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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요일의 기록 - 10년차 카피라이터가 붙잡은 삶의 순간들
김민철 지음 / 북라이프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아침이 되었습니다. 아침을 먹었습니다. 점심이 되었습니다. 점심을 먹었습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저녁을 먹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잠을 잤습니다.’8세 때 썼던 그림일기의 문구이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일상. 생각 없이 살아도, 생각을 하며 살아도 시간은 흘러간다.
<시지프 신화>를 읽어본 적은 없다. 돌을 굴리며 반복되는 형벌을 받는다는 신화. 도서 정보를 찾아본다. 돌만 굴리는 이야기는 아닌가보다. 중간에 다른 일을 하지 않고서야 내용이 이리 길 수 없다. 돌덩이와 관련된 철학적 사유가 궁금해진다.
책을 볼 때마다 겉표지를 유심히 살핀다. 한 권의 책이 시작되는 지점은 1페이지부터가 아니라 표지부터라는 생각 때문이다.‘ : ’. 콜론. 그 다음에 무슨 말인가 쓰고 싶어지게 하는 기호. 표지에서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이다. 동양화의 여백이 연상된다. 오직 글씨로만 이루어진 표지, 무채색의 구성. 조선 백자를 본 듯 솔직한 소박함이 책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책들 중에 이 책을 선택했고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산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선택의 연속이다.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모든 선택에는 '만약'이 남는다. (중략) 그 모든 '만약'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다. '나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라는 답. (p91)’
좋은 사람과는 나와 공통점을 찾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는 차이점을 찾게 된다. 어? 음악을 좋아하네? 사진 찍는 것도,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도. 작가와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이 작가 마음에 든다. 사람의 일상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개인의 신변잡기적인 기록에 뭉클할 줄이야! 순간순간 삶에 뛰어드는 열정적인 모습은 수작업으로 만든 퀼트 작품을 연상시킨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삶의 걸음 사이에 살랑거리는 바람이 자유롭다.
우표를 모으고, 껌 종이를 모으고, 빵 봉지를 묶는 금속 끈, 봉지를 묶는 하얀 플라스틱, 성냥갑과 편지지를 모았다.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나 기억도 안 나지만 꽤 진지했고 신상을 득템 했을 때 느꼈던 뿌듯한 기억이 있다. 왜 그랬을까? 대가가 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유는 하나다. 그.냥. 작가의 취미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동료의식을 느낀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그냥’이라는 말은 순수를 연상케 한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타당해보일 때가 있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상상을 한다. 베토벤처럼 귀가 들리지 않는다면, 장금이처럼 갑자기 미각을 잃는다면, 웹소설 주인공처럼 밀가루 알러지를 갖게 된 제빵사라면,...... 상상이 부챗살처럼 펼쳐질수록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참 다행인 삶에 감사한다.
눈을 감고 걸을 때가 있다. 몇 걸음 못 가서 눈이 떠진다. 눈부시다. 이 아름다운 빛을 볼 수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다. 머리 뒤 커다란 방에서 쿵쿵 울리는 음들이 심장을 두드린다. 나이 들면서 감각 기관은 무뎌지지만 시각과 청각은 제일 더디 쇠퇴했으면 한다.
카피라이터가 쓴 글 이어서일까.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다. 15초로 사람을 움직여야 하는 광고는 단 몇 줄로 감성의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시와 흡사하다. 광고의 특성이 배어나오는 심플함과 삶에 대한 긍정적인 기록에 내 삶을 돌아보고 자꾸 움직이고 싶어진다.
도자기 만들기에 도전하고, 벽 사진을 찍는 작가를 상상해본다. 일상적인 수필인데 가슴이 뛴다. 연필 초상화를 배우고 싶던 20대가, 오카리나를 불고 싶던 30대가, 작사가가 되고 싶던 40대 초반이 생각난다. 좋은 가사는 ‘시’와 같다는 생각에 요즘 시 쓰기에 도전 중이다. 산문과는 또 다른 작업이다. 한 편의 시와 한 편의 산문이 주는 무게감은 같다. 새의 가치만큼 살점을 떼어준다 하고 무게를 재어보니, 사람이 온전히 저울에 올라가서야 수평을 이뤘다는 이야기처럼. 시는 단 한 줄의 행만으로도 마음을 울려야 한다. 서투르고 투박할 지라도 계속 도전하고 싶다.
‘열 번을 실패했다는 것만큼 가슴 뛰는 열정이 있을까.’자신감을 잃은 아이에게 이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여기에서 방점은 실.패.가 아니라 열.번.이야. 열 번을 실패했다는 것은 그만큼 도전해보았다는 얘기니까. ’아이는 뭔가를 얻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조만간 다시 시도를 할 것이고, 아마도 또 다시 실패를 경험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과 삶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리라. 경험과 시간은 손을 잡는 이에게 뭔가를 안겨주니까.
작은 감성의 떨림까지도 줄에 얹어 울리는 기타 소리와 같은 삶. 그런 삶을 글로 쓰고 싶다. 그래서 쓴다. 되도 않는 리뷰나 시일지라도, 지가 쓴 글에 지가 감동받는 어이없는 상황을 연출할지라도 개의치 않기로 한다. 고마운 책이다. 언젠가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며 다독여주는 친구를 만나고 온 기분이다. 김민철의 글이 주는 힘이다. 시지프처럼 인내의 시간을 통과하면, 마음에 새겨진 기록들이 눈처럼 쌓일 것이다. 마음이 화해진다. 어쩌면 나도, 어쩌면 좋은 토양이 만들어질 어느 날엔가는, 사람들에게 따스함을 건네주는 글을 쓰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