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항 ㅣ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29
이강산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2월
평점 :
칙칙한 동남아의 거리를 묘사한 독립영화를 본 듯했다. 컬러로 찍어도 왠지 흑백의 장면처럼 인식되는. 두 번의 사진전을 가졌다는 저자의 약력을 보고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하! 시를 통해 전해졌던 느낌들이 사진으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이 사람은 사진으로도 시를 쓰는 구나.
소설에 대한 리뷰는 일관된 주제와 소재를 중심으로 나의 생각을 전개하면 그만이지만, 다양한 장소와 그 이상의 사람들이 등장하는 시에 대한 리뷰는 어떻게 써야 할까?
처음 읽었을 때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자주 등장해서 살짝 한숨이 나왔다. ‘글을 말이지, 사람들이 좀 알아듣게 쓸 것이지.’속으로 투덜거렸다. 두 번째 읽었을 때에도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시들은 있었지만 시가 전하고자 하는 분위기는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다.
그의 시에는 ‘사람’이 있다. 건강하고 환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니라, ‘12월 마지막 남은 달력처럼 얇아진’노인과 ‘장수하늘소’처럼 두 팔 치켜든 밥집 아주머니와 ‘머리카락이 손가락을 가는 숫돌’이 되는 허름한 시골 미용사가 등장한다. ‘시’라는 장르는 참 매력적이다. 시 안에서 사람은 영화 <터미네이터>의 액체 인간처럼 달력도 되었다가 곤충도 되었다가 심지어는 호수도 되어버리니. 빙산의 일각처럼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얼짱 훈남 보다 사실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흔하게 살아가는 평범하고 초라하며 아픈 이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든다. 연탄구멍을 맞추는 장면에서는 어렸을 때 번개탄을 피우느라 눈물 콧물 쏙 뺐던 순간이, 변두리 골목길, 비 새던 방안 천장, 커튼처럼 방문 앞에 쳐진 두꺼운 담요 앞에 꽁꽁 얼던 걸레가 생각났다.
시 속의 계절은 주로 겨울, 여기에 호수와 바다가 얽혀 더욱 춥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붉게 도드라진다. 시집이 제목처럼 <모항>이 되어 사람들을 하나 둘 ‘시’라는 배에 실어 떠나보내는 듯하다. 전체적으로는 춥지만, 사람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따뜻하다.
모과도 자주 등장한다. 표지 안쪽에 실린 사진에서 ‘웬 감자 냄새를?’이라 생각했던 덩어리의 정체가 모과였음을 시집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사람들을 위한 약재로도 쓰이는 과일. ‘평범’이라는 꽃말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얘기하는 저자와 참 잘 어울리는구나 싶다.
140페이지도 안 되는 시집인데도 내 어린 시절과 요즘에도 간혹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장면들이 자주 떠올랐다.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걸러지지 않은 우리 주변의 삶들이 시 안에 묵직하다. 처마 끝에서 툭툭 듣는 빗방울처럼 가슴속을 건드린다. ‘아픈 이를 찾아가는 길은 길이 먼저 아프다’(p42)는 저자는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며 바라보는 글을 적는다.
여러 편의 시들 중에는 <허공을 끌고>라는 시가 가장 마음에 남는다. ‘가슴 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p94) 추사 김정희가 말했다는데, 좀 더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 가슴 속 문자는 오천 권은커녕 몇 백 권도 없이 비루하기만 한데 언제쯤 되어야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가슴의 책장을 열고 빈 책을 무겁게 느끼고 허공의 무게를 감지하는’ 작가로서의 고뇌가 느껴진다.
‘내 안에 우주 하나를 들이는 일인 줄 알았던들’(p84), ‘남의 생 빌려 빈칸 함부로 채우지 마라.’(p29) 모든 생명은 하나의 우주라는 데, 글을 쓸 때 신중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제 깜냥만큼 물을 채우고 버릴 줄 안다.’(p81) 내 깜냥은 어느 만큼일까? 더 많은 물을 채우려면 그릇을 넓혀야 하리라. 곤충이 탈피하듯 성장의 고통을 감내해야겠지. 욕심 부리지 않고 버릴 줄도 아는 과감한 마음도 필요하겠다.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던 시간이었다. 시를 쓰는 시각과 방향을 제시해준 시집이었다. 사실 시 뿐이랴? 사진이든 노래든 다른 문학 작품이든 사람이 담겨야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을.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니까.
※ p94, 오타로 추정되는 글자^^; : 산정에 오늘 때마다→ ~ 오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