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알라딘 앱에서 "오늘의 한 문장"이라는 광고가 뜬다. 신간 도서의 내용 중 한두 문장을 발췌해서 보여주는 것인데, 홈에서 뒤로가기를 누르면 종료하겠느냐는 안내와 함께 이 광고가 뜨는 거다. 바깥양반이 쓰다 버린 낡은 스마트폰을 쓰는 까닭에 버튼 인식이 잘 안 되어서 뒤로가기를 자주 누르는 나귀님이니 이걸 하루에도 몇 번씩 본다.
그런데 한 번은 "오늘의 한 문장"에서 상당히 묘한 구절이 등장한다. "나르시사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죽은 것들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무서워해야 한다고 (...) 우리는 그런 멍청한 말이 어디 있나 하고 생각했다. 아니 어떻게 나르시사를, 예를 들어 <엑소시스트>의 소녀 리건보..." 인용문을 중간에 뭉텅 잘라먹었기에 뭔가 궁금해서 검색해 보았다.
알고 보니 에콰도르 여성 작가 마리아 페르난다 암푸에로의 단편집 <투계>에 수록된 단편 "괴물"의 한 대목이라고 하는데, 책 소개 글에 올라온 저 인용문의 뒷부분은 대략 이러했다: "아니 어떻게 나르시사를, 예를 들어 <엑소시스트>의 소녀 리건보다, 우리 집 정원사 페페 아저씨를 살렘의 뱀파이어나 악마의 자식 데미안보다 더 무서워할 수 있을까."
이 인용문에서는 <엑소시스트>의 주인공 리건 말고도 반가운 이름이 제법 여러 개 나온다. "살렘의 뱀파이어"는 스티븐 킹의 <세일럼스 롯>의 (번역서 제목인 <살렘스 롯>과 일치시킨 모양이다) 내용인데, 아마도 원작 소설보다는 이를 각색한 TV 영화 <공포의 별장>을 가리키는 듯하다. "악마의 자식 데미안"은 영화 <오멘> 시리즈의 주인공을 말한다.
결국 화자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대표적인 공포 영화를 여러 편 언급하는 셈이니, 작품의 시대 배경이나 인물의 나이를 짐작하는 데에 참고가 될 만하다. 구글링해 보니 영역본에는 위의 인용문 다음에 리건, 뱀파이어, 데미안에 이어서 "늑대인간"을 "아빠"와 비교하는 구절도 나오던데, 알라딘의 책 소개 페이지에 인용된 것은 위의 구절이 전부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온갖 초자연적 존재를 다 끄집어내나 궁금했는데, 알라딘 미리보기에는 이 인용물의 출처인 "괴물" 대신 "경매"라는 또 다른 단편의 앞부분만 나와 있었다. 단편집 제목으로도 사용된 내기 도박이 단편 "경매"의 도입부에서부터 언급되는 것을 보니, 어쩌면 이 책 전체가 일종의 연작 단편으로 구성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관련 내용을 구글링하다 보니 마침 "경매"의 영역문이 어느 사이트에 올라와 있다. 알라딘에서는 살펴볼 수 없었던 결말까지 포함해서 모두 읽어보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미리보기에 나온 내용은 전체의 3분의 2쯤이었다. 상당히 잔혹하면서도 기괴한 내용이어서 나귀님 마음에 쏙 들었는데,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어떠한지 상당히 궁금해진다.
"경매"의 주인공인 여성 화자는 어린 시절부터 아빠를 따라 투계장에 드나들었다. 싸우다가 죽거나 다쳐서 쓰러진 닭을 치우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는데, 종종 아빠 친구들의 성희롱이 곁들여졌다. 이 과정에서 화자는 닭의 피와 오물을 남자들이 질색하는 것을 깨닫고 일부러 자기 몸에 묻혀서 성희롱을 모면하고, 급기야 "괴물"이란 비아냥까지 듣는다.
투계장에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섬뜩하고 불쾌했던 기억을 상기하다 돌아온 현재, 화자는 택시를 탔다가 납치되어 인신매매를 당하기 직전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납치되어 끌려간 비밀 장소에서는 화자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투계장과 비슷한 악취가 진동한다. 납치범들은 붙잡힌 사람들을 한 명씩 끌어내 경매에 부치고, 곧이어 화자의 차례가 된다.
문득 화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미친 사람처럼 크게 소리를 지르고, 아랫배에 힘을 주어 똥오줌을 싸서 자기 몸에 묻힌다. 경매가 시작되자 사회자가 그녀를 "괴물"로 지칭하며 입찰을 독려하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 중 누구도 사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결국 납치범들도 그녀를 차에 실어서 어느 도로에 내려놓고 달아나 버리는 것이 결말이다.
"경매"의 이 기묘한 결말은 가야트리 스피박이 좋아하는 작가 마하스웨타 데비의 단편 "드라우파디"와도 유사하다. 정부군에게 체포되어 고문과 강간을 당한 반군 여성이 알몸으로 악다구니를 쓰며 대들자, 피와 오물로 범벅된 채로 삿대질을 하는 기괴한 모습에 겁을 먹은 소심한 정부군 장교가 어쩔 줄 몰라 당황스러워 하는 것이 결말이었다고 기억한다.
<마하바라타>에서 적의 우두머리가 내기 도박으로 주인공 판다바 5형제와 그들의 공동 부인(!)인 드라우파디를 차지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모욕하기 위해 월경 중인데도 속옷을 벗기려 들지만, 딱하게 여긴 신들의 권능으로 벗겨도 벗겨도 벗겨지지 않는 일종의 "무한 속옷"의 기적이 발동하여 궁지를 모면한다는 내용을 현대식으로 각색한 것이다.
피와 오물은 누구나 질색하는 대상이며, 평소 마초이즘에 사로잡힌 남자의 경우라도 예외가 아니다. 제임스 헤리엇의 요크셔 이야기 중에 수의사인 주인공이 농가에 가서 가축을 수술하는데, 비리비리한 도시 출신 수의사를 얕잡아 보던 덩치 좋은 농가 청년들이 구경하러 왔다가 피가 솟구치는 모습을 보자 기절하고 내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여성이라면 월경 때문에라도 피와 친숙할 수밖에 없겠지만, 거꾸로 생리혈을 처음 보는 남성이라면 기겁하지 않을까. 어쩌면 남성이 여성을 부정한 존재인 동시에 신비로운 존재라고 생각했던 원인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문득 미얀마 군부 쿠데타 당시 시위대가 여성 속옷을 길에 널어놓자 탱크조차 멈춰 서서 근처로 다가오지 못했다던 일화가 떠오른다.
다시 "경매"의 내용으로 돌아가서, 비록 가진 무기가 피와 오물뿐이라니 딱하기는 한데, 화자가 아빠 친구들의 성희롱을 방지하기 위해 그런 무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설명은 기괴한 데가 있다. 예를 들어 자는 사이에 치마를 들추는 남자들을 골탕먹이려고 다리 사이에 닭대가리를 여러 개 넣어 둔다고 했을 정도이니, 이 소녀도 보통은 아닌 듯하다.
뉴스를 검색해 보니 에콰도르에서는 실제로 민간인 납치와 인신매매 범죄가 만연해서, 우리나라 외교부에서도 교민과 여행자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모양이다. 결국 "경매"의 충격적인 내용도 그 나라의 실제 현실을 십분 반영한 셈이니, '기껏 우리의 현실을 적었더니만 외국에서는 그걸 마술적 사실주의라 부르더라'던 마르케스의 푸념이 새삼스레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