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 문도 - 제12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94
최상희 지음 / 사계절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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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여행을 가보고 싶어졌다. 여행 관련 서적이 아니었고, 여행에 대한 환상을 가질 만한 내용은 더더군다나 없었지만 왠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더랬다. 하긴 여행을 가서 보듯 다양한 삶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가 말한 것처럼 여행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나는 여행을 가본 적이 별로 없다. 먹고 사는 문제가 큰 당면 과제였던 어린 시절에는 돈이 없어 못 갔지만, 직장을 가진 다음에도 섣불리 걸음을 떼지는 못하였다. 미지의 장소에 대한 두려움에서였을까? 혼자 떠난 여행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는 것은.

 

 

여러 나라에서 제각기 다른 빛깔로 살아가는 아홉 명의 소년과 그 친구들 혹은 그들의 부모 이야기. 외국에서 살아가는 모습들은 특이한 풍광이나 제도를 제외하면 근본적인 삶이 우리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아홉 가지 삶의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질문과 생각거리를 던지고 지나간다.

 

<붕대를 한 남자>. 온몸에 불이 붙은 남자가 스스로에게 던졌다는 질문. 나도 1분 동안의 삶에 대한 의지를 위해 달릴 수 있을까? 전신 화상의 고통을 느끼더라도 살아있는 게 나은 걸까, 고통을 떠안고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음을 기다리는 게 나았을까. 평소 길을 걷다 언제든 죽어도 미련이 없다며 쿨 하게 말하곤 했는데, 극한 상황이 와도 삶의 끈을 놓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답이 어렵다.

 

<노 프라블럼>. 인도 카스트 제도의 불가촉천민에 관한 이야기. 인터넷으로 불가촉천민을 검색해보기 전까지 학창 시절에 배웠던 인도의 계급제도는 교과서 속에나 등장하는 이야기인줄 알았다. 드라마 추노에 나오던 조선시대 노예들이 없어진 지가 언제이며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접촉조차 못하는 천민이라니.

한 블로거의 글에서 입이 딱 벌어지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20081121일에 불가촉천민에 속한 15살의 한 소년이 상위 계급의 한 소녀에게 애정을 표현했다는 이유 하나로 집단 폭행을 당한 뒤 달리는 기차 선로에 던져져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이 책에 나오는 불가촉천민 쿤마르의 죽음과 같이 불합리하게 벌어지는 실상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글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일들이 세상 어딘가에서 분명히 벌어지고 있었다.

 

<내기>. 암에 걸린 아빠가 마지막으로 아들과 등산을 하며 대화를 한다.“뭘 자꾸 가르치려고 하는 거야?”“그러게. 이제 와서…….”(p97) 아들에게 줄 것이 별로 없음을 아쉬워하는 아빠의 마음이 먹먹하게 담겨있다.

내가 아끼는 주변 사람들은 이 다음에, 이 다음에미루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을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미루다 미루다 끝내 못하게 되는 크고 작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지나가는가.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찾아뵙지 못한 부모님이 생각났다. 이 글을 쓰고 나면 전화부터 드려야지 반성해본다.

 

<페이퍼컷>. 말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의사 표현이라는 건 반드시 음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텔레파시는 아니더라도 느낌을 통해 오가는 언어가 있다. 사람뿐 아니라 사물이나 세상이 걸어오는 말들이.

너무나 바쁜 세상을 살고 있다. 말로 표현해도 상대를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급한 세상. 한 호흡 멈추고 조용히 기다리며 마음이 걸어오는 말을 들어보고 싶은, 나무의 그루터기와 같은 느낌을 주는 이야기이다.

 

<missing>. 어린 시절 혼자 나섰던 작은 여행에 대한 기억. 잃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소년의 기억에는 클로이 할머니가 끓여주었던 스프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물컹한 그리움이 있다. ‘상실이라는 뜻과 함께 그리움이라는 의미도 가진 ‘miss’. 소년은 따뜻함을 그리워했던 것일까?

 

<기적소리>. 기차 길 옆에 살던 아이와의 추억. 내게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뭐가 있더라? 흩어져있는 몇 장의 사진을 찾듯 드문드문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들을 찾아본다. 마당 넓은 친구 집에서 뛰어놀던 기억, 해질 때까지 옥상을 오르내리며 숨바꼭질을 하던 기억, 가까운 냇가에 놀러가서 혼자 돌아오다 길을 잃어버려 한참을 헤매었던 일들이 생각난다. 그랬던가 희미한 웃음이 나오는 소담스런 추억이.

 

<필름>. 이국적으로 그려진 남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 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붉은 호수 라구나 콜로라다’, 라마, 플라밍고, 하얀 소금 사막 우유니부터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상상되는 낯선 나라의 밤하늘까지.

 

<무대륙의 소년>. 하루에도 몇 번씩 물에 잠기는 물의 도시 1층에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소년. ‘여행이란 거짓말을 믿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 결론짓는’(p212). 여행 책자나 지도에 담겨 있지 않은 어두운 이면을 묘사하고 있다. 물에 잠겨 차갑고 어두운 곳에서 잠들게 된 고양이와 소년의 모습이 어딘가 서로 닮아있어 마음 한 끝이 아릿하다.

 

<시튀스테쿰>. 수도원에 고아로 버려진 소년이 품게 되는 꿈. 빛이 그려놓은 그림을 좋아하는 소년과 높고 맑은 목소리를 가진 수도사와의 우정이 뭉클하다. ‘너에게 힘이 깃들기를이라는 뜻을 가진 시튀스테쿰’. 둘 만의 암호를 통해 두 사람은 서로에게 힘을 주는 존재가 된다. 나에게도 힘을 주는 존재가 있던가? ... 다행히 있다.

 

 

에스파냐어로 ‘Del Mundo’세상 어딘가란 의미. 세상 어딘가에는 여러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를 안고 살아가기도 한다.

내가 가진 상처만 커다랗게 보이던 때가 있었다. 저마다 상처를 가진 이들의 모습에서 나만 아팠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작은 위안이 가슴을 지그시 누른다.

제도적인 모순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모습이 안타깝다.‘평탄한 삶이 조금씩 조금씩 기울어서, 어느 날 문득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 인생’(p210~211)이라 했지만, 인생이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님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을 탈출하여 꿈을 찾아간 소년의 모습에서 작은 희망을 본다. 비굴의 시대에서 박노자가 한 말처럼, ‘그래도, 그래도 마지막에 죽는 것은 희망일테니.

세상을 향한 두려움을 떨쳐내고델문도를 찾아 한걸음 떼고 싶다. 나의 펜은 그 세상 어딘가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 어딘가를 따라 움직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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