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곁 - 오늘이 외롭고 불안한 내 마음이 기댈 곳
김선현 지음 / 예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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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 당신이 사랑한 작가는 서민입니다.” 허걱! 몰래한 사랑이었건만 이렇게 발각되다니! 알라딘 추천 마법사 앞에서 나의 취향은 숨길 수 없는 기침이었다. 한국소설, 초등 5~6학년, 교양 인문학, 에세이, 책읽기/글쓰기, 사회문제, . 나도 인지하지 못한 관심 분야를 정확히 짚어낸다. 나는 구매 이력을 통해 끊임없이 분석되는 대상이었다.

 

모든 예술 작품은 작가가 표현하는 이야기이다. 문학, 음악, 연극뿐 아니라 미술에도 저마다 길고 짧은 이야기가 있다. 유쾌하거나 슬프거나 설레거나 마음이 깊고 넓어지거나. 특히 미술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각기 다른 장르의 단편소설을 읽는 기분이 든다.

다양한 화풍과 개성 있는 색깔이 스펙트럼처럼 펼쳐졌다. 78점의 그림이 사랑, 관계, 라는 주제로 나뉘어 소개된 책이다. 저자의 짤막한 글도 함께 곁들여있다. 그림 사이를 산책하며 그 길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통해 나를 바라보며 이전까지 모르던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 한참을 머물며 단상에 잠기거나, 빙그레 미소를 짓거나, 동영상을 보는 듯 역동성을 느끼기도 했고, 먹먹한 마음으로 잠시 멈추거나, 색깔이 아름다워 빨려들 듯 집중했다. 그림이 건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림에 관한 책이어서 일까. 저자의 글이 적힌 바탕 면과 글씨의 색도 주제에 어울리게 고심한 것으로 보인다. 1장은 사랑의 설렘을 연상시키는 분홍이, 2장은 원만하고 편안한 관계가 생각나는 초록이, 3장은 따뜻함과 차가움을 상징하는 빨강과 파랑이 조화롭게 섞인 보라가 나를 만들어간다는 이미지와 잘 부합되었다.

몇몇 그림들을 바라보는 방식이 저자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내가 지닌 두 가지 성향을 깨달았다.

 

시작은 사소했다. <무자비한 미녀>(p12)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살짝 겉돈다는 느낌을 받고부터였다. 여자의 발아래 누워있는 기사의 얼굴 위에 드리워진 거미줄에 시선이 갔다. 기사는 죽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여자는 오히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에 무자비하다는 표현을 쓴 걸까.

<은물고기>(p46)에서는 그림 상단에 표현된 은물고기와 물의 요정을 칭칭 옭아맨 머리카락 같은 대상에 대한 언급이 없다. 소위 제목인데 하며 아쉬워했다.

<샤프롱>(p72)에서 저자는 권태기를 말한다. 내 눈에는 두 남녀와 다른 곳을 바라보며 이들을 기다리고 지켜주는 듯한 신사가 더 들어왔다. 신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더라면 어떠했을까?

<알프레드 시슬리와 그의 아내>(p82)에서는 이미 아내인데 프로포즈를? 하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목욕 전에>(p126)에서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은 일하고 있었다기보다는 딸을 목욕시키려고 준비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p150)에서 저자가 잔잔한 호수로 표현한 물은 아무리 봐도 늪이다.

<스냅 더 휩>(p172~173)은 저자의 말대로 아이들끼리 충분한 상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장면이 아니라 놀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스냅 더 휩이라는 옛날 놀이가 있다고 한다.

나는 의외로 제목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집착하는 인간이었다.

 

<너무 이른>(p110)에서 저자는 대부분의 시선이 분홍드레스를 입은 여인에게 향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사람들의 눈동자 방향을 보면 부채를 든 여인 한 명 정도만 분홍드레스의 여인을 바라보고, 대부분은 시선의 끝이 제각각이다. 파티 시작 전에 볼 수 있는 풍경인 듯하다. 또한 몰래 파티 장 내부를 쳐다보는 두 사람의 위치에서는 중앙의 분홍 여인을 볼 만한 각도가 안 나온다고 판단된다.

<부엌에 있는 여인>(p142)은 소녀가 아닌 중년의 여인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제가 Women이 아닌 Girl인 것은 여인의 마음속에 있는 소녀 같은 감성을 반영하고자 하는 화가의 의도가 아닐까. 주방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가리는 천이 여인의 검은 옷과 대비되어 현실을 두드러지게 한다.

<실타래 감기>(p176)에서는 실이 왼쪽 여인을 감싸고 있지 않다. 원래 끈이 옷에 달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끈의 색깔이 실보다 좀 더 짙다. 옷의 끈과 실타래의 실은 자세히 보면 어긋나있다.

<작은 도둑들>(p196)에서 저자가 엄마로 언급하는 인물은 빨간 모자를 거꾸로 눌러쓰고 있다. 물론 엄마도 젊게 살 수는 있지만, 전체적인 상황을 종합해보았을 때 언니가 담장 위로 가벼운 동생을 올려 사과 몇 개를 따고 이제 철수하려는 장면으로 보인다.

하나하나 나열하다 보니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고 분석하는 내가 보인다. 탐구활동을 하던 사고방식이 그림을 볼 때에도 적용이 되었던 걸까. 나는 그림에까지 수학적인 각도와 과학적인 관찰의 디테일을 적용하는 집요한 인간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그림들을 골라본다. <밀짚모자>(p28), <>(p150), <첼리스트>(p158), <스케치- 두 명의 인도 무희>(p226), <장갑을 낀 젊은 여인>(p240)이 마음에 들었다.

메모를 해놓은 다음 빠른 속도로 주르륵 다시 한 번 넘겨본다. 공통된 특징이 보인다. 마음에 든 그림을 이루는 주된 색상이 초록, 노랑, 빨강인 거다. 졸지에 신호등을 좋아하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에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몽환적인 초록과 <장갑을 낀 젊은 여인>에서 타마라 렘피카의 정돈된 초록이 좋다. <첼리스트>에서는 악기와 첼리스트의 옷과 배경이 파스텔 톤으로 채색되어 깊이감이 느껴진다. <스케치-두 명의 인도 무희>는 무희들이 입고 있는 옷 색깔이 마음에 든다.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은 <밀짚모자> 이다. 선명하게 붉은 입술을 제외하고는 빈티지 신호등을 보는 듯 짙은 초록, 노르스름한 모자, 불그스름한 꽃잎의 조화가 좋다. 여인이 입고 있는 하얀 옷은 화이트초코가 대패삼겹살처럼 얹힌 케이크를 연상시킨다. 꽈배기 도넛이 생각나는 머리카락의 컬도 좋다. 전체적으로는 그림 속 여인이 매끈한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처럼 느껴져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다비드>상이 떠오른다.

타마라 렘피카의 그림이 두 점이나 마음에 드는 걸 보면 내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인간인가 보다. 아니면 요즘 이런 색상에 끌리는 시기일 수도 있겠다. 카카오스토리에서 색깔로 알아보는 현재의 심리 상태를 테스트해 본 적이 있다. 그 때 그 때의 마음에 따라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색깔이 다르다는 것이다. 요즘 나의 마음은 어떤 상태일까.

 

일반적인 책과는 달리 차례에 나열된 소제목들이 길다. 차례를 천천히 읽는 것만으로 생각할 거리가 많다. 표지에는 오늘이 외롭고 불안한 내 마음이 기댈 곳이라는 글귀가 있다. 차렵이불 정도의 가뿐함을 지닌 본문의 글들은 따스하고 부담이 없었으나 기대했던 무게감보다 다소 가벼운 감이 있었다. 중력이 지구의 1/6인 달에 가면 이런 기분일까. 곁에 있는 저자의 글이 내 정서의 코드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크게 감동을 느끼거나 쉽게 몰입할 수 없었다. 이보다 더 짙은 내용의 글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뒤늦게 깨닫게 된 나의 두 가지 성향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휴식이란 하지 않으면 안된다가 사라져버린 상태다. 휴식이란 다름 아닌 행위의 부재를 의미한다.(오쇼 라즈니쉬, p207)’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이다. 이 문장을 천천히 음미해본다. 그림을 감상하면서도 편안하게 휴식을 취한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끊임없이 작품을 분석하려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때로는 느슨해질 필요도 있는데.

 

표지의 그림을 한참 바라본다. 오디션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말처럼 그림에 대한 해석은 취향의 차이로 받아들여야함을 깨닫는다. 곰곰 생각해보면 관점의 차이는 제각기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당연한 일일 터이다. 표지에 나있는 창문을 통해 <봄의 연인>(p217)에 등장하는 두 연인을 집중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고, 바닥의 연두 빛과 활짝 흐드러진 벚꽃을 주로 보는 나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맞다, 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라 같다, 다르다의 문제인 거다. 저자의 해석이 틀렸던 것이 아니라 나와 관점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다른 날 다른 시각에 저자의 글을 읽는다면 지금과는 다른 느낌을 받을 지도 모르겠다.

그림은 내 취향을 알려준 작은 데이터였다. 그림 안에 내가 있었다. 그림을 통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림은 색깔이 있는 거울이었다.

 

 

*오타: p174의 그림 제목 Wihp W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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