색해 보니, 국내도서에 2건이 있다고 나오지만 막상 클릭해 보니 <동아시아 담론>이라는 책 1건만 나온다. 이쯤 되니 알라딘이 뭔가 수작을 부린 게 아닐까 싶었다.


확인차 구글에 들어가서 "윤여일 + 1990년대"로 검색해 보니, 교보문고며 예스24 같은 서점의 해당 상품 링크가 줄줄이 나오고, 심지어 출판사인 돌베개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책 정보 링크까지도 줄줄이 검색되었다.


의외로 알라딘의 해당 상품 링크도 검색되기에 눌러보았더니, 어째서인지 "비공개 상태입니다"라는 팝업창만 뜨고 접속되지 않는다. 결국 알라딘에서 해당 상품에 접근하지 못하게 뭔가 조치를 내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상품을 판매하거나 말거나가 판매자인 서점의 재량이라면, 상품 정보조차 공개하지 말지도 서점의 재량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표절 논란이 생긴 책이라면 문제의 소지가 있으니 지우는 게 낫다고 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교보나 예스 같은 다른 서점, 심지어 출판사인 돌베개조차도 그 책에 대한 정보만큼은 그냥 남겨두는 상황에서, 유독 알라딘만이 비공개 조치라는 호들갑을 떨고 있다는 점은 유난히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다.


물론 알라딘은 이전부터도 이런 식으로 절판본의 서지 정보를 말살하는 조치를 줄곧 취해 왔다. 대표적인 경우가 김훈의 <공차는 아이들>인데, 매그넘 사진을 곁들인 초판본은 알라딘에서 아예 없는 책 취급을 받는다.


이 책은 원래 월드컵 기념으로 나온 매그넘 축구 사진집에 김훈이 일종의 감상문을 덧붙인 방식으로 간행되었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나중에는 국내 작가의 사진과 김훈의 글을 결합한 다른 책이 같은 제목으로 나왔다.


알라딘에서 <공차는 아이들>로 검색하면 국내도서로는 나중의 책만 검색되고, 먼저 나온 매그넘 사진집은 누군가가 올린 중고로만 검색된다. 하지만 중고 상품에 걸린 링크를 통해 사라진 책으로도 거슬러 갈 수 있다.


김훈 + 매그넘의 <공차는 아이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00445


결국 서지 정보를 완전 말살한 것이 아니라 검색이 불가능한 비공개로 돌린 셈이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라딘에서 의도적으로 그랬다고밖에 볼 수 없다. 단순히 구판과 신판의 구분 목적이라 보기에는 뭔가 미심쩍다.


이런 선례를 감안했을 때, 유독 알라딘만 윤여일의 표절 도서를 비공개까지 하며 예민하게 구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다른 서점이나 심지어 출판사보다도 뭔가 더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는 아닐까?


혹시 북펀드나 강연회나 사인회처럼 뭔가 요란한 이벤트를 통해 저자 띄워주기에 공모하고 나서 제 발이 저려서 그랬던 걸까? 하지만 그런 홍보에 가장 열을 올렸을 출판사 돌베개도 태연한 상황이니 더 이상스럽다.


상식적으로 출판사보다 서점이 저자와 더 밀착되었을 리는 없으니, 결국 알라딘의 판단 착오라고 봐야 맞을 법하다. 절판 공지와 판매 중지만 하면 그만인 사안을 과대평가한 까닭에 기록 말살에 들어간 것은 아닐까?


결국 알라딘의 행동은 어떤 의도라기보다는 그냥 담당자가 오버해 저지른 실수라고 봐야 맞을 것 같다. 물론 표절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없는 책 취급을 하는 것은 무리이며, 어쩌면 사실 왜곡이기도 하니까.


흔히 말하듯 '알아서 기었다'고도 할 수 있을 터인데, 최근 중고 품질 이슈로 알라딘과 첨예한 대립각을 일방적으로 세워 왔던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전혀 예상도 못했던 일이라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다.


평소에 잘못을 먼저 저질러 놓고도 이의를 제기할 때마다 적반하장으로 나오던 양아치 놈이 뭔가 더 큰 일에 휘말렸다 싶자 남들 모두 멀쩡히 서 있는데 혼자서만 잽싸게 엎드려 버린 셈이 되었으니 우습지 않을 리가...



[*] 글을 올리고 나서 다시 보니 뭔가 허전해서 죽내호 책이라도 몇 권 집어넣으려고 알라딘 상품 넣기에서 검색해 보니, 어찌 된 일인지 여기서는 문제의 표절작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가 버젓이 검색된다. 뒤늦게라도 접근 금지 조치가 해제된 것인가 궁금해서 내 페이퍼에 집어넣고 나서 클릭해 보니, 역시나 이전처럼 비공개 경고창이 뜬다. 결국 상품 검색은 막았지만 서재의 상품 추가 검색은 막지 않았던 셈이니, 이래저래 손발이 맞지 않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알라딘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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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책에 대한 책들'만 모아 놓은 옥탑방 구석 책장을 뒤졌더니 <채링크로스 84번지> 번역서와 원서가 나온다. 마침 얼마 전에 개정판이 나온 것 같기에, 뭐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비교해 보려고 꺼내 왔는데, 초판본인 번역서를 펼치자마자 군데군데 오역 표시가 눈에 띈다.


나귀님 역시 번역서를 통해 처음 만난 작품이기 때문에 일부 어색한 부분이 있기는 했어도 오역이라고 단정하지는 못하다가, 나중에야 헌책방에서 (가격표를 보니 신고서점에서 인터넷으로 구입한 듯하다) 입수한 페이퍼백과 비교해 보니 예상 외로 오역이 많아 실망하고 말았다.


애초에 분량 자체가 많지 않은 책이다 보니 빈번한 오역이 더욱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는데, 한편으로는 서적이나 인물에 대한 무지가 원인이고, 또 한편으로는 번역과 편집 과정에서의 부주의가 원인이다. 특히 그냥 옮기면 되는데도 굳이 머리 굴리다 틀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저자가 서점에 보낸 첫 번째 편지(1949년 10월 5일)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저는 '희귀 고서점'이라는 말만 봐도 기가 질리곤 하는데, '희귀' 하면 곧 값이 비쌀 것이라는 생각부터 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희귀 고서적에 취미가 있는 가난한 작가입니다."(9쪽)


그런데 이 번역문은 저자의 의도를 독자에게 잘못 전달하고 있다. 왜냐하면 "희귀 고서점"과 "희귀하면"과 "희귀 고서적에 취미가 있는"으로 옮긴 영어 단어는 각각 antiquarian booksellers(고서점)와 antique(골동)과 antiquarian taste in books(고전을 좋아하는)이기 때문이다.


번역서는 원문에도 없는 "희귀"라는 단어를 굳이 집어넣어서, 마치 저자가 희귀본 수집가라도 되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었는데, 실제로는 베스트셀러나 대학 교재만 취급하는 뉴욕의 일반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고전을 런던에서 중고로라도 구해 읽으려는 열성 독자일 뿐이다.


즉 저자의 말은 희귀본 수집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고전을 읽으려다 보니 중고로 구할 수밖에 없는 독자의 고충을 담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야만 바로 뒤에 나오는 하소연(우리 동네에서 고전은 고가의 희귀본 아니면 학생들이 보는 교재밖에 없다)과도 아귀가 맞는다.


영화에서는 원작에 없는 장면을 추가해서 저자의 처지를 더 명료하게 보여준다. 즉 저자는 당시 베스트셀러인 노먼 메일러의 <나자와 사자>가 잔뜩 쌓인 신간 서점에 가서 영국 고전이 있는지 문의했다가 '뉴욕엔 그런 책 읽는 사람이 없다'는 직원의 답변에 짜증을 내며 나온다.


또 원문 그대로 옮기면 되는데도 굳이 머리를 굴리다가 틀린 사례로는 세 번째 편지(1949년 11월 3일)에서 고서점에서 보내준 책의 상태가 너무 좋다며 감탄해 마지않는 대목에 나오는 "스티븐슨은 너무 훌륭하여 제 누런 골동품 책장이 부끄러울 정도입니다"(12쪽)를 들 수 있다. 


결국 '이렇게 귀하신 책이 이렇게 누추한 곳에'라는 뜻이지만, "누런 골동품 책장"이라면 뭐가 문제일까 싶어 의아한데, 사실 이건 "오렌지 담는 나무 궤짝으로 만든 책장"(orange-crate bookshelf)의 오역이다. 즉 과일 가게에서 주워 온 상자로 만든 책장이라 초라하다는 거다.


지금이야 종이 상자와 스폰지 완충재가 일반적이지만, 예전에는 과일을 나무 상자에 담고 쌀겨 등을 넣어 완충재로 사용했다. 영화에서도 저자의 책장은 나무 상자 두 개를 옆으로 세워 놓고 판자를 얹는 식으로 층층이 쌓은 모습이어서 "누런 골동품 책장"과는 영 거리가 멀다.


또 하나 황당한 오역을 지적하자면 1950년 11월 1일 편지의 한 대목을 들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어쩌다 잘못해서 두 권이 겉장이 떨어져 나간 것뿐입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포장지 값으로 우리에게 1실링을 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초판본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위의 인용문은 저자가 보낸 항의 편지에 대한 서점 측의 답변 가운데 일부다. 서점에서 보낸 소포를 뜯다 보니, 그 포장지가 신문지 같은 싸구려 종이가 아니라 웬 고전 서적의 낱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고서를 취급하는 서점에서 왜 책을 훼손하느냐며 노발대발했던 거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위의 인용문은 오역이다. 제대로 옮기자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 "어쩌다 표지가 떨어져 나간 낱권이 두 권 들어와서 그랬습니다. 설령 우리가 단돈 1실링에 팔겠다 하더라도,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절대 구입할 리가 없는 품질의 낱권이었거든요."


결국 하자 있는 물건이라 헐값에도 안 팔릴 터이니 (물론 알라딘 같으면 "상급"에 판매했겠지만!) 아예 판매불가능한 제품이라 판단되어 책을 찢어서 포장지로 재활용했다는 뜻이다.(예전에 어떤 출판사에서도 폐기 도서를 조각조각 잘라 홍보용으로 무료 배포한 적이 있었다!)


위에 언급한 오역 사례 이외에도 인명을 착각한 경우, 동음이의어를 잘못 이해한 경우, 번역어를 잘못 선택한 경우, 기타 누락과 오독의 사례까지 여러 가지 오류가 있다. 가볍게 뒤적여도 문제가 많았으니, 작정하고 살펴보면 뭐가 더 나올지 모르겠다 싶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물론 아무리 오역이 있다 한들, 채링크로스 84번지가 킹스크로스역 9와 3/4 승강장으로 바뀌는 일이야 없을 것이고, 뉴욕의 여성 작가와 런던의 서점 직원들이 주고받은 편지 묶음이 졸지에 이퇴계와 기고봉이 주고받은 사단칠정론에 대한 편지 묶음으로 바뀔 리도 없을 것이다.


다만 아무리 인상적인 소재에 훈훈한 내용이라도 빈번한 오역으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번역서라면, 과연 독자는 이 작품을 '읽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이쯤 되면 번역자와 출판사 모두 저자의 말마따나 "천벌 받아 마땅한 짓"(15쪽)을 20년째 계속하는 셈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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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알라딘 앱에서 "오늘의 한 문장"이라는 광고가 뜬다. 신간 도서의 내용 중 한두 문장을 발췌해서 보여주는 것인데, 홈에서 뒤로가기를 누르면 종료하겠느냐는 안내와 함께 이 광고가 뜨는 거다. 바깥양반이 쓰다 버린 낡은 스마트폰을 쓰는 까닭에 버튼 인식이 잘 안 되어서 뒤로가기를 자주 누르는 나귀님이니 이걸 하루에도 몇 번씩 본다.


그런데 한 번은 "오늘의 한 문장"에서 상당히 묘한 구절이 등장한다. "나르시사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죽은 것들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무서워해야 한다고 (...) 우리는 그런 멍청한 말이 어디 있나 하고 생각했다. 아니 어떻게 나르시사를, 예를 들어 <엑소시스트>의 소녀 리건보..." 인용문을 중간에 뭉텅 잘라먹었기에 뭔가 궁금해서 검색해 보았다.


알고 보니 에콰도르 여성 작가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의 단편집 <투계>에 수록된 단편 "괴물"의 한 대목이라고 하는데, 책 소개 글에 올라온 저 인용문의 뒷부분은 대략 이러했다: "아니 어떻게 나르시사를, 예를 들어 <엑소시스트>의 소녀 리건보다, 우리 집 정원사 페페 아저씨를 살렘의 뱀파이어나 악마의 자식 데미안보다 더 무서워할 수 있을까."


이 인용문에서는 <엑소시스트>의 주인공 리건 말고도 반가운 이름이 제법 여러 개 나온다. "살렘의 뱀파이어"는 스티븐 킹의 <세일럼스 롯>의 (번역서 제목인 <살렘스 롯>과 일치시킨 모양이다) 내용인데, 아마도 원작 소설보다는 이를 각색한 TV 영화 <공포의 별장>을 가리키는 듯하다. "악마의 자식 데미안"은 영화 <오멘> 시리즈의 주인공을 말한다.


결국 화자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대표적인 공포 영화를 여러 편 언급하는 셈이니, 작품의 시대 배경이나 인물의 나이를 짐작하는 데에 참고가 될 만하다. 구글링해 보니 영역본에는 위의 인용문 다음에 리건, 뱀파이어, 데미안에 이어서 "늑대인간"을 "아빠"와 비교하는 구절도 나오던데, 알라딘의 책 소개 페이지에 인용된 것은 위의 구절이 전부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온갖 초자연적 존재를 다 끄집어내나 궁금했는데, 알라딘 미리보기에는 이 인용물의 출처인 "괴물" 대신 "경매"라는 또 다른 단편의 앞부분만 나와 있었다. 단편집 제목으로도 사용된 내기 도박이 단편 "경매"의 도입부에서부터 언급되는 것을 보니, 어쩌면 이 책 전체가 일종의 연작 단편으로 구성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관련 내용을 구글링하다 보니 마침 "경매"의 영역문이 어느 사이트에 올라와 있다. 알라딘에서는 살펴볼 수 없었던 결말까지 포함해서 모두 읽어보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미리보기에 나온 내용은 전체의 3분의 2쯤이었다. 상당히 잔혹하면서도 기괴한 내용이어서 나귀님 마음에 쏙 들었는데,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어떠한지 상당히 궁금해진다.


"경매"의 주인공인 여성 화자는 어린 시절부터 아빠를 따라 투계장에 드나들었다. 싸우다가 죽거나 다쳐서 쓰러진 닭을 치우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는데, 종종 아빠 친구들의 성희롱이 곁들여졌다. 이 과정에서 화자는 닭의 피와 오물을 남자들이 질색하는 것을 깨닫고 일부러 자기 몸에 묻혀서 성희롱을 모면하고, 급기야 "괴물"이란 비아냥까지 듣는다.


투계장에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섬뜩하고 불쾌했던 기억을 상기하다 돌아온 현재, 화자는 택시를 탔다가 납치되어 인신매매를 당하기 직전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납치되어 끌려간 비밀 장소에서는 화자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투계장과 비슷한 악취가 진동한다. 납치범들은 붙잡힌 사람들을 한 명씩 끌어내 경매에 부치고, 곧이어 화자의 차례가 된다.


문득 화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미친 사람처럼 크게 소리를 지르고, 아랫배에 힘을 주어 똥오줌을 싸서 자기 몸에 묻힌다. 경매가 시작되자 사회자가 그녀를 "괴물"로 지칭하며 입찰을 독려하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 중 누구도 사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결국 납치범들도 그녀를 차에 실어서 어느 도로에 내려놓고 달아나 버리는 것이 결말이다.


"경매"의 이 기묘한 결말은 가야트리 스피박이 좋아하는 작가 마하스웨타 데비의 단편 "드라우파디"와도 유사하다. 정부군에게 체포되어 고문과 강간을 당한 반군 여성이 알몸으로 악다구니를 쓰며 대들자, 피와 오물로 범벅된 채로 삿대질을 하는 기괴한 모습에 겁을 먹은 소심한 정부군 장교가 어쩔 줄 몰라 당황스러워 하는 것이 결말이었다고 기억한다.


<마하바라타>에서 적의 우두머리가 내기 도박으로 주인공 판다바 5형제와 그들의 공동 부인(!)인 드라우파디를 차지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모욕하기 위해 월경 중인데도 속옷을 벗기려 들지만, 딱하게 여긴 신들의 권능으로 벗겨도 벗겨도 벗겨지지 않는 일종의 "무한 속옷"의 기적이 발동하여 궁지를 모면한다는 내용을 현대식으로 각색한 것이다.


피와 오물은 누구나 질색하는 대상이며, 평소 마초이즘에 사로잡힌 남자의 경우라도 예외가 아니다. 제임스 헤리엇의 요크셔 이야기 중에 수의사인 주인공이 농가에 가서 가축을 수술하는데, 비리비리한 도시 출신 수의사를 얕잡아 보던 덩치 좋은 농가 청년들이 구경하러 왔다가 피가 솟구치는 모습을 보자 기절하고 내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여성이라면 월경 때문에라도 피와 친숙할 수밖에 없겠지만, 거꾸로 생리혈을 처음 보는 남성이라면 기겁하지 않을까. 어쩌면 남성이 여성을 부정한 존재인 동시에 신비로운 존재라고 생각했던 원인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문득 미얀마 군부 쿠데타 당시 시위대가 여성 속옷을 길에 널어놓자 탱크조차 멈춰 서서 근처로 다가오지 못했다던 일화가 떠오른다.


다시 "경매"의 내용으로 돌아가서, 비록 가진 무기가 피와 오물뿐이라니 딱하기는 한데, 화자가 아빠 친구들의 성희롱을 방지하기 위해 그런 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설명은 기괴한 데가 있다. 예를 들어 자는 사이에 치마를 들추는 남자들을 골탕먹이려고 다리 사이에 닭대가리를 여러 개 넣어 둔다고 했을 정도이니, 이 소녀도 보통은 아닌 듯하다.


뉴스를 검색해 보니 에콰도르에서는 실제로 민간인 납치와 인신매매 범죄가 만연해서, 우리나라 외교부에서도 교민과 여행자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모양이다. 결국 "경매"의 충격적인 내용도 그 나라의 실제 현실을 십분 반영한 셈이니, '기껏 우리의 현실을 적었더니만 외국에서는 그걸 마술적 사실주의라 부르더라'던 마르케스의 푸념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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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한강의 작품이 재간행되는 모양인데, 알라딘에 도배된 광고를 보니 그놈의 "부커상" 언급도 재개되는 듯하다. 수상 당시부터 줄곧 잘못을 지적했던 나귀님이니 다시 한 번 이야기하는데, 한강의 수상 내역을 단순히 "부커상"이라고만 하면 안 되는 이유야 분명하다.


보통 "부커상"이라면 1969년에 제정되어 5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의 문학상을 가리키며, 영어로 저술되어 영국에서 간행된 작품만이 대상이다. 반면 한강이 받은 것은 2016년 수상 당시에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이었다가, 2020년부터는 "인터내셔널 부커상"으로 지칭되는 별개의 상이다.


"부커상"의 "인터내셔널" 부문은 영국에서 간행된 외국 작품(번역 포함)이 대상이며, 2005년에 제정되어 격년으로 시상하다가 연례 시상으로 개편된 2016년에는 저자 한강과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가 공동 수상했다. 따라서 처음부터 영어로 쓴 영국 작품만 시상하는 "부커상"과는 다르다.


비유하자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외국어작품상"의 차이와도 유사하다. 양쪽 모두 작품에 주는 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2023년 아카데미 외국어작품상" 수상작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2023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라고 주장한다면 당연히 거짓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알라딘의 <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책 소개에는 "2016년 부커상 수상작"이라고 적어 놓았고 (바로 밑의 내용에서는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이라고 바로잡아 놓았지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전하는 페이지 약력에서도 "2016 / 부커상 / <채식주의자>"라고 적어놓았다.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내용을 반영하자면, 엄밀히 말해서 한강의 이력은 "2016년 부커상 수상"이 아니라 "2016년 부커상 번역 부문 공동 수상"이라고 해야 한다. 나귀님이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부커상 번역 부문"이라고 굳이 풀어쓰는 이유도 "본상"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거다.


인터내셔널이건 코민테른이건 간에 어쨌거나 "부커상"은 "부커상"이니까, 모로 가도 한강만 찬양하면 되니 아무래도 괜찮지 않느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문제는 "2016년 부커상 수상" 자격을 정당히 주장할 수 있는 다른 책이 우리나라에도 나와 있기... 아니 "있었기" 때문이다.


그 책이 바로 2016년 부커상, 즉 인터내셔널도 코민테른도 아닌 "본상"의 진짜 수상작인 폴 비티의 소설 <배반>인데, 당시 48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부커상 최초로 영국 작가가 아닌 미국 작가가 수상한 경우라고 해서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미 절판되었지만 말이다.


물론 한강이라는 작가도 대단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작가를 무시하면 안 될 것이다. 수상 직후 사생활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며 이미 이혼한 남편에게 누를 끼치면 안 된다고 말했듯, 진짜 2016년 부커상 수상자에게도 누를 끼치면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해 보는 말이다.


얼마 전 살만 루시디의 "부커상 3관왕"에 대해서도 지적했었지만, 유독 부커상과 관련해서는 이런 오류가 계속되는 듯하니 희한한 일이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십중팔구 한강의 수상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독자에게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던 문학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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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렇잖아도 발표를 앞두고 알라딘에서도 수상자 맞히기 적립금 행사를 했는데, 어쩐지 이 한국 작가가 다른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1위로 꼽혔기에, 노벨문학상이 단순히 한국 작가 인기 투표는 아니지 않나 의아하던 참이었다.


나귀님은 오래 전부터 후보로 거론되던 응구기 와 시옹오나 마거릿 애트우드 정도를 예상했고, 굳이 아시아로 와도 차라리 무라카미 하루키가 받으면 모를까 한국 작가가 받을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오래 전부터 반복되던 노벨상 국뽕 타령 때문에 아예 가능성부터 젖혀놓았던 까닭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나귀님이 한강이라는 작가를 과소평가하게 된 것도 그놈의 국뽕 타령 때문이었다. 평소 맨부커상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을 법한 사람들까지 나서서 세계 3대 문학상 타령을 늘어놓기에, 급기야 그 작가의 이름이며 그 작품의 제목만 봐도 외면하곤 했었으니 말이다.


이유야 어쨌거나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한 작가를 코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았다는 것은 큰 실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투표는 하지 않았지만, 설령 했더라도 적립금을 받지는 못했을 터이니, 이쯤 되면 나귀님도 남은 평생 로또 번호 따위 맞힐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되겠다.


나귀님이야 아직 한 편도 읽어보지 않은 작가이므로 당장 뭐라고 평가하기는 어렵겠다. 다만 앞서 맨부커상 번역 부문 수상 직후의 국내 반응 가운데 영역본의 오역을 둘러싼 논란도 있었음을 상기해 보면, 이번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는 뭔가 아이러니가 한층 더해지지 않나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맨부커상 번역 부문 수상작인 영어 번역본이 원문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뒤늦게 나왔기 때문인데, 번역의 한계와 문화적 차이 같은 근본적 난점을 감안하더라도 "팔"과 "발"을 혼동하는 등의 초보적인 오역이 수시로 등장한다는 것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 힘든 문제다.


물론 비슷한 비판은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관련해서도 제기된 바 있었다.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영역본 <설국>이 저 일본 소설가의 세계적 명성 획득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인 한편, 그 번역의 적절성을 둘러싼 논란이 줄곧 이어졌기 때문이다.


사이덴스티커의 번역은 <설국>의 유명한 도입부를 비롯해서 번역하기 까다로운 일본어 원문을 영어로 상당히 잘 소화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결국 번역자가 원문을 무시하면서까지 자기 입맛대로 작품을 재창작한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일본 문단에서는 2류 작가가 번역가를 잘 만난 덕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험담까지 나돌았고, 급기야 당사자인 가와바타와 사이덴스티커조차 서먹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물론 험담과는 별개로 상당수의 중견 작가들이 줄줄이 이 미국인을 찾아와서 친분을 쌓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가와바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영어 번역이 결정적이었듯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서도 영어 번역이 결정적이었다 치면, 어떤 면에서 양쪽의 성과도 모국어의 위력보다는 영어의 위력 덕에 성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영역본이 오역투성이라니 우습지 않은가.


물론 작가나 작품을 폄하하려는 뜻은 없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심사 과정에서는 간행 언어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사 주체인 스웨덴 아카데미도 세상 모든 언어를 읽지는 못하므로 영어와 프랑스어 등 몇 가지 주요 언어로 간행된 작품 중에서 후보작을 고른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주요 언어로 출간되지 않은 제3세계 작품의 불리함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되었는데, 뒤집어 보면 번역본을 많이 만드는 것이야말로 노벨문학상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뜻이 된다. 한국에서도 이를 감안하여 오래 전부터 정부와 민간에서 한국 문학 해외 번역 지원 제도가 있었다.


다만 번역 지원은 한국인 번역자를 거쳐 비상업 출판에 그치는 수요 없는 공급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반면, 한강의 경우에는 외국인 번역자가 작품을 물색하고 외국 출판사와 적극적으로 교섭해 상업 출판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이미 어느 정도까지는 자체 경쟁력을 인정받은 셈이라 하겠다.


그렇게 정석대로 간행된 영역본이 맨부커상 번역 부문에서 수상한 덕에 이 한국 작가에 대한 관심이 계속 더 많이 생겨났다고 전하니, 문득 어린 왕자가 사는 소행성을 발견한 천문학자가 전통 의상 대신 양복을 걸치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연구 결과에 세상이 주목했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도 한글로만 남았다면 세계가 알아줄 리 없다. 한강의 작품 역시 간행 수년 뒤에 영어라는 세계 공용어로 번역되어 더 주목받게 되었으니, 데보라 스미스라는 번역자를 만난 것이며 그로 인해 영역본을 만들어낸 것이 이 작가의 경력에서는 결정적인 한 수라 하겠다.


다만 앞서도 지적했듯이 영역본 오역 논란은 아쉬울 수밖에 없는데, 이제는 노벨문학상까지 탔으니 관련 논란과 비판조차 영구히 박제되어 버리지 않았나 싶다. 앞서 가와바타와 사이덴스티커의 사례처럼, 이제 소설가 한강의 명성도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와 영원히 결부된 셈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역이나 첨언이 과하다 한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낙동강의 <육식맨>이 되어 오늘 준비한 고기부터 보자고 말하는 일이야 없을 것이다. 다만 한글날 직후에 그 수상 소식을 전해 듣고 나니, 그 영역본을 둘러싼 논란이며 영어의 위력을 실감했기에 묘하다는 생각에 적어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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