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돈이 아니라니까 - 몸과 우주의 정치경제학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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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G 폰을 아직도 충전한다. 10년 가까이 되었을 성 싶은데, 0시가 넘어 하루가 시작되면 살짝 기대하는 마음으로 전원을 켠다. 메뉴-신나는 애니콜-마이펫과 놀기. 반갑다고 뛰어나오는 개새끼에는 미안하지만 관심이 없다. 나의 관심사는 4, 오늘의 행운이다.

매사를 차근차근히 풀어나가면 결코 흉하지 않는 날입니다.’여러 일이 버겁게 겹쳐왔을 때 여기 나오는 문장을 보고 힘을 얻은 적이 있다. 한 줄 문장이 뭐라고. 그 후로 생각날 때마다 이 메뉴를 찾곤 했는데, 이게 은근히 잘 들어맞는 거다. 엄청난 노하우를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흔한 잠언 집에서 나올 법한 문장들이건만. 스마트폰으로 바꾼 후에도 2G폰을 처분하지 않고 간헐적으로 충전하는 이유다.

어느 날 나는 위클리 일기장 구석에 하루하루 이 문장들을 적어보는 쓸데없는 짓을 시도하게 된다. 한 달이 지나도 결코 같은 문장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한 후로 궁금해지는 거다. 어차피 일정한 문장으로 돌릴 텐데 얼마나 많은 문장이 심어져있을까. 222일에 시작해서 711, 드디어 문장의 사이클을 알아냈으니 대략 4개월 20일 가량, 140여 개쯤 되겠다.

역은 반복이 아니라 리듬이다. 매번 돌아오지만 다르게 돌아온다. (중략) 우주는 탄생 이래 한 번도 동일한 순간을 반복한 적이 없다. 이 차이가 곧 생성의 동력이다. ”(p53)

1년 뒤면 다시 매미소리 징하게 울어대는 여름이 오고, 오늘이 지나면 24시간의 사이클로 내일이 반복되는 듯 흘러갈 것이다. 그러한 삶의 전 과정에서 같은 순간은 단 1초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때론 나를 낮추고 소소한 용기도 얻어가면서 그 문장들과 시간을 보냈다.

 

종교에 매달리거나 운명에 끌려 다니는 인간형은 아니지만, 사주라든지 음양오행의 원리라든지 주역이라든지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다. 수많은 운명을 한정된 숫자로 분류하는 것이, 삶에 비추었을 때 간혹 들어맞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 꽤 흥미를 자극한다.

이런 이유로 몇 년 전 만났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도 내용을 메모해가며 시험공부를 하듯 읽게 된다. 읽고 나서는 적용을 해봐야한다며 생년월일을 아는 부모님, 남편, 자식, 친구, 직장동료 등 주변인부터 생년월일이 인터넷으로 공개되어 있는 드라마 인간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사주를 따져보는 무모한 행동을 저지른다. 생활 무대가 다르기에 멀리서나마 얼굴이나 볼까 싶은 이민호나 정준영과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라는 게 도대체 왜 신이 났을까. 태어난 시각까지는 모르니 네 개의 기둥 중 에 해당하는 부분까지 4분의 3만 알 수 있지만, 명리학에 관련된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 나는 정화, 그들은 임수야.’따져보며 혼자 히죽거리며 좋아라했던 기억이 있다.

 

정치라든지 경제라든지 이런 용어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삿대질하며 눈을 부라리는 인간들도 마음에 안 들 뿐더러 돈 때문에 휘둘려야하는 초라하고 지리한 삶이 지겨워서 의식적으로 외면했던 이유도 있다. 아웃 오브 안중이라 독서모임의 토론 도서로 읽힘을 당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관련 책을 굳이 찾아 읽어본 적은 없다. ‘몸과 우주의 정치경제학이라는 비호감 용어가 포함된 이 책의 겉표지에서부터 거부감을 느낀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고...이니까. 그녀의 책에 대한 좋은 기억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주니까. 첫 장을 펼치고 마지막 장까지 순두부를 목구멍으로 넘기듯 부드럽게 책장을 넘긴다. 결과는 역시나 성공적이다. 나처럼 정치나 경제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

 

명쾌하다. 초록빛 수박을 반으로 쩍 가르고 선명하게 붉은 수박을 서걱서걱 숟가락으로 퍼먹은 기분이다. 콩나물, 고사리, , 김치 등을 잘 버무려 쓱쓱 비빈 소박한 비빔밥처럼 정치, 경제, 몸과 우주의 콜라보가 조화롭다. 저자가 지닌 방대한 지식을 결코 뽐내지 않는다. 토할 듯이 난해하고 현학적인 언어로 읽는 이를 어지럽히거나 뭐 좀 아는 체하지 않는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시원시원하게 말해주니 속이 후련하다. 날카롭지 않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풍자적인 문장이 좋다. 인위적인 에어컨 바람이 아닌, 서민의 삶이 담긴 김홍도 그림이 그려진 부채로 일으키는 자연스런 바람을 맞은 기분이다. 그래서 좋다. 마음에 들어온 문장이 하도 많아서 무엇을 꺼내놓아야 할지 난감할 만큼.

 

탈정치, 탈경제의 삶을 살고 싶지만 정치와 경제의 영향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잘 안다.

한 정의에 따르면 경제학은 '인생,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관한 궁극적 질문을 다루는 학문이란다. 정치는 본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탐구다.”(p23)

몸과 우주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정치와 경제를 바라보며 해석하는 시선이 신선하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정치와 경제를 끌어와 관계에 대한 자연스러움으로 흘러 절로 내 몸을 들썩이게 한다.

운명의 핵심은 창조와 순환이다. ”(p75)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신체 깊숙이 새겨진 리듬과 강밀도를 변환하라!”(p83)

요컨대 핵심은 관계와 활동이다. 관계가 활동을 낳고, 활동이 곧 관계를 생성시킨다. ”(p109)

그렇다, 문제는 돈이 아니다. 책을 읽고 나니 답을 알 것 같다. 정치건 경제건 과학이건 그 어떤 분야이건 핵심은 삶과 사람이다. 그 삶을 살아가는 나의 몸과 내 몸을 담고 있는 우주이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사람이고, 나만큼 소중한 또 다른 사람이고, 나와 그를 연결하는 관계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은 럭셔리한 건물이 있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p140~141)

 

다시 읽어보니 독후감에 별 내용이 없다. 328페이지에 담긴 내용을 눈꼽만큼 제시해놓고 그저 좋단다. 하지만 무엇이 좋았을까, 리뷰를 읽는 나도 좋을까 궁금한 마음에 한 번 읽어볼까 생각이 들지도 모르니, 이것으로 리뷰의 역할은 충분할지도.

 

늘 그렇다. 그녀의 책을 읽으면 나를 아끼게 되고, 또 다른 내가 담긴 너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다. 사람 냄새가 나는 글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뜨뜻한 아랫목에서 이불 하나 둘러 덮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군고구마를 먹는 기분이다.

길은 가면서 만들어지는 법, 가다 보면 다른 길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중요한 건 계속 가야 한다는 것. ”(p278)

뭐가 됐건 핵심은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것이다. ”(p280)

걸어가고 싶다, 내 발로 나의 길을. 자신의 길을 가는 또 다른 이들의 손을 잡고 싶다. 그들과 의지하며 우주의 시간을 나누고 싶다. 결코 외롭지 않을 이 세상을 향해 한 발 힘껏 대딛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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