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새로 번역되었던데, 다시 확인해 보니 처음 나온 흰색 양장본은 한정판이라며 이미 절판되고, 이제는 검은색 표지로 가격이 1만 원쯤 더 저렴해진 보급판만 간행되는 모양이다. 보급판이 금방 나올 줄 알았으면 초판에서 발견된 문제점 몇 가지를 일찍 지적해 줄 걸 그랬나 싶기도 한데, 요즘 와서는 북펀드랍시고 독자에게 구걸은 잘도 하면서 정당한 독자 의견 따위는 가뿐히 씹어버리는 출판사가 허다하니 모른 척 지나가도 그만이겠다.
솔직히 <프린키피아> 번역본이 새로 나온다는 소식까지는 반가웠지만, 박병철이 과연 그 일에 적합한 번역자인지에 대해서는 약간 의구심이 없지 않았다. 물론 과학 분야의 대표적인 번역가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당장 <엘러건트 유니버스>만 봐도 특유의 의역과 첨언 스타일 때문에 호불호가 크게 갈렸다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자면 개성적인 번역인데, 뒤집어 말하자면 원문에 충실하지 않고 가독성을 위한 의역이 지나치다고 여긴 독자도 적지 않았었다.
특히 본문에서 저자의 말을 부연하거나 반박하는 내용의 역주가 길게 달린 경우도 있었는데, 때로는 이해를 도울 수도 있지만 때로는 몰입을 방해하는 느낌을 주기도 해서 독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기억이 맞나 싶어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오랜만에 꺼내 보니, 저자가 ‘새천년을 앞두고서’ 운운 한 대목에다가 ‘번역하다 보니 새천년이 지나갔다’는 역주를 달아 놓은 것이 눈에 띈다. 흠... 이쯤 되면 확실히 호불호가 갈릴 만해 보인다.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과연 번역자의 이런 개성이 <프린키피아>라는 유명 고전과 만났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였다. 고전 번역의 일차적인 원칙은 설령 문장이 딱딱해진다 하더라도 최대한 원문을 존중하는 것일 터인데, 번역자의 그간 행보를 보면 충실한 원문 직역과는 뭔가 좀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뉴턴의 말 한 마디마다 일일이 토를 달지는 않더라도, 내용 이해를 위해 원문을 과감히 희생시킬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그래서 알라딘 미리보기로 번역서를 살펴본 결과 (비록 어디까지나 뉴턴의 서문에 한해서지만) 내가 확인한 부분에서는 예상대로 원문을 충실히 옮겼다고 보기에는 어렵겠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문장 자체가 워낙 옛날 말투에다가 유난히 장황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번역 과정에서는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운 대목이 여러 가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물론 공짜 알바를 할 이유는 없으니 비교적 사소한 두 가지만 지적해 보자.
첫째로, “그리스의 철학자 파푸스”(8쪽)라는 인명은 “그리스의 수학자 파포스”라고 해야 맞다. 원문의 영어식 표기(Pappus) 말고 그리스어 표기(Πάππος)에 따르면 “파포스”가 맞고, 원문에는 없는 “그리스의 철학자”라는 첨언이 들어갔지만 본문의 맥락에서는 “그리스의 수학자”라고 해야 어울리며, 실제로도 수학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대한 오역까지는 아니지만,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을” 도모했다고 자화자찬하는 책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둘째로, “현대에는 자연에서 초자연적인 개념을 배척하고”(8쪽)라는 구절에서 “초자연적인 개념”이라 뭉뚱그려 옮긴 구절의 원문은 “실체적 형상과 비의(秘義)적 성질”(substantial forms and occult qualities)이다. 물론 오늘날의 과학에서는 무의미한 과거의 발상이니 “초자연적인 개념”이라 의역해도 그만일 듯하지만, 문제는 “실체적 형상”이 생성/변화를 설명하는 스콜라 철학의 용어로, 무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나름 유서 깊은 개념이란 거다.
파르메니데스 이래 고대 철학에서 존재(불변)와 생성(변화)의 모순 해결이 오랫동안 난제로 여겨졌음은 유명한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는 씨앗이 나무로 자라나는 변화를 씨앗 속에 들어 있었던 나무의 형상의 작용이라고 설명했으며, 이것이 로저 베이컨 같은 스콜라 철학자에 와서는 “실체적 형상”의 작용이라 개념화되었다는 것이다.(너무 개략적인 설명인 것 같지만, 여하간 코플스턴과 질송의 설명을 뒤적뒤적해 보고 나니까 대략 그러하다는 이야기다).
“비의적 성질”도 딱히 어떤 철학자나 학파의 주장인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 당시까지는 비록 눈에 보이기는 해도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을 퉁쳐 설명하는 일종의 임시 개념으로 사용되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뉴턴의 중력 이론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비의적 성질”이라는 비판이 일부 나왔었다니 그 용도를 대강 짐작할 만하다. 여하간 양쪽 모두 뉴턴 시대에는 익히 알려진 용어였던 만큼 “초자연적인 개념” 대신 “실체적 형상과 비의적 성질”로 옮겨야 한다.
어차피 글자보다 숫자가 중요한 책, 즉 본문 대부분을 차지하는 수식과 설명이 더 중요한 책이니, 짧은 서문 따위 아무러면 어떠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프린키피아>는 과학적 의의뿐 아니라 과학사적 의의도 지닌 고전이므로, 저서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엿볼 수도 있는 대목인 서문을 홀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유명한 고전에 대한 외경심에서 일단 구매했지만 완독은 언감생심인 독자 대부분이 그나마 이해할 만한 부분은 서문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최근의 유행과 관련해서 이 책에서 마땅히 주목받아야 할 점이 하나 있는데, 정작 이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지적하지 않은 듯해서 한 마디 해볼까 한다. 바로 <프린키피아>가 나올 당시 왕립학회의 대표를 맡은 새뮤얼 피프스의 이야기다. 피프스라면 당대에는 관료 겸 정치인으로 활약했고, 사후에는 장서가 겸 일기 작가로 더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런데 이 양반은 호색가이기도 해서 성매매는 물론이고 종종 성추행을 저질렀던 것으로도 악명이 높다.
대표적인 사례가 1668년 10월 25일자 일기에 나오듯 열일곱 살짜리 하녀의 “보지”(cunny)를 만지다가 마누라에게 딱 걸린 사건이다. 결국 부부가 대판 싸우고서 하녀의 해고로 마무리했으니, 이쯤 되면 성폭력에다가 부당 해고까지 일삼은 그의 도덕성이 영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프린키피아>의 초판 속표지에 왕립학회 대표 자격으로 피프스의 이름(S. PEPYS)이 들어갔고, 이 속표지를 활용한 번역본 보급판 표지에도 역시나 들어갔다는 점이다.
물리학계의 제1원리가 뉴턴의 <프린키피아>라면 현재 한국 사회의 제1원리는 페미니즘일 터이니, 이쯤 되면 상습 성폭력범 겸 악덕 고용주의 후원으로 간행된 것도 모자라서 가해자의 이름을 버젓이 표지에 적은 책이라는 이유로 <프린키피아>에 대한 전국적 불매 운동이 벌어져야 마땅하지 않을까.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뉴턴 역학에 대한 국가 차원에서의 거부 운동이 벌어져야 마땅하지 않을까. 여러 페미니스트와 프로불편러의 동참을 권유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