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에서 불길한 악역 겸 장애물로만 등장했다가, 진 리스의 재해석과 페미니즘 비평가의 저서를 통해 유명해진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남성우월적 사회에서 여성이 당하는 유폐를 상징하는 한편, 지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자립이 가능했던 '신여성'과 상반되는 '구여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근대 사회에서 여성의 교육 기회가 늘어나면서 배출된 신여성은 전통적인 가치관에 순응하는 구여성과 갈등을 빚게 되었는데, 당시의 가부장적/남성우월적 사회 구조에서 양측의 갈등이 고조된 원인은 당연히 남성의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태도이지만, 신여성 역시 일면 동조한 탓이 없지 않았다.


대표적인 문제점이 중혼이었는데, 이미 구여성과 결혼한 지식인 남성이 신여성과 재혼하는 경우가 그러했다. 중국의 경우에는 루쉰이 본처를 내버리고 제자인 쉬광핑과 중혼해서 아이까지 두는 바람에 두고두고 비난을 받았던 것이 그러했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런 사례는 여럿 찾아볼 수 있었다.


구여성이 일방적으로 소박맞은 억울한 피해자였던 반면, 신여성은 제아무리 사회적 억압과 상황적 한계를 탓하더라도 사실상의 가해자, 또는 최소한 공범자가 된 셈이었다. 이혼을 꺼렸던 사회 통념상 신여성 애인의 권리는 부정되었던 반면, 구여성 본처의 권리는 보장되었던 셈이니 꽤나 역설적이다.


영문학자 나영균의 회고에는 그 시대 신여성과 구여성의 운명을 보여주는 "구석방 고모"와 "익선동 아주머니"의 사례가 등장한다. 전자는 당연히 그의 고모 나혜석인데, 생전에는 대표적인 신여성이었고 사후에는 페미니즘의 원조 격으로 추앙되지만, 말년에는 오빠네 집 구석방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이혼 후에 나이가 들며 생계가 막막해지자 정기적으로 오빠 집에 찾아왔는데, 나영균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 날 하교 중에 웬 거지가 앞에 걸어가고 동네 아이들이 뒤에 따라가는 모습을 보고 희한하다 생각하던 차에, 그 거지가 자기네 집으로 들어가기에 질겁해서 뒤따라가 보니 자기 고모였다 한다.


그래서인지 조카는 구석방 고모 옆에 가까이 가지 않았고, 거지꼴을 하고 찾아온 시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재우는 일은 물론이고 당장 나가라고 호통치는 남편/오빠까지 달래는 일도 그 어머니가 전담했다고 한다. 그랬던 구석방 고모가 지금은 위인 취급을 받으니 조카의 심정도 상당히 묘할 법하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말년이 신여성의 불운을 체화한 것처럼 보이는 나혜석도 젊은 시절에는 구여성을 울린 가해자였다는 점이다. 첫사랑 상대 역시 구여성과 결혼한 유부남이라서 여차 하면 중혼까지 갈 뻔한 상황에서, 그가 사망하며 나혜석이 다른 남자를 선택해 그 유명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구여성을 울린 전력은 나혜석의 올케, 즉 나영균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이쪽도 가정이 있는 남자와 중혼해서 자녀를 낳은 신여성이기 때문이다. 딸의 회고에 따르면, 학교에 다니게 되어 가족 증명서를 떼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부모가 뒤늦게야 그런 사실을 알려주어 충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알고 보니 나영균의 아버지는 본처와의 결혼을 원치 않아 첫날밤부터 동침을 거부한 끝에 별거하게 되었으며, 당황한 집안에서는 이혼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종의 대안으로 익선동의 집을 사줘서 새색시 혼자 살아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돈이라도 있는 집안이었으니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결국 생모가 측실 취급을 받으면서 나영균도 호적상으로는 아버지의 본처인 "익선동 아주머니"의 딸로 되어 있었던 것인데, 이건 예전부터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역사학자 김기협의 생부 김성칠과 생모 이남덕 역시 중혼 상태에서 호적이 꼬이는 바람에 이후로도 가족 간에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본처도 딱한 사람이니 가끔 찾아가서 안부라도 전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몇 번인가 그렇게 했던 나영균은 "익선동 아주머니"의 초라한 행색이며 무지한 언행에 실망한다. 급기야 결혼을 원망하며 자살까지 입에 올렸던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된다고 말하지만, 소박맞은 본처 역시 억울하기는 매한가지다.


이쯤 되면 아무리 '사빠죄아'라는 논리를 들이대더라도, 위와 같은 사례들에서 신여성이 구여성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엄연한 사실로 보인다. 공동 피해자인 신여성과 구여성이 합심하여 문제의 원인인 남자를 붙잡아다 거세하는 사이다 듬뿍 자매애 뿜뿜 결말 대신 서로를 원망하기 바빴던 셈이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남자 쪽이다. 어떤 면에서는 축첩제가 잔존하는 상황에서 자유 연애를 편리한 핑계로서 악용했던 셈이니까. 자기도 친구들처럼 신여성을 만나고 싶었지만 구여성인 본처가 겪을 고생을 생각하니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는 국어학자 이희승의 회고만 봐도 그 비윤리성을 알 수 있다.


제인 에어가 로체스터의 중혼 공범이라면, 신여성도 사실상 마찬가지이다. 그나마 제인은 중혼 사실을 미처 몰랐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겠지만, 신여성은 대부분 그런 사실을 아는 상태에서도 기꺼이 받아들인 경우이기 때문이다. 자기 표현이며 시대와의 불화도 좋지만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아닐까.


그나마 자기 표현인지 변명인지가 가능했던 신여성 "구석방 고모"는 훗날 재평가라도 받아내는 반면, 그마저도 불가능해 속을 끓였을 법한 구여성 "익선동 아주머니"에 대해서는 아무도 두둔하거나 기억하지 않으니, 이것도 아이러니한 일이다. 여자는 다 평등하지만, 어떤 여자는 더 평등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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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바깥양반이 뜬금없이 테일러 스위프트의 뱃살 이야기를 한다. 공연 중에 찍힌 사진에서 유난히 뱃살 두둑한 모습이 포착되어 살찐 거다/아니다, 임신한 거다/아니다 등 온갖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라는 거다. 무슨 말인가 궁금해 검색해 보았더니, 뱃살이 맞더라도 우리보다 날씬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사실 나귀님은 이 가수 잘 모른다. 하도 명성이 자자하기에 무슨 노래를 부르나 궁금해서 유튜브에서 찾아 들어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내 취향은 아닌지 딱히 귀에 들어오는 곡까지는 없었다. 마미돈노 어쩌구는 패러디라도 많이 해서 기억하지만, 이 가수는 워낙 반듯한 이미지라서 뭐가 없나 싶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테일러 스위프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런 반듯한 이미지 때문이다. 부모가 제임스 테일러의 팬이어서 그 성을 따서 딸의 이름을 지어주었다기에 호기심이 생겼는데, 유튜브를 검색하니 스위프트의 공연에서 테일러가 깜짝 손님으로 등장해 함께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 있었다.


재미있는 인연이라 생각하는 동시에, 선배 가수를 예우하는 것을 보니 바르게 자란 아가씨로군 하고 기특하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유튜브 댓글을 확인해 보니 스위프트의 팬들 중에 테일러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인지, 레전드에게 막말하지 말라는 어른들의 훈계 댓글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세대가 바뀌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시대를 풍미한 유명 가수를 향한 냉소나 조롱은 곤란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지금은 그저 기타를 더듬으며 맥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대머리 할아버지에 불과해 보이겠지만, 한때의 훈훈했던(?) 외모를 기억하는 팬들에겐 여전히 스타이니까.


스위프트도 이미 30대 중반이라니, 머지않아 다른 후배 가수의 무대에 함께 섰을 때 저 화장 떡칠하고 뱃살 두둑한 할머니는 누구냐는 식으로 조롱하는 댓글이 달리면 팬들로서도 기분이 썩 기분이 좋을 것 같지는 않다. 어찌 보자면 좋아하는 가수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도 팬으로서는 큰 행운이니까...



[*] 최근 뉴진스 일본 공연에서 팜하니가 부른 "푸른 산호초"가 큰 화제가 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원곡자로 말하자면 한 시대를 풍미한 아이돌이자 현재는 원로급 가수인데, 외국에서 온 어린애가 마치 포카리스웨트 광고 찍다 온 것 같은 차림으로 모두가 다 아는 그 노래를 천연덕스럽게 부르고 있으니 당연히 모두들 기특하다며 감격하지 않을까. 새삼스레 젊은 트로트 가수들을 좋아하는 노인 팬들의 심정이 어떤 건지 짐작이 갈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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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구입한 윌슨과 횔도블러의 공저 <초유기체>를 보니 개미 둥지 주물 제작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전에 윌슨 책에서 간혹 그 사진과 언급이 나오기는 했지만, 책상 위에 놓아둔 물건이라고 하기에 기껏해야 농구공 크기 정도인 줄로만 착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훨씬 더 거대한 물건이었다!


<초유기체>의 제10장 "둥지 건축과 새 보금자리 찾기"를 보면, 개미 둥지 주물 모형 제작 전문가인 월터 칭켈이라는 사람이 직접 만든 물건 옆에 서 있는 사진이 두 장 나오는데, 양쪽 모두 2미터 넘는 깊이에 걸쳐서 산재한 수많은 방들이 가느다란 통로로 이리저리 이어지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그 월터 칭켈의 저서가 (저자명은 월터 "칭클"로 표기되었다) <개미 건축>이라는 제목으로 이번에 번역된 모양이니 놀랍고도 반가울 뿐이다. <초유기체>에서는 그 제작 과정을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넘어갔기에 신기한 만큼이나 궁금하기 짝이 없었는데, <개미 건축>으로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법하다.


늘 그렇듯이 Yes24의 고화질 미리보기로 살펴보았더니, 개미 둥지 입구에 부어 넣을 주물의 종류 선정 과정에서부터 상당히 자세하게 서술된다. 좁은 구멍을 따라 한참 흘러가야 하기 때문에 천천히 식는 주물이 필요해서, 처음에는 석고를 쓰다가 나중에는 아연과 알루미늄 같은 재료로 바꿨다고 한다.


귀하의 주택이 곧 모형화될 예정이니 모두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운운 하는 사전 공지를 냈을 리가 만무하니, 주물 제작 과정에서 그 안에 들어 있던 개미와 애벌레는 모조리 죽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개미야 하루에도 숱하게 죽고 또 태어나는 미물이니 굳이 슬프거나 안타까워할 이유는 없을 법하다.


물론 윌슨이나 칭켈 같은 개미학자라고 해서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것이야 아니겠지만, 생물학 연구의 대의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은 필요하다는 점을 역시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윌슨은 황폐화한 섬의 생물 재정착 실험을 위해 작은 무인도에 살충제를 살포한 전력도 있으니까.


간혹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식으로 경중의 차이를 애써 무시하려는 사람도 있는데, <던전밥>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생물의 생존은 다른 생물의 죽음을 가정하는 것이니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기껏해야 내 목숨을 위해 희생되는 다른 목숨이 있음을 기억하며 더 겸손하게 살려 노력하는 것이 최선 아닐까.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는 이런 사실을 뭔가 더 극적인 사례로 설명한다. 즉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이 수건으로 뭔가를 쓱 하고 닦는 순간, 그 수건 속에 기생하던 고도로 발달한 미생물 문명이 단숨에 멸망을 맞이해 버린다는 것이다. 넓은 견지에서는 세상만사도 그렇지 않을까.


기독교에서는 하느님 눈에 인간이 미물에 불과하다고 강조하고, 불교에서도 영겁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집착은 무의미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비록 그런 가르침대로 살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인간의 관점과 개미의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상상하다 보면, 우리가 더 겸손해야 할 이유도 깨닫게 된다.


물론 우리가 미처 모르는 어떤 거대한 원리나 법칙, 또는 운명이나 맹목이 있다고 가정한다 해서 지상의 모든 불행과 불의가 선뜻 손쉽게 이해되는 것까지는 아니다. 마치 엊그제 갑자기 일어나서 온 나라를 놀라게, 슬프게, 안타깝게, 분노하게 만들었던 서울 시청 인근 차량 폭주 사고의 경우처럼 말이다.


피해자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하나둘씩 밝혀지며 안타까움을 더해주는데, 뉴스 보도에서 '아빠가 아니라고 말해달라'던 어느 유족의 절규가 유난히 귓가에 맴돈다. 이런 소식 앞에서야 개미와 인간이며, 지구와 우주며, 영겁과 순간이며 하는 이야기도 부질없고, 그저 딱하고 눈물겨운 것이 인지상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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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의 미국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조 바이든이 노쇠의 징후를 드러내는 바람에 사방에서 사퇴 압력이 쏟아진다는 뉴스가 나오더니만, 어제는 사퇴 권유 대열에 합류한 사람 중에 의외로 낯익은 이름이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었던 톨스토이와 발터 벤야민의 전기 소설 작가로 알려진 제이 파리니가 바로 그 사람인데, 바이든과는 어려서부터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턴의 한 동네에 살면서 피차 잘 알던 사이였다고 한다.



>>> "당신만큼 대범하고 자제하는 지도자는 미국 역사에서도 드뭅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노인이죠. 저처럼요. 하루를 힘차게 보내려 힘을 끌어 모으는 게 뭔지를 저는 압니다. 우리 몸도 예전만큼 따라주지 않죠. 가끔은 아침에 일어나기조차 버겁습니다." <<<



조 바이든은 1942년생으로 82세이고 제이 파리니는 1948년생으로 76세이니 양쪽 모두 노인은 맞다. 예전 같으면 나이가 곧 지혜의 상징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치매를 걱정해야 할 때이니 물러나는 게 맞기도 하겠다.


바이든의 전임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레이건은 후보 토론회에서 70대의 나이를 지적받자 '어른답게 살살 봐주며 할게요' 운운 농담으로 받아 넘겨 오히려 호감을 샀지만, 지금 바이든은 그마저도 불가능해 보인다.


다만 문제는 저쪽이 무려 '돌아온 트럼프'라는 것. 지난 4년의 시간 동안 미국 민주당에서는 정말 인재가 없었던 건지 의문이 든다. 물론 이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미루어 일종의 유행인가 싶기도 하지만...



[*] 제이 파리니는 상당히 많은 저서를 내놓은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겨우 네 권에 불과하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과 <발터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을 갖고 있으니 이번 기회에 꺼내 읽어봐야겠다. 문제는 이걸 어디에 꽂아 놓았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전기로 분류했나 소설로 분류했나, 소설이라면 미국 소설로 분류했나 아니면 기타 소설로 분류했나, 아니, 내가 두 권을 정말로 사기는 샀었나, 이래저래 영 감감하기만 하다. 어쩐지 남 이야기 하고 있을 때가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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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SF게임>이라는 책이 있기에 뭔가 궁금해 클릭해 보니, 김초엽이라는 소설가가 어려서부터 접한 SF 게임에 대해 회고하는 내용이란다. 그런데 미리보기로 확인해 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에 등장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무려 윈도우 98이다. 문제는 이 내용이 표지와는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책의 표지에는 육각형 외장에 원형 유리가 달린 기계 장치가 나오는데, 이건 1962년에 MIT의 1세대 해커들이 만든 최초의 컴퓨터 게임 "스페이스워(Spacewar!)"를 구동했던 컴퓨터 PDP-1의 디스플레이 장치이다. 즉 저자가 경험한 윈도우 98보다 한 세대 이상 앞선 물건이라는 뜻이다.


본문에 "스페이스워" 게임이나 PDP-1 컴퓨터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면 또 모르겠지만, 미리보기로 확인한 첫 장에서는 윈도우 98과 그 이후의 게임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마치 스타워즈 시리즈 추억담이라며 표지에 데스 스타를 실어놓은 책에 오리지널 3부작 대신 한 세대 뒤의 시퀄 내용뿐인 격이랄까.


물론 나귀님 역시 "스페이스워"나 PDP-1을 직접 보거나 만져본 경험이야 없고, 가장 오래 된 기억이라야 오락실용 "벽돌깨기"나 "인베이더"나 "갤럭시안" 등을 돈 넣고 해본 기억뿐이다. 다만 웬일로 초창기 게임에 대한 에세이가 나왔나 싶어 상당히 반가웠던 만큼 실망감도 크기에 투덜거려 보는 것뿐이다.


혹시 이후의 내용에 "스페이스워"에 대한 언급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제작자가 E. E. 스미스의 SF "렌즈맨" 시리즈에서 우주선끼리의 일대일 대결이라는 내용을 따온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스티븐 레비의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그 전후 사정을 참고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스페이스워" 게임의 제작 동기는 새로 나온 컴퓨터인 PDP-1의 디스플레이 해킹이었다. 지금은 해킹이라 하면 부정적인 뜻으로 각인되었지만, 1세대 해커들의 입장에서는 각자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프로그래밍 실력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뽐내기 위한 잉여력 대폭발 더하기 쓸데없는 고퀄리티 관종 짓이었다.


실질적 제작자인 프로그래머 스티븐 러셀은 PDP-1을 이용해서 우주선 전투 게임을 만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이후 이런저런 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빈둥거리는 것을 지켜보다 짜증이 난 친구가 직접 나서서 필요한 자료를 다 챙겨주는 바람에, 울며겨자먹기로 프로그래밍 끝에 "스페이스워"를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주위 친구들의 도움도 적지 않았는데, 러셀이 어느 정도 완성된 프로그램을 "종이 테이프"에 출력해서 책상에 놓아두면, 그걸 본 친구들이 트집을 잡으며 우주 배경이며 공간 이동 같은 세부 내용을 저마다 만들어 추가했기 때문이다. 이런 공동 작업을 통해 게임이 점점 더 정교해지게 되었다.


급기야 컴퓨터의 육각형 외장에 달린 버튼을 직접 눌러 조작하기가 불편하다고 판단되자 근처에 있던 재료를 대강 조립해 손쉬운 조작이 가능한 조종 장치도 만들어냈으니, 이것이 사상 최초의 조이스틱이다. 사운드조차 지원하지 않는 원시적인 게임 "스페이스워"가 줄곧 전설로 회자되는 이유도 그래서다.


1937년생으로 현재 80대인 스티븐 러셀로선 "스페이스워"로 인해 사실상 시작된 게임업계의 어마무시해진 성장을 지켜보며 마음이 복잡했을 것도 같다. 물론 그 게임 제작 수년 뒤에 자신에게 컴퓨터 강의를 들은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MS를 설립해 거부가 된 것도 이미 봤으니 의외로 덤덤할 수도 있지만...




[*] 이 전설적인 게임의 원작이 된 E. E. 스미스의 소설은 훗날 "그린 랜턴" 만화 시리즈에 영감을 주었다고 하는데, 정작 만화 쪽에서는 소설의 영향에 대해서는 부정하면서도 유사한 설정을 많이 도입해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번역본은 예전에 아이디어회관 SF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나온 적이 있었고, 애니메이션 각색이 1980년대에 MBC에서 "은하순찰대"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적도 있지만, 아직까지 완역본은 없다고 알고 있다. 1980년대에 해냄출판사에서 (맞다. 조정래의 대하 장편 소설로 유명한 바로 "그" 출판사다!) 무려 네 권으로 번역서를 간행한 바 있었지만, 아쉽게도 역시나 아동용 축약/번안 작품에 불과했다. 나귀님도 완질은 없고 그중 마지막인 제4권만 갖고 있는데, 표지만 봐도 정말 가슴이 웅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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