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책에 대한 책들'만 모아 놓은 옥탑방 구석 책장을 뒤졌더니 <채링크로스 84번지> 번역서와 원서가 나온다. 마침 얼마 전에 개정판이 나온 것 같기에, 뭐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비교해 보려고 꺼내 왔는데, 초판본인 번역서를 펼치자마자 군데군데 오역 표시가 눈에 띈다.


나귀님 역시 번역서를 통해 처음 만난 작품이기 때문에 일부 어색한 부분이 있기는 했어도 오역이라고 단정하지는 못하다가, 나중에야 헌책방에서 (가격표를 보니 신고서점에서 인터넷으로 구입한 듯하다) 입수한 페이퍼백과 비교해 보니 예상 외로 오역이 많아 실망하고 말았다.


애초에 분량 자체가 많지 않은 책이다 보니 빈번한 오역이 더욱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는데, 한편으로는 서적이나 인물에 대한 무지가 원인이고, 또 한편으로는 번역과 편집 과정에서의 부주의가 원인이다. 특히 그냥 옮기면 되는데도 굳이 머리 굴리다 틀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를 들어 저자가 서점에 보낸 첫 번째 편지(1949년 10월 5일)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저는 '희귀 고서점'이라는 말만 봐도 기가 질리곤 하는데, '희귀' 하면 곧 값이 비쌀 것이라는 생각부터 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희귀 고서적에 취미가 있는 가난한 작가입니다."(9쪽)


그런데 이 번역문은 저자의 의도를 독자에게 잘못 전달하고 있다. 왜냐하면 "희귀 고서점"과 "희귀하면"과 "희귀 고서적에 취미가 있는"으로 옮긴 영어 단어는 각각 antiquarian booksellers(고서점)와 antique(골동)과 antiquarian taste in books(고전을 좋아하는)이기 때문이다.


번역서는 원문에도 없는 "희귀"라는 단어를 굳이 집어넣어서, 마치 저자가 희귀본 수집가라도 되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었는데, 실제로는 베스트셀러나 대학 교재만 취급하는 뉴욕의 일반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고전을 런던에서 중고로라도 구해 읽으려는 열성 독자일 뿐이다.


즉 저자의 말은 희귀본 수집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고전을 읽으려다 보니 중고로 구할 수밖에 없는 독자의 고충을 담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야만 바로 뒤에 나오는 하소연(우리 동네에서 고전은 고가의 희귀본 아니면 학생들이 보는 교재밖에 없다)과도 아귀가 맞는다.


영화에서는 원작에 없는 장면을 추가해서 저자의 처지를 더 명료하게 보여준다. 즉 저자는 당시 베스트셀러인 노먼 메일러의 <나자와 사자>가 잔뜩 쌓인 신간 서점에 가서 영국 고전이 있는지 문의했다가 '뉴욕엔 그런 책 읽는 사람이 없다'는 직원의 답변에 짜증을 내며 나온다.


또 원문 그대로 옮기면 되는데도 굳이 머리를 굴리다가 틀린 사례로는 세 번째 편지(1949년 11월 3일)에서 고서점에서 보내준 책의 상태가 너무 좋다며 감탄해 마지않는 대목에 나오는 "스티븐슨은 너무 훌륭하여 제 누런 골동품 책장이 부끄러울 정도입니다"(12쪽)를 들 수 있다. 


결국 '이렇게 귀하신 책이 이렇게 누추한 곳에'라는 뜻이지만, "누런 골동품 책장"이라면 뭐가 문제일까 싶어 의아한데, 사실 이건 "오렌지 담는 나무 궤짝으로 만든 책장"(orange-crate bookshelf)의 오역이다. 즉 과일 가게에서 주워 온 상자로 만든 책장이라 초라하다는 거다.


지금이야 종이 상자와 스폰지 완충재가 일반적이지만, 예전에는 과일을 나무 상자에 담고 쌀겨 등을 넣어 완충재로 사용했다. 영화에서도 저자의 책장은 나무 상자 두 개를 옆으로 세워 놓고 판자를 얹는 식으로 층층이 쌓은 모습이어서 "누런 골동품 책장"과는 영 거리가 멀다.


또 하나 황당한 오역을 지적하자면 1950년 11월 1일 편지의 한 대목을 들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어쩌다 잘못해서 두 권이 겉장이 떨어져 나간 것뿐입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포장지 값으로 우리에게 1실링을 주지는 않았을 겁니다." 초판본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위의 인용문은 저자가 보낸 항의 편지에 대한 서점 측의 답변 가운데 일부다. 서점에서 보낸 소포를 뜯다 보니, 그 포장지가 신문지 같은 싸구려 종이가 아니라 웬 고전 서적의 낱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고서를 취급하는 서점에서 왜 책을 훼손하느냐며 노발대발했던 거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위의 인용문은 오역이다. 제대로 옮기자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 "어쩌다 표지가 떨어져 나간 낱권이 두 권 들어와서 그랬습니다. 설령 우리가 권당 1실링에 팔겠다 하더라도,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절대 구입할 리가 없는 품질의 낱권이었거든요."


결국 하자 있는 물건이라 헐값에도 안 팔릴 터이니 (물론 알라딘 같으면 "상급"에 판매했겠지만!) 아예 판매불가능한 제품이라 판단되어 책을 찢어서 포장지로 재활용했다는 뜻이다.(예전에 어떤 출판사에서도 폐기 도서를 조각조각 잘라 홍보용으로 무료 배포한 적이 있었다!)


위에 언급한 오역 사례 이외에도 인명을 착각한 경우, 동음이의어를 잘못 이해한 경우, 번역어를 잘못 선택한 경우, 기타 누락과 오독의 사례까지 여러 가지 오류가 있다. 가볍게 뒤적여도 문제가 많았으니, 작정하고 살펴보면 뭐가 더 나올지 모르겠다 싶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물론 아무리 오역이 있다 한들, 채링크로스 84번지가 킹스크로스역 9와 3/4 승강장으로 바뀌는 일이야 없을 것이고, 뉴욕의 여성 작가와 런던의 서점 직원들이 주고받은 편지 묶음이 졸지에 이퇴계와 기고봉이 주고받은 사단칠정론에 대한 편지 묶음으로 바뀔 리도 없을 것이다.


다만 아무리 인상적인 소재에 훈훈한 내용이라도 빈번한 오역으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번역서라면, 과연 독자는 이 작품을 '읽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이쯤 되면 번역자와 출판사 모두 저자의 말마따나 "천벌 받아 마땅한 짓"(15쪽)을 20년째 계속하는 셈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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