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쏜살 문고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이민경 추천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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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소원이었다. 한 번이라도 나만의 방을 가져보고 싶던 건. 어릴 때부터 간직해온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퇴근 후 동네 커피숍이다. 둥그런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과 책 한 권, 왼 편으로는 아메리카노 한 잔이 놓여있다. 음악이 향긋한 공간.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장소이다. 몇 시간동안 나는 좀 더 행복한 사람이 된다. 집보다 마음이 더욱 편해지는 곳. 집 안 곳곳 널려있는 가사에 대한 의무감에서 잠시 벗어난 이곳은 나만의 공간이다. 주인장이 여기를 니 방으로 허한 적 없다 해도 상관없다. 지불한 커피 값 2,500원의 효력이 다할 때까지 이곳은 나의 영역이 되리니. 어떤 종류의 밥값에 버금가는 비용이라 처음에는 주춤하기도 했지만, 열심히 일한 나, 스스로에게 이 정도의 허용은 해도 될 듯하여.

울프의 의견에 격하게 공감한다.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p18) 커피 값조차 버거웠더라면 이런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이런 공간이 없었더라면 독후감이나 시를 쓰거나 책을 읽을 수 있었을까. 흰 바탕에 배열한 초록색 성냥개비를 연상시키는 표지, <자기만의 방>이라는 제목이 테이블 위에서 당당한 좌석표인 듯 말을 건다.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를 다룬 에세이다. 케임브리지 강연문을 토대로 가상적인 상황을 설정한 저자는 주인공의 시선으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말한다. 아직도 이물감을 느낄 정도로 낯선 영역으로 다가오는 페미니즘에 대하여, 이 책은 이념을 떠나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삶을 깊게 조명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분량이 가뿐해서 만만하게 보았다가 문체가 낯설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몇 번이나 도돌이표를 찍어야 했다. 적응이 되고 난 후반부에는 그런대로 잘 흘러간다. 내용이나 글의 전개 방식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비평 글 느낌도 난다. 소설가이자 비평가로도 활동한 사람이다.

 

시에서는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여성의 존재가 고루 퍼져 있지만, 역사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p71)’여성을 향한 차별의 역사가 이토록 뿌리 깊게 지속되어 왔다니! 작은 관심조차 없었다. 역사 속에서 조용히 사라져간, 어쩌면 수없이 반짝이며 소설가 혹은 시인이 되었을 수많은 여성들에게 괜스레 미안해진다.

가장 커다란 해방, 즉 사물은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유가 생겨났습니다.’(p65)라는 문장에 많이 놀랐다. 생각하는 자유가 생..... ‘해방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생각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는 반증 아닌가.

미용실을 다녀온 다음 날, 거울 속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머리에 대한 푸념을 짧은 글로나마 풀어도 그렇게 위안이 되었는데, 일상의 글조차 마음대로 쓸 수 없던 상황이라니! 그 시절을 살았다면 매일 아침,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을 것을.

가진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겸허해져야한다. 당연하다는 생각조차 않고 누려왔던 자유가 시대에 따라서는 꿈꿀 수조차 없던 것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저자는 생각의 폭이 넓은 사람이다. ‘창조적 예술이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먼저 마음속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협력해야 합니다.’(p152) 여성만을 옹호하거나 남성을 폄하하지 않는다.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하고, 홍시는 홍시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성을 뛰어넘어 인간을 향하는 시선을 가진 이다.

 

목마를 타고 떠난 소녀와 잠시 콜라보 되신 분. 그녀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다. 인터넷으로 저자의 생애를 훑어본다. 참 치열했겠다, 글과 삶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소설이란 삶에 대한 어떤 거울 같은 유사성을 가진 창조물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p108~109)라 말한 저자는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에밀리 브론테 등 여성 작가의 작품을 통해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통찰한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한계점의 원인을 그들이 처한 현실적인 삶에서 찾는다.

항상 스스로를 돌아보고 삶의 매순간 섬세하게 반응하고 싶다. 내 글 어딘가 에도 내 삶이 묻게 될 테니.

 

픽션은 사실에 충실해야 하고, 사실이 진실에 가까울수록 픽션은 더욱 나아진다.(p34)’너무나 사실적이라서 픽션인지 다큐인지 헷갈리는 소설들이 생각난다. <잠실동 사람들>이나, <소년이 온다>, <도가니>같은. 장르가 무엇이든 마음을 움직이는 발화점은 한 가지로 점철된다. 진실이 담겨있다면 글로서의 자격은 충분하다.

나만의 방에서 어떤 글을 써야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준 책이다. 어떤 글을 쓰든 진실할 것이고, 삶 속에서 진지하고 당당할 것이다. 시선은 보다 낮은 곳을 향할 것이며 문득 걷다 살짝 스치는 향이라도 민감하게 맡아내고 글에 담아낼 것이다.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할 필요도 없고요.(p28)’, ‘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 그것만이 중요한 일입니다.(p155)’라는 말에서 지금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방금 머금은 마지막 커피향이 향긋하다. 오늘따라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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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4 18: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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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4 19: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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