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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진흙 ㅣ 창비청소년문학 71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창비 / 2015년 11월
평점 :
나랑 콜라보 하자며 주먹을 들이미는 CF가 생각났던 소설. 왕따와 학교 폭력의 문제로 전개되던 현실적인 이야기가 어느덧 환경, 에너지, 생명 공학, 과학자의 윤리 문제로 접근하여 멋진 콜라보를 이룬다. 미래의 어느 날인가 실제로 일어날 법한 사건 전개는 원제 <Fuzzy Mud>의 ‘fuzzy’처럼 상상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모호하다.‘난 만질 수 없지만’이라 안타까움을 주며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안겨주던 배우처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는 주인공들을 매개로 자유롭다. 긴박한 흐름에 침을 삼킬수록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빨라진다. 도무지 다음 장면이 예상 안 되었기에 그저 따라갈 수밖에.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구나 했다.
인간은 막연하게 느껴지는 따뜻함을 ‘온도’라는 숫자로 구체화했다. 분열법으로 불어나는 미생물이 점점 증가하는 숫자로 표시되니, 갑자기 훅 끼얹어지는 열기와 같은 두려움이 느껴진다. ‘2×1 = 2, 2×2 = 4’까지는 가볍게 넘어갔는데, 시간이 갈수록 커지는 숫자들이 작은 벌레처럼 꼬물거렸다. ‘2, 4, 8, 16, 32’까지는 괜찮았는데. 숫자가 ‘64’로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작은 소름이 돋았다. 흙 속에 사는 미생물도 실제로 수억 마리라는데. 소설 속 미생물‘에르고님’은 숫자를 통해 현실감을 건넨다. ‘1,073,741,824’. 단지 몇 번의 분열 만에 10억을 훌쩍 넘어가는 숫자라니. 괜히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팔뚝을 살펴본다.
타마야는 결손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이다.
‘그것은 두 삶을 오가는 것과 비슷했다. 반쪽짜리 삶 두 개. 그 둘을 합해도 온전한 삶 하나와 같지 않았다. 뭔가가 빠져 있는 것만 같았다.’(p100)
인간의 삶을 앞에 두고 숫자의 논리성은 자주 깨어진다. 결핍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 중 가장 용감하고 신중한 아이. 아이를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이 따뜻해서 마음이 뭉클해진다.
성선설이 옳은 걸까, 성악설이 옳은 걸까.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가끔 생각한다. 복잡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근원적인 본성을 이분법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성악설에 가깝다.
언젠가 들었던 심리학 실험 이야기가 있다. 평범한 사람들을 재소자와 간수, 두 그룹으로 나누어 가상의 감옥 체험을 하게 했더니, 간수 그룹에 속한 사람들이 재소자 그룹의 사람들에게 자신도 모르게 잔인한 행동을 하더라는.
왕따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매듭을 풀기 어려운 실타래 같다. TV에서 관련 문제에 대한 다큐를 볼 때마다 인간의 본성을 생각한다. 그냥, 재미있어서, 장난으로. 가해 학생들의 동기는 힘이 빠질 만큼 단순하다. 화나는 것을 넘어서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일까 회의가 느껴진다.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이 존재한다.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침묵하는 방관자.
‘걔들은 다 알고 있었어. (중략) 그런데 왜 아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왜 나를 지켜 주지 않았지? ’(p157)
작가는 피해자에게 묵묵한 메시지를 건넨다.
‘왜 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지키지 않았지?’(p158)
결국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우러나는 용기인 걸까.
관용, 청결, 용기, 공감, 품위, 겸손, 정직, 인내, 신중, 절제. 소설 속 우드리지 사립학교에 등장하는 덕목. 이 중에서 소설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덕목은 ‘용기’라 생각한다. 타마야가 채드를 구하러 간 것도, 망설이던 마셜이 숲 속으로 들어간 것도, 나쁜 상황을 두고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도 결국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호주와 세네갈에는 미세 조류의 번식으로 딸기 우유처럼 변한 호수가 있다고 한다. 작은 생물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날로 심각해지는 환경 문제에 청정에너지를 향한 관심이 미생물로 향하는 것은 이야기로만 그치는 상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인류의 희망이었던 미생물이 전염병이라는 재앙을 일으켰듯이, 대체에너지에 대한 접근은 신중해야 한다.
‘단지 작다고 해서 그들의 생명이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죠. ’(p20)
어른이 되어서 무언가를 개발하든, 회사에 들어가서 새로운 기획을 하든, 가까운 미래에는 소설 속 과학자들처럼 대체에너지를 찾기 위한 직업을 갖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만일 이들에게 ‘홉슨의 선택’(p217)을 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그 선택 기준은 인간이고 생명이었으면 한다. 마음의 중심에는 항상 ‘인간’이 있어야 하고, ‘생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 눈에 띄었다..
겉표지 그림이 본문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
p13에는 채드의 겉모습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는데, ‘짧게 자른 까만 머리’에 ‘눈은 파랗고 강철 같은 느낌’이다.
표지에 그려진 3명의 아이들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가운데 연두색 진흙을 손에 묻히고 있는 아이는 타마야, 오른쪽 안경을 쓴 아이가 마셜, 얼굴에 진흙이 묻은 파란 눈의 아이가 채드로 추정된다. 그런데, 까만색이어야 할 채드의 머리 색깔이 허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