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은 샘을 품고 있다
이승우 지음 / 복있는사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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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이나 청력이란 말은 있는데, ‘후력, 미력, 촉력은 왜 없을까. 오감을 떠올린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피부감각. ‘이 의미하는 미묘한 차이에 주목한다. 시력 검사나 청력 검사는 건강검진에서도 하지만, 후력이나 미력, 촉력 검사는 없다. ‘! 이 냄새가 얼마나 구린가요?’ 상상해보니 좀 웃기다. 측정하기 애매할 수 있겠다.

혹자는 인체 구조를 빗대어 보는 것듣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코와 입은 한 개인데, 왜 눈과 귀는 두 개나 있는지 아느냐며. 객관적인 말들을 차치하고라도 주관적으로도 눈과 귀는 중요하다. 좋아하는 책과 음악과 미술을 가까이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감각이니.

 

<사랑의 생애>를 읽고 저자의 작품에 호기심이 생겨 선택한 책이다. ‘보는 것에 대한 에세이로 읽었다. ‘신앙과 문학과 삶에 관한 사색이라는 부재가 붙어있지만, 전체적으로 흐르고 있는 서술어는 보다였다, 지금의 나에게는. 어떻게 보아야 할지, 어디를 보아야 할지,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상대를 보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영혼의 창으로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생각했다.

 

1눈 맞춤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있을 때 우리는 그 눈을 통해 서로의 마음과 만난다.(p98)’며 영혼과 마주치는 순간을 말한다. ‘우리는 부딪쳤을 뿐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 모두가 낯익은 얼굴들 모르는 사람들이다.(p37)’ 인용된 김광규의 시에서 진정한 존재의 마주침을 생각한다. <아는 여자>라는 영화 제목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본다고 해서 상대를 진짜 아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안다고 해도 알지 못하는 관계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차라리 시간은 물과 같다. 흐르는 물과 같아서 반복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토막 낼 수도 없다.(p58)’는 문장에서 소설 한 편을 떠올린다. 김중혁의 단편 소설 <요요>에서 시간에 대한 내용을 읽고 크게 공감한 기억이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이런 시각으로 먼저 시간과 시계를 바라보았구나.

 

2신의 일식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포함되어있다. 1,2,3부의 전체적인 구성이 성경 구절에서 시작된 일화와 서술이라 종교적 색채가 짙은 책이지만, 종교가 없는 내가 읽어도 거북하지 않다. 성경과 비슷한 무게감으로 곳곳에 인용된 시나 문학 작품의 영향 때문일까. 성경과 시의 구절이 공명하면서 일상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투영된다.

마르틴 부버의 <신의 일식>이라는 관점에 놀란다. 달에 의해 태양이 가려지는 일식처럼 신의 존재도 여러 장애물에 의해서 가려져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흐린 날,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볼 때마다 그 위에 여전히 빛나고 있을 태양을 상상하곤 했는데, 이런 현상을 종교와 결부시킨 사람도 있다니.

정현종의 시을 인용하면서는 창이 부재에 가깝게 투명할 때, 우리는 창을 잃는 대신 그 창을 통해서 모든 것을 얻는다. 창이 투명하기를 그칠 때, 우리는 창을 얻고 그 대신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p140~141)’라 쉽게 풀이해준다. 내 영혼에 대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 되는 마음을 생각한다.

하늘은, 하늘을 쳐다보는 순간에만 하늘이다.(p159)’라는 문장에서 잠시 멈추어 선다. 한참동안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 세상이 갑자기 넓어진다.

 

3사막은 샘을 품고 있다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인용된 이 문장은 사막으로 비유되는 삶에서 희망을 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황량하고 건조하고 막막한 사막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샘이라니. 힘을 내어 삶을 걸어갈 수 있게 다독여주는 말이다.

남극 대륙 빙하의 4km 아래에는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거대한 호수가 있다고 한다. 보스토크 호수. 영하 60의 공기를 완벽하게 차단한 채 수백 만 년 단절된 230km 길이의 호수. 학자들은 지열에 의해 빙하의 하단부가 녹아서 생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극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호수가 만들어지는데, 우리의 삶에도 샘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삶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는 내용이 많다. ‘전시가 삶이 되었다. 가진 것을 전시하고, 전시하기 위해 가지려 한다.(p245)’ 카카오스토리에 푹 빠져있던 몇 년 전이 생각난다. 음식을 먹기 전, 접시를 재배열하고 가장 먹음직스럽게 사진을 찍은 후에야 젓가락을 들 수 있던 때도 있었지. 그 때를 회상하며 잠시 웃는다. 맛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이었는데. 전시용 사진에 맛이 담기는 것은 아니었으니.

 

드라마용으로 구매했던 안경을 일상에서 더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노안이 오고 있는 건가 싶어 살짝 우울해하는 중이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변화임을 알고 있다. 책을 읽다 잠시 멈추게 될 원인이 눈이 피로해서일까봐. 가능하다면 오감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유지되기를 바라는 감각이기에.

오래도록 시력이 유지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방향일 것이다. ‘시선의 방향이 곧 우리의 삶을 결정하기 때문이다.(p264)’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긴 문장이다. 내 삶의 방향은 내 발걸음이 향하는 방향일 것이고,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발걸음은 옮겨질 것이니.

어디를 바라볼까. 어디를 향해 갈까. 샘을 찾고, 샘을 바라보며, 샘을 향하고 싶다. 내 마음 깊은 곳에도 자그마한 샘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우선 나의 샘을 찾고, 그 샘이 얼지 않도록 따뜻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사람들을 바라보고 저마다 품고 있을 샘을 찾고 싶다. 혹시나 얼어붙어 있다면 나의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녹여주고 싶다. 그렇게 만들어질 샘이 곧 내 삶의 샘이 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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