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 루슈디 신작을 살펴보는데 뜬금없이 "부커상 3관왕" 이야기가 나온다. 무슨 뜻인가 궁금해 살펴보니, 책날개의 저자 약력에서부터 "<한밤의 아이들>로 '부커 오브 부커스'(1993년)와 '베스트 오브 더 부커'(2008년)를 수상하며 부커상 3관왕이라는 문학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고 적어 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품의 세 가지 수상 실적 가운데 1981년의 부커상을 제외한 나머지 두 가지가 그냥 인기 투표에 불과했다는 거다. 즉 '부커 오브 부커스'는 1993년에 그 문학상의 제정 25주년을 기념해서 지금까지 나온 수상작 가운데 최고를 뽑은 것이지, 매년 시상한 정식 부커상까지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베스트 오브 더 부커'는 이름 그대로 2008년에 그 문학상의 제정 40주년을 기념해서 선정한 것이었으며, 우선 전문가 심사위원이 여러 후보작을 추리고 일반 대중의 참여를 거쳐 결정된 인기 투표였다. 당장 위키피디아의 부커상 항목에도 위의 두 가지 상은 "특별상"으로 분류되어 있다.


양쪽 모두 정식 시상이 아니라고 치면, "3관왕"은 억지 주장일 수밖에 없다. 보통 다관왕이라는 것은 한 대회에서 여러 부문에 걸쳐 수상한 경우를 가리키지 않나? 쿳쉬와 애트우드처럼 실제로 부커 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작가도 "2관왕"이라기보다는 "2회 수상자"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예를 들어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가운데 20세기 최고작과 역대 최고작 하나씩을 선정해서 <대부>가 뽑혔다고 치면, 그걸 가지고 아카데미 시상식 3관왕이라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영화의 3관왕 실적이라면 197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각색상을 수상한 것만을 가리킨다.


물론 루슈디의 작품을 꾸준히 간행하고 있는 문학동네의 입장에서야 그 작가의 탁월함을 강조하고 싶은 마음이었겠지만, 아무래도 뭔가 억지스러워서 지적하는 것이다. 이전 작품에 수록된 약력에서만 해도 그럭저럭 설명하고 넘어갔던 내용을 지금 와서 유독 강조하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2011년 간행한 <피렌체의 여마법사>에서는 "1993년에는 지난 25년 간의 부커 상 수상작 중 최고의 작품을 뽑는 '부커 오브 부커스'에 선정되었다"고만 썼다. 2011년 간행한 <한밤의 아이들>에서도 "부커상 40주년을 기념해 일반 독자들이 선정한 '베스트 오브 더 부커'의 영예를 안았다"고만 썼다.


2012년 간행한 <루카와 생명의 불>과 <하룬과 이야기 바다>에서도 무난하게 넘어갔고, 2020년 간행한 <2년 8개월 28일 밤>에서는 그냥 부커 상, 부커 오브 부커스, 베스트 오브 더 부커를 받았다고만 쓰고 말았는데, 비슷한 시기의 다른 책에서는 3관왕 드립이 본격화되었으니 약력도 중구난방이었다.


즉 2015년 간행한 <조지프 앤턴>에서부터 뒤표지에 "유일하게 부커 상을 세 번 수상한 작가"라는 표현이 등장하더니만, 역시나 2015년 간행한 <이스트, 웨스트>의 약력에서부터 "루슈디는 한 작품으로 부커 상을 세 번 수상하는 유일무이한 기록을 남겼다"는 의아한 주장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2022년 간행한 <악마의 시>와 2023년 간행한 <무어의 마지막 한숨>의 약력에서도 역시나 세 번 수상 이력을 들먹이며 "문학사상 유례 없는 기록" 드립이 나오더니, 결국 그 내용이 2024년 간행한 신작 <나이프>의 약력에까지 이어진 모양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이건 3관왕이라고 볼 수 없다.


만약 출판사의 주장처럼 특별상 수상 실적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2018년의 부커상 제정 50주년 기념 최고작 선정에서 루슈디의 작품이 빠진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결국 <한밤의 아이들>의 문학적 가치가 부정되었다는 뜻일까? 알고 보니 루슈디도 아주 탁월한 작가까지는 아니라는 뜻일까?


나귀님이 보기에는 그저 세월이 흐르면 유행도 바뀌어서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로만 이해될 뿐이다. 한때의 걸작이나 졸작도 재평가를 거쳐서 그 위상이 달라질 수 있으며, 또다시 한 세대나 한 세기가 지나면 재평가를 거쳐서 그 위상이 달라진 경우를 문학사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있으니까.


참고로 <한밤의 아이들>이 '부커 오브 부커스'를 수상한 1993년의 부커상 수상작은 로디 도일의 <패디 클라크, 하하하>였다. 이거,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서 헌책방에 많이 돌아다니던 책인데, 지금은 아마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거다. 루슈디의 작품이라 해서 이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같은 논리라면 알라딘도 '나귀님 선정 최악의 쇼핑몰' 분야에서 2024년 2월, 8월, 9월에 각각 1위를 했으므로 무려 3관왕이다. 아니, 이런 추세라면 2024년 전체 1위에다가, 어쩌면 21세기 전체 1위까지 달성할 수 있을 터이니, 그 다관왕 기록은 계속 늘어나면 늘어났지 결코 줄어들지는 않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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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책 안 산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만, 그래도 필요한 책은 가끔 한두 권씩 사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주 잠실롯데월드타워점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니꼴라이 고골>이 중고로 나와 있기에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구입했다. 마침 이마 이치코의 취호 연작 가운데 최근작(그래도 무려 2021년 간행본)이 같은 지점에 있기에 배송료도 지울 겸 함께 구매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이번 잠실롯데타워점 구매 도서는 아무래도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물론 이마 이치코의 만화는 (언제부턴가 살짝 억지스러운 전개와 급마무리가 일반화되는 것 같아 불만이긴 하지만) 예외라고 해야 되겠지만, 가장 기대했던 나보코프의 고골 연구서가 알고 보니 번역도 엉망이었고, 품질 등급도 상급이라지만 실제로는 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번역 문제부터 짚어보자. 이 책을 받자마자 가장 먼저 펼쳐 본 부분은 당연히 단편 "외투"에 대한 분석인 제5장 "가면의 극치"였다. 1980년대에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러시아 문학과 저항정신>이라는 책에 수록되어서 처음 접했던 글인데, 이전까지는 단순히 소아성애자 성향의 변태 불곰 영감님인 줄로만 알았던 양반의 비평가로서의 역량을 깨닫고 깜짝 놀랐었다.


그런데 <니꼴라이 고골>에 수록된 번역으로 다시 읽어보니, 내가 기억하는 내용과는 뭔가 다른 거다. 이상하다 싶어 영어 원문을 구글링해 보니 오역인 듯했다.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도 꺼내서 대조해 보았는데, 강의록을 재구성한 그 책에서도 고골 부분만큼은 <니꼴라이 고골>의 내용 중에서 발췌했다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대목은 이렇다.



>>> 외투를 입지 않은 아까끼 아까까예비치의 유령으로 간주된 인물은 사실상 아까끼의 외투를 강탈한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아까끼 아까까예비치의 유령은 외투를 입지 않고 스스로의 힘에 의존한 채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이상야릇한 역설적인 상황에 푹 빠진 경찰관은 이 유령을 아까끼의 외투를 강탈한 사람이 아니라, 유력인사의 외투를 강탈한 사람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 (김문황 번역, 208-9쪽) <<<



이 대목을 이해하려면 "외투"의 줄거리를 기억해야만 한다. 가난한 하급 관리가 전재산을 털어 새 외투를 한 벌 장만하지만, 처음 입고 나간 바로 그날 밤에 길거리에서 강도를 만나 빼앗기고 만다. 딱한 하급 관리는 외투를 찾게 도와달라며 고급 관리를 찾아가지만, 상대방으로부터 냉대를 받자 절망 끝에 사망하고, 이후 유령으로 나타나서 고급 관리의 외투를 강탈한다.


그런데 나보코프는 여차 하면 기발한 환상 소설로 끝날 수도 있었을 법한 이 단편의 막바지에 달라붙은 여담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즉 고급 관리의 외투를 강탈하고 만족한 유령이 사라진 이후에도 관련 목격담은 끊이지 않았으며, 한 번은 심약한 경찰관 한 명이 우연히 목격하고 그 뒤를 쫓다가 오히려 덩치 크고 우락부락한 유령으로부터 위협을 받아 도망쳤다는 거다.


나보코프는 마지막에 목격된 유령, 즉 경찰관을 위협하고 떠난 존재가 사실 하급 관리의 유령이 아니라 앞서 하급 관리의 외투를 강탈한 강도였다고 지적한다. 고골이 늘어놓은 갖가지 여담 때문에 독자가 간과하기 쉬운 이 뜻밖의 사실을 알고 나면, "외투"는 단순히 풍자와 환상을 버무린 작품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생의 잔인함과 부조리함에 대한 씁쓸한 고발이 된다. 


나귀님도 "외투"를 여러 번 읽었지만 맨 마지막 유령의 정체에 대해서는 줄곧 간과했던 참이어서, 나보코프의 에세이를 처음 읽었을 때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문황의 번역은 원문에도 없었던 첨언 때문에 문장이 난삽해져서 처음에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참고로 위에 인용한 대목을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옮겼다.



>>> 외투를 잃어버린 아카키 아카카예비치의 유령으로 비춰진 사람은 사실 그 외투를 훔친 사람이다. 아카키 아카카예비치의 유령은 외투의 부재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순경이 이야기의 기묘한 역설 속에 빠져들어 정반대의 인물인 외투 도둑을 유령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혜승 옮김, 127쪽) <<<



이전에도 지적했듯이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역시 오역이 적지 않지만 (나중에 개정판이 나왔지만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위의 인용문에서 가운데 문장만큼은 그럭저럭 옮겼다. 즉 하급 관리의 유령이 구천을 배회한 이유는 오로지 상실한 외투를 되찾겠다는 강한 집착이었기에, 고급 관리의 외투를 빼앗아 그 결여가 충족되자 만족하면서 성불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김문황 번역본만 보면 이게 그런 뜻이라고는 해석하기 힘들다. 문제는 제5장 내내 이런 식으로 헛다리를 짚은 문장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특히 원문에도 없었던 첨언을 해서 오류를 자초한 경우가 많은데, "외투"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별개의 인물인 화자(나)를 주인공(아까끼 아까끼예비치)으로 오인해 "나(아까끼 아까끼예비치)"(200쪽)라고 써 놓은 것이 그렇다.


러시아어 전공자가 영어책을 번역했으니 어쩔 수 없는가 싶다가도, 정작 미국 대학에서 고골 전공으로 석/박사를 받았다는 역자 약력을 보면 의아할 수밖에 없다. 해설에서 나보코프가 한때 몸담았던 "웰즐리 대학"(Wellesley College)의 이름조차도 줄곧 "웨슬리"로 여러 번 적어 놓았을 정도이니, 무려 25년의 노력 끝에 내놓았다고 자부하는 번역서 치고는 너무 부실하다.


심지어 나귀님이 받은 책은 한 페이지(225-226쪽)의 윗부분이 접혀서 잘못 재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찢어져 있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알라딘에서는 상급이라고 판정해서 정가 28,000원의 60%인 16,400원으로 판매가를 책정했다. 이쯤 되면 알라딘 본사 차원에서 나귀님을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하자 있는 책들만 갖다 놓고 구입을 유도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나저나 나보코프 번역서는 왜 이렇게 오류가 많을까? 가장 큰 이유는 번역자들의 무능이다. 저자가 현학 취미에다가 워낙 의뭉스러운 성격이다 보니 독자 오도하기를 밥 먹듯 하는데, 그 지뢰밭을 제대로 헤쳐나가지 못하다 보니 지난 수십 년간 오역본이 양산되었던 것이다. 이번 잠실롯데타워점 구매 도서가 영 실망스러웠던 궁극적인 이유도 결국 그것이었고 말이다.



[*] 그런데 오랜만에 다시 뒤져 본 "외투"의 비교적 최근 번역본인 민음사와 창비 책에도 오역이 심심찮게 눈에 띄니, 결국 대한민국에서 "외투"를 온전히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도 같다. 어쩐지 이것 역시 나보코프의 말마따나 "고골스러운" 부조리의 한 가지 사례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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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알라딘에서 책을 많이 안 사다 보니 쿠폰이나 적립금을 받아 놓고서도 시한을 넘겨 날리는 일이 잦다. 어제인가도 무슨 적립금 1천 원이 또 날아갔다기에 다시 이벤트 페이지까지 찾아가서 클릭클릭해서 또다시 쟁여놓았다. 십중팔구 또 날릴 것 같기는 하지만, 또 혹시나 하는 마음이라서...


그나저나 해당 이벤트 페이지를 보니 알라딘에서 9월 사은품으로 책모양 칸막이 정리함이라는 물건을 주는 모양이다. 나귀님이 보기에는 또 다른 플라스틱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책 표지를 디자인에 응용했다니까 또 뭔가 궁금해서 클릭해 살펴보는데, 세부 정보 페이지에서 이상한 대목을 발견했다.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독일어판 표지를 응용한 케이스 전면에는 초록색으로 인쇄된 꽃화분 문양이 들어 있는데, 세부 정보 페이지에 그 확대 사진이 나와 있고 "제작 공정상 플라스틱 사출 부분의 홈에는 인쇄가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는 불량이 아닙니다"라는 설명이 덧붙어 있는 것이었다.


사진을 보면 초록색 꽃화분 문양에서 잎사귀와 줄기 일부분이 인쇄되지 않고 동그랗게 파인 부분이 있다. 설명대로 사출구와 맞닿았던 부분의 플라스틱이 분리 과정에서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움푹 꺼지게 되었고, 결국 초록색 꽃화분 문양을 인쇄할 때 그 부분만큼은 잉크가 묻지 않았던 모양이다.


얼핏 보면 알라딘 측의 설명대로 제작 공정상의 부득이한 결함처럼 보이기도 하고, 원산지가 중국이라는 것까지 알고 나면 더욱 부득이한 결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문제는 하얀색 바탕에 초록색 문양이 인쇄되다 보니, 문제의 사출 구멍 자국이 멀리서 봐도 상당히 눈에 잘 띈다는 거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프랑켄슈타인> 표지를 응용한 다른 두 가지 케이스의 경우에는 해당 부분에 마침 여백인지 흰색인지가 들어 있어서 별 티가 나지 않는데, <수레바퀴 아래서>만큼은 유난히 티가 난다. 그렇다면 제작 공정상의 결함만이 아니라, 오히려 디자인 단계의 잘못도 있지 않을까?


무슨 말인가 하면, 사출 구멍 때문에 케이스 표면에 완벽한 인쇄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애초부터 알았다면, 차라리 여백이 적은 <수레바퀴> 대신 여백이 많은 <앨리스>나 <프랑켄슈타인> 같은 표지로 교체하든지, 아니면 문양을 수정해서라도 사출 구멍 부분에 여백을 두어야 했지 않느냐는 거다. 


반대로 알라딘에서 샘플을 확인하고 디자인할 때에는 없었던 사출 구멍이 제작 단계에서 갑자기 추가된 셈이라면, 이건 누가 봐도 제작업체의 잘못이고 불량이므로 전량 반품하고 손해 배상을 청구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여하간 알라딘의 책임이건 제작업체의 책임이건 간에 불량품은 분명하다.


하자가 있는 물건이라면 사은품이건 상품이건 간에 아예 내놓지 말아야 할 것 같은데, 현재 알라딘은 '하자가 있다'는 공지만 올리고 사은품 배포를 강행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무책임한 일이 아닐까? 알라딘은 불량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솔직히 누가 봐도 불량이고 하자이니 말이다.


나귀님의 입장에서는 이전에도 오랫동안 중고 서적 하자 문제로 고객센터의 문을 두들겼을 때의 전형적인 답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매입 과정에서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아 하자 있는 책을 보내고서도, 이에 대해 항의하면 맨 먼저 내놓는 말은 '중고 물품의 상태는 보기 나름'이라는 것이었다.


즉 '흔들리는 것은 깃발도 바람도 아니요, 바로 네 마음이니라'라는 뜻이니, 하자가 있다는 것은 네 의견일 뿐이고 우리는 멀쩡한 물건 보냈으니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셈이었다. 이게 사실 무적의 논리이기 때문에, 이걸 논파하려면 물건의 구체적인 하자 사진이며 이유를 구구절절 내놓아야 했다.


그런데 고객센터의 말마따나 애초에 중고 물품의 상태 판정이 사람마다 제각각이라면, 나귀님의 판정이나 알라딘의 판정이나 절대적이지는 않으니 애초부터 기준이 없어진다. 뒤늦게야 알라딘에서 품질 판정 기준을 만든 이유도 그래서이겠지만, 역시나 투표로 결정했으니 주관적인 기준일 뿐이다.


여하간 그간 고객센터와 지겹게 싸워 왔던 나귀님의 이력을 돌이켜 보면, 멀리서 봐도 딱 티가 날 만큼 중대한 하자가 있는 책모양 칸막이 정리함의 문제를 어디까지나 제작 공정상의 불가피한 결과일 뿐 "불량이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넘어가는 알라딘의 사고방식이 대범하다 못해 무섭게 느껴진다.


물론 연휴는 물론이고 평일에도 응급실을 못 찾아서 위급한 환자가 죽어 나가고, 부동산 가격이 널을 뛰고, 그 여편네가 명품백을 챙기는 상황에서도 절대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사람을 우두머리로 둔 나라이다 보니, 뭐, 알라딘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게 있겠느냐고 반문하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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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웹툰 <열무와 알타리>의 작가가 갑자기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그나마 괜찮았던 다른 여러 작품들이 연재 종료된 후에도 다음 웹툰 중에서는 유일하게 꼬박꼬박 챙겨 보던 것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기억하는 ("오늘이... 새벽에 <열무와 알타리> 최신회 봤으니까 금요일이군...") 방법이기도 했다.


고인의 인스타그램이라는 곳에 찾아가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가족이 작성한 부고와 장례식장 사진 등이 올라와 있다. 차라리 가짜 뉴스였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사실로 밝혀지고 나니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젊은 사람인데 두 아이며 남편은 이제 어떻게 살라고 그토록 부리나케 떠나버렸을까 하는 원망마저 들었다.


평소에 인스타그램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나귀님이니 도통 낯설기만 한 환경이었지만, 웹툰 연재분과는 별개인 일종의 자투리 만화가 많이 올라와 있기에 이것저것 클릭하다 보니 또다시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애아의 어머니로 겪은 여러 가지 사건과 답답한 심정에 대한 기록이 특유의 귀여운 그림체로 차곡차곡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기르던 고양이가 죽어서 고양이별에 갔다고 둘러댔더니, 나중에 아이가 그건 결국 죽었다는 뜻이라는 친구의 설명을 듣고 돌아와서 사실이냐고 추궁하기에 난감했다는 연재분을 다시 보니 또다시 착잡해진다. 급기야 크리스마스 선물로 산타에게 죽은 고양이를 돌려달라고 소원을 빌었다가 실망했었다니, 이번 일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문득 '하늘은 너그럽지 않아 인간을 하찮게 여긴다' 하던 말이 떠오르기에 출전을 검색해 보니,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여긴다"는 <노자>의 한 구절이었다. 번역자의 해설을 보니 천지와 성인을 거론해 유가를 비판하려는 의도로 후대에 첨언된 구절이라지만, 지금으로선 그저 운명의 맹목성을 일깨워주는 말로만 들린다.


생각해 보니 앤드류 솔로몬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을 읽게 된 계기도 <열무와 알타리>였다. 즉 장애아 부모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는 "네덜란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글을 그 웹툰에서 언급하기에,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해서 검색하다가 저 두꺼운 책을 다시 꺼내게 되었고, 그중 장애아를 다룬 장을 모조리 읽어보게 되었던 것이다.


솔로몬의 책은 제목처럼 부모와 달리 태어난 아이들이 가족보다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과 더 잘 동일시하고 편안해 한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부모와는 다르기 때문에 수직적 정체성은 약한 반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는 쉽게 공감하여 수평적 정체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범죄자와 신동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언급한 "네덜란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미국의 인기 TV 아동 프로그램인 <세서미 스트리트>의 작가였던 사람이 다운증후군 아들을 양육하며 겪은 경험을 토대로 작성한 글이다. 뭔가 착오로 인해 원래의 목적지가 아닌 네덜란드에 도착해 당황한 여행객을 향해 놀라지 말고 그 나라 특유의 즐거움을 맛보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장애아를 낳고 혼란과 좌절과 분노를 느끼는 부모를 향해 건네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유머러스한 조언인데, 그 작성자로 말하자면 <세서미 스트리트>에 다운증후군 아들을 직접 출연시키는 등 세간의 인식을 바꾸려는 각고의 노력 끝에 장애인 아들이 정상적 사회 생활을 영위하게끔 이끌었던 어머니이기도 했으니 더욱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장애라는 것이 단순히 명칭의 문제만은 아니므로, 장애인에게 완벽한 사회 생활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솔로몬의 설명에 따르면, "네덜란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의 저자 역시 나중에는 다운증후군 아들에게 정상적 사회 생활을 독려했던 것이 지나친 욕심이나 강요는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표시하기도 했었다니까.


작가의 사망 소식을 바깥양반에게도 알려주었더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안타까워한다. 마침 얼마 전에 미신에 관해서 물어보기에, 문득 <열무와 알타리>에 나온 소금 뿌리는 이야기가 생각나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아파트 문 앞에 소금이 수북이 떨어져 있어서 누군가 악의를 품었나 의심했는데, 다행히도 해프닝으로 끝났다는 거다.


바깥양반 말로는 요즘 아이들이 사주보다 타로를 더 즐긴다기에, 역시나 <열무와 알타리>에서 작가가 점쟁이를 만나 솔깃했던 이야기도 해 주었다. 아이의 재활 때문에 이사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동네 축제에서 우연히 만난 점쟁이가 신통하게도 남쪽으로 가라고 조언했다는 것이다. 물론 곧이어 부적을 구매하라기에 얼른 나와 버렸다지만.


작가도 평소에는 사주며 신점을 미신으로 폄하했지만, 병원에서 만난 비슷한 장애아 엄마를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 한다. 즉 그 엄마가 점집에 가보니 앞으로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는데, 훗날 그 아이의 상태가 실제로 크게 호전된 것을 지켜보니 자기 아이의 미래도 살짝 궁금해졌다는 거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어서 딱한 마음이 들 뿐이다.


나귀님처럼 유행과는 담 쌓은 사람도 최근 들어 장애며 장애학 관련 논의를 접하는 것으로 미루어 사회 분위기도 크게 달라진 듯한데, 물론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인다. 한편으로는 장애인 인권 문제와 더불어 일각의 반발을 무마하는 방법도 연구되어야 할 것 같다. 소수의 권리란 결국 다수의 양해와 배려에서 비롯되는 것일 터이니까.


그런 면에서 <열무와 알타리>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장애아를 양육하는 부모가 겪는 여러 가지 현실의 장벽을 묘사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작품이 아니었을까. 장애아의 재활과 교육 같은 직접적인 문제에서부터, 주위의 편견과 배려 같은 간접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생각과 논의의 소재를 제공해 왔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요즘 들어 뭔가 잘 안 풀리는 주위 사람들을 보면 '내 복의 일부라도 나눠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뭐, 나라고 딱히 남보다 운이 훨씬 더 좋진 않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더 사회에 도움될 만한 사람들이 더 잘 되어야 맞지 않나 싶어서였다. 많은 감동을 준 웹툰 작가의 갑작스러운 부고에 비통한 마음이 든 것도 그래서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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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밥 먹으며 틀어놓은 뉴스에 고려아연이란 회사의 경영권 분쟁 이야기가 나온다. 이후의 뉴스에도 계속 나오기에 도대체 뭐 하는 회사인가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어쩐지 낯익은 회사 로고가 등장한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영풍문고의 로고였다.


혹시 고려아연도 같은 계열사인가 싶어 구글링해 보니, 아니나다를까 영풍그룹 산하의 주력 회사라고 나온다. 영풍그룹 자체가 공동 창업주 장씨와 최씨의 동업으로 탄생한 것이었는데, 최씨네가 담당하던 고려아연의 경영권을 놓고 장씨네와 분쟁이 생긴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영풍문고 개업 당시 아무래도 생소한 그 모기업이 도대체 뭘 하는 곳이기에 종로 한복판에 교보문고와 맞먹는 대형 서점을 차리는지 궁금했는데, 그때에도 비철금속 분야에서는 알아주는 알짜 기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비로소 수긍했던 기억이 난다.


재차 확인했더니 영풍문고는 원래부터 장씨네가 담당한 회사라서 현재 최씨네가 담당한 고려아연과는 무관한 모양이라 딱히 직접적인 영향까지는 없을 법하다. 다만 과거의 럭키금성처럼 동업 관계가 끝난다면 계열사 정리 차원에서라도 간접적인 영향은 있지 않을까.


흥미로운 점은 양쪽 집안의 동업 관계가 3대째에 와서야 결국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인데, 럭키금성 역시 3대째에 와서 결국 구씨네와 허씨네로 깔끔하게 분리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아무리 좋은 동업 관계에도 시한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러고 보니 영풍문고 종로 본점에도 몇 년째 안 가본 것 같다. 한때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들러서 책을 구경하다 서울역까지 걸어갔는데, 활동 반경이 바뀌며 나중에는 종로보다 신촌이며 강남으로 오가게 되었고, 코로나 이후로는 줄곧 집에만 틀어박히게 되었다.


영풍문고에서 운 좋게 구입한 뜻밖의 책도 몇 권 생각난다. 1977년에 간행된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한 부가 무려 20년 뒤에 깨끗한 상태로 갑자기 나타나서 꽂혀 있기에 반색하며 구입했는데, 오래 된 지방 서점에서 반품된 것은 아니었을지.


상설 반값 할인 코너에서 구입한 책들도 기억난다. 특히 리하르트 프리덴탈의 괴테 전기는 베이지색 케이스까지 완벽한 완전 새책으로 구입했는데, 수년 전에 생각나서 다시 꺼내 보니 케이스 일부가 색바래고 삭은 것을 보며 새삼스레 세월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어느 창고에서 뒤늦게 발견되었는지, 오래 전에 절판된 민음사 세계 시인선과 문학과지성사 최인훈 전집의 초판본이 잔뜩 나와서 여러 권 사기도 했다. 2000년 신저작권법 실시 직전 열화당 재고 떨이 행사 때 시장통처럼 북적이던 광경도 잊을 수가 없다.


종로통의 서점이라면 무조건 종로서적만 기억날 줄 알았더니, 생각해 보니 영풍문고에서도 제법 많은 시간을 보낸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교보문고가 여러 번 내부 공사로 공백이 길었고, 종로서적도 결국 사라지는 와중에 영풍문고는 꿋꿋이 자리를 지켰으니까.


종로서적의 경우에는 부도를 내고 폐업하는 과정에서 경영진이 책임을 회피하며 여러 출판사에 손해를 전가하는 바람에 원성을 사며 그간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고 들었다. 가수 장기하가 그 창립자의 손자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밝힌 것도 그 영향은 아니었을까 싶다.


현재 영풍문고는 전국에 수십 개소의 분점을 운영하는 모양인데, 서점으로는 교보문고 다음으로 늘 2인자라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인터넷 서점의 공세 속에서도 인터파크며 리브로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점에서는 제법 선전한 편이 아닐까 싶다. 


여하간 모기업의 분란은 중대한 문제이고, 종로서적과 인터파크의 예를 보면 서점 하나 끝나는 것도 순식간이니, 향후 영풍문고에도 어떤 영향이 있을지 궁금해진다. 물론 요즘 들어 나귀님 생각으로는 영풍문고보다 알라딘이 더 일찍 망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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