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꽃 달고 살아남기 - 제8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ㅣ 창비청소년문학 65
최영희 지음 / 창비 / 2015년 4월
평점 :
'열여덟은 길을 떠나기에 적절한 나이’(책 뒷 표지, 정이현 소설가)라고 한다. 그렇다면 마흔 일곱은 무엇을 하기에 적절한 나이일까. 아님 이미 무언가를 하기에 늦어버린 나이인 걸까. 열여덟 살 주인공 진아는 꽃을 달고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는데, 사십 대 중반을 넘어선 나는 무엇을 달고 살아남을까.
책이란 참 묘하다. 청소년 문학이라고 해서 청소년만 읽는 것도 아니고, 동화나 그림책이라고 어린이들만 읽을 수 있는 게 아닌 것이. 읽을 때마다 인상 깊게 들어오는 느낌이 달라지는 점이 매력적이다.
초등학교 때 생텍쥐페리의『어린 왕자』가 나에게 남긴 것은 모자 모양의 보아뱀과 바오밥 나무였다. 중학교 때에는 여러 별을 여행하는 이야기라는 점을 인식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여우와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가 자리하다가, 대학생이 되니 여러 행성들에서 만난 독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읽는다면 어떤 이야기가 마음을 울릴까.
어린이 독서모임을 진행하면서 동화나 청소년 소설을 접하는데, 어른의 시각에서 본 책들은 놀라움을 안겨준다. 이렇게 심오한 의미가 이 짧은 동화에 담겨있다니! 어른들을 위한 책만 읽을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에 동화를 섞어보는 것도 썩 괜찮은 일이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주인공의 어릴 적 자아의 환상이 등장한다. 그는 이 자아를 늘 주변에 두면서 대화를 한다. 이 책에서 진아가 신우의 존재를 만들어 수시로 마음의 짐을 덜어내었듯이. 이들에게는 단순히 헛것을 보는 정신 분열로 테두리 지워지면 안 되는 뭔가가 자리한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함과 스스로 자신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의지가 엿보인다.
학창 시절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으면 정말 좋겠다. 그러면 내 슬픔과 외로움과 사소한 마음의 갈등조차 완벽하게 이해받을 수 있을 텐데’하는. 답답한 마음이 일어나는 순간이 올 때면 지금도 가끔 드는 생각이다.‘정신 분열’이라는 병도 어쩌면 너무나 간절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진아에게 꽃이 되어준 것은 무엇일까. 절친 인애, 물리 교사, 투명 인간 신우이거나 주변에 있는 동네 어른들, 길러준 엄마, 친엄마 꽃년이가 될 수도 있겠다. 아니면 우주에 있는 이름 모를 별빛이거나.
한 톨의 쌀에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이 있다.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한다면 그리 과장된 표현만은 아니다. 한 알의 씨앗은 햇살, 비, 바람, 흙, 공기, 농부의 손길, 수없이 많은 시간이 담겨있는 결과물이니.
어쩌면 한 사람의 꽃이 되어주는 것은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아닐까. 사람뿐 아니라 확장한 공간으로 이어지는 우주 너머의 무엇까지.
중간 중간 등장했던 우주에 대한 묘사가 참 좋았다. 작가가 의도했던 주제와 연관이 없을지 모르지만, 어차피 국어책을 공부하듯 분석하며 읽어야하는 것은 아니니까. 한 권의 책이 읽는 이의 어느 부분을 건드리느냐는 같은 이에게도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것이니. 예전의 『어린 왕자』가 그랬듯이.
우주에 대한 문장을 읽다보면 나를 둘러싼 크고 작은 고민들이 별 거 아닌 듯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은 내 자신이 우주가 되어버린 듯 착각이 들기도 했다. 누군가 그랬다. 사람의 몸 속에 사는 박테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도 하나의 커다란 우주가 되는 거라고.
짧은 인생의 깨달음을 전해 주었다는 ‘찰흙 인간’에 대한 묘사도 좋았다.
‘인생 잠깐이다. 언제까지 네가 말랑말랑할 거라 생각하지 마라..(중략)..내게 찰흙 인형이란 내가 그 무른 흙덩이를 떠나보낼 결심을 해야만 환성할 수 있는 존재였다.’(p58)
‘안타깝게도 나는 찰흙 인간의 말로를 알고 있다. 그들은 바싹 마르고 굳어서 바스러진다. 결국 모든 건 내 몫이다.’(p60)
그래, 결국 모든 건 스스로 감당하고 헤쳐 나가야 할 나의 몫인 거다.
물리 교사의 존재는 사람을 피상적인 모습만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이들의 순수한 영혼은 본질적인 모습을 너무나 쉽게 발견해낸다.
‘이건 미제로 남길 사건이 아니다. 답을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리고 하필 그게 나니까.’(p231) 진실을 똑바로 응시하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진아의 모습은 후련함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을 가져다준다.‘좋게 좋게’로 대부분의 일들을 덮어버리려는 동네 어르신들과는 대조적이다. 사회적 사건에 대한 어른들의 대처 방식은 포장을 벗겨보면 너무나 찌질할 때가 많으니까.‘4월 16일’을 언급한 <작가의 말>에서 나 역시 부끄러운 어른의 일부라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나는 내가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진실을 마주했다. 이제 남은 건 생존의 문제다.’(p234)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지는 가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다..(중략)..나는 이 여름의 끝이 어떨지 모르지만 뚜벅뚜벅 걸어서 갈 데까지 가 볼 참이다.’(p236)
살아가면서 제일 앞세워야 할 마음은 ‘용기’가 아닐까. 어두컴컴한 우주 안에서 빠르게 돌고 있는 지구의 용기에 묻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세상을 향해 스스로 바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용기 말이다.
답을 얻었다. 그래, 나는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용기’를 달고 살아남을 것이다. 무엇을 할까는 차츰 생각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