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렇잖아도 발표를 앞두고 알라딘에서도 수상자 맞히기 적립금 행사를 했는데, 어쩐지 이 한국 작가가 다른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1위로 꼽혔기에, 노벨문학상이 단순히 한국 작가 인기 투표는 아니지 않나 의아하던 참이었다.


나귀님은 오래 전부터 후보로 거론되던 응구기 와 시옹오나 마거릿 애트우드 정도를 예상했고, 굳이 아시아로 와도 차라리 무라카미 하루키가 받으면 모를까 한국 작가가 받을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오래 전부터 반복되던 노벨상 국뽕 타령 때문에 아예 가능성부터 젖혀놓았던 까닭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나귀님이 한강이라는 작가를 과소평가하게 된 것도 그놈의 국뽕 타령 때문이었다. 평소 맨부커상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을 법한 사람들까지 나서서 세계 3대 문학상 타령을 늘어놓기에, 급기야 그 작가의 이름이며 그 작품의 제목만 봐도 외면하곤 했었으니 말이다.


이유야 어쨌거나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한 작가를 코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았다는 것은 큰 실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투표는 하지 않았지만, 설령 했더라도 적립금을 받지는 못했을 터이니, 이쯤 되면 나귀님도 남은 평생 로또 번호 따위 맞힐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 되겠다.


나귀님이야 아직 한 편도 읽어보지 않은 작가이므로 당장 뭐라고 평가하기는 어렵겠다. 다만 앞서 맨부커상 번역 부문 수상 직후의 국내 반응 가운데 영역본의 오역을 둘러싼 논란도 있었음을 상기해 보면, 이번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는 뭔가 아이러니가 한층 더해지지 않나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맨부커상 번역 부문 수상작인 영어 번역본이 원문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뒤늦게 나왔기 때문인데, 번역의 한계와 문화적 차이 같은 근본적 난점을 감안하더라도 "팔"과 "발"을 혼동하는 등의 초보적인 오역이 수시로 등장한다는 것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기 힘든 문제다.


물론 비슷한 비판은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관련해서도 제기된 바 있었다.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영역본 <설국>이 저 일본 소설가의 세계적 명성 획득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인 한편, 그 번역의 적절성을 둘러싼 논란이 줄곧 이어졌기 때문이다.


사이덴스티커의 번역은 <설국>의 유명한 도입부를 비롯해서 번역하기 까다로운 일본어 원문을 영어로 상당히 잘 소화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결국 번역자가 원문을 무시하면서까지 자기 입맛대로 작품을 재창작한 것이 아니냐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일본 문단에서는 2류 작가가 번역가를 잘 만난 덕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험담까지 나돌았고, 급기야 당사자인 가와바타와 사이덴스티커조차 서먹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물론 험담과는 별개로 상당수의 중견 작가들이 줄줄이 이 미국인을 찾아와서 친분을 쌓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가와바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영어 번역이 결정적이었듯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서도 영어 번역이 결정적이었다 치면, 어떤 면에서 양쪽의 성과도 모국어의 위력보다는 영어의 위력 덕에 성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 영역본이 오역투성이라니 우습지 않은가.


물론 작가나 작품을 폄하하려는 뜻은 없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심사 과정에서는 간행 언어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사 주체인 스웨덴 아카데미도 세상 모든 언어를 읽지는 못하므로 영어와 프랑스어 등 몇 가지 주요 언어로 간행된 작품 중에서 후보작을 고른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주요 언어로 출간되지 않은 제3세계 작품의 불리함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적되었는데, 뒤집어 보면 번역본을 많이 만드는 것이야말로 노벨문학상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뜻이 된다. 한국에서도 이를 감안하여 오래 전부터 정부와 민간에서 한국 문학 해외 번역 지원 제도가 있었다.


다만 번역 지원은 한국인 번역자를 거쳐 비상업 출판에 그치는 수요 없는 공급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반면, 한강의 경우에는 외국인 번역자가 작품을 물색하고 외국 출판사와 적극적으로 교섭해 상업 출판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이미 어느 정도까지는 자체 경쟁력을 인정받은 셈이라 하겠다.


그렇게 정석대로 간행된 영역본이 맨부커상 번역 부문에서 수상한 덕에 이 한국 작가에 대한 관심이 계속 더 많이 생겨났다고 전하니, 문득 어린 왕자가 사는 소행성을 발견한 천문학자가 전통 의상 대신 양복을 걸치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연구 결과에 세상이 주목했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도 한글로만 남았다면 세계가 알아줄 리 없다. 한강의 작품 역시 간행 수년 뒤에 영어라는 세계 공용어로 번역되어 더 주목받게 되었으니, 데보라 스미스라는 번역자를 만난 것이며 그로 인해 영역본을 만들어낸 것이 이 작가의 경력에서는 결정적인 한 수라 하겠다.


다만 앞서도 지적했듯이 영역본 오역 논란은 아쉬울 수밖에 없는데, 이제는 노벨문학상까지 탔으니 관련 논란과 비판조차 영구히 박제되어 버리지 않았나 싶다. 앞서 가와바타와 사이덴스티커의 사례처럼, 이제 소설가 한강의 명성도 번역자 데보라 스미스와 영원히 결부된 셈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역이나 첨언이 과하다 한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낙동강의 <육식맨>이 되어 오늘 준비한 고기부터 보자고 말하는 일이야 없을 것이다. 다만 한글날 직후에 그 수상 소식을 전해 듣고 나니, 그 영역본을 둘러싼 논란이며 영어의 위력을 실감했기에 묘하다는 생각에 적어보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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