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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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겨울이 무서웠다. 어릴 적 내게는 무섭다기보다는 몸서리치게 자리하는 계절이 겨울이었다.

없는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여름이 낫다. 더우면 벗어버리면 되니까. 제 걸친 것 자신의 의지대로 덜어내면 그만이니까. 덜어낼 무엇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간혹 이들에게 위안을 준다.

추우면 뭔가를 덮어야 한다. 더 이상 덮을 그 무엇이 없을 때에는 무기력한 상실감이 몰려온다.

 

방문만 열면 밖의 공기가 들어오는, 겨울이면 방 안의 걸레가 꽁꽁 얼었다. 여섯 식구가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시린 코끝을 데웠다. 언니, 동생과 끝말잇기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좁은 집을 가득 메우고 있던 연탄가스냄새. 겨울이면 선택을 해야 했다. 내게 있어 겨울은 추위와 연탄가스냄새와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꽤 오랫동안 우리 집의 구조는 단순했다. 1, 부엌 1, 주인집과 같이 쓰는 재래식 화장실 1. .

시린 겨울바람과 연탄가스냄새가 그 때의 기억과 함께 훅 끼얹어온다. 그리고, 그 기억 한가운데에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신 어머니가 있다.

 

나나의 내면에서 그 부분은 잠잠한 듯 보여도 끊임없이 떨고 진동하는 곳’(p119)

담담하게 말하는 나나를 통해 중간 중간 울컥하고, 눈이 시큰해졌다.

요강, 만두, 목욕탕, 이상한 구조의 집. 경험했던 단어가 안고 있는 이야기들은 내게로 다가와서 옛 기억을 끄집어냈고 감성을 끊임없이 두드렸다. 나나가계속해보는이야기들은 책을 읽는 내내 징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내게도 잠잠한 듯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던 부분이 들어있던 것일까?

 

우리 집도 예전에는 요강을 사용했다. 대변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한겨울밤에 밖으로 나가 멀리 떨어진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한다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아침이면 어머니께서는 요강을 제일 먼저 비우셨다. 밤새 식구들이 번갈아 앉았던, 출렁출렁 넘실대며 진동하던 그 냄새.

요강을 채우는 사람과 비우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모세씨는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p115)

어느 정도 컸을 때는 간혹 나도 비우곤 했지만, 대부분의 날들에 그것을 비우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도저히 모르겠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게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 아무도 제대로 생각해주지 않으니까, 그런 게 거기 있는 거고,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는 거잖아. 그게 뭔지는 몰라도 그게 뭔지, 제대로 생각해야지, 제대로’(p116~117)

왜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어머니라는 이름에 감당하기 버거운 무거움이 매달려 있다는 것을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목욕탕이 있는 집은 감히 꿈도 못 꾸었다.

겨울이면 우리 식구는 한 달에 한 번씩 목욕탕 가는 날을 정해 우르르 그곳으로 갔다. 평소 집에서 씻는 부위는 옷 밖으로 드러나는 얼굴, , , 머리카락. 옷으로 가려지는 나머지 부위는 목욕탕에나 가야 씻어볼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안방에 빨간 고무다라를 놓은 후, 세숫대야 몇 개에 헹굴 물을 담아놓고 때를 밀어주셨다. 더 이상 넘치는 다라의 물이 감당 안 되게 컸을 때는, 입식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물을 끼얹었다. 나는 자주 씻을 수 있는 여름이나 따뜻한 바람이 부는 봄이 그래서 좋았다.

저마다 커다란 탕 주변에 빙 둘러 앉아 묵은 때를 벗긴 날에는 벌겋고 반질거리는 얼굴과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으로 말끔한 세상을 맞이했다. 가족끼리는 서로 돌아앉아 등을 밀어주었고, 어느 정도 큰 다음에는 난생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등을 내맡겼다. 날마다 샤워하며 가끔 요가 자세로 등을 밀곤 하는 지금은 느껴볼 수 없는 시원함이 당시에는 있었다.

 

아빠 생신이 있는 1월 중순 경이면 온가족이 둘러앉아 만두를 빚었다. 추석이면 송편도 빚고, 초겨울이면 동네 아주머니 몇 분들 옆을 기웃거리며 절여놓은 김장 배추 속을 뜯어먹었다.

어머니께서는 송편을 참 이쁘게 빚으셨다. 송편을 이쁘게 빚으면 이쁜 딸을 낳는다더니 맞는가 보라고. 우리들은 서로 추켜세우면서 깔깔 대며 웃었다. 찜통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가슴 아픈 기억도 있다.

수도꼭지에서 언감생심 더운 물을 기대하기 어려웠기에 어머니께서는 늘 새벽 5시에 일어나 커다란 솥을 연탄불 위에 올려놓고 가족들이 씻을 물을 데우셨다. 다 데워진 물은 커다란 찜통에 옮겨 담고 세상을 나가는 식구들을 위해 또 다시 물을 데워주셨다.

커다란 솥, 뜨거운 물, 찜통, 다시 커다란 솥, 뜨거운 물.

국진이네 세 들어 살던 집에서였다. 어느 날, 솥을 들어 옮기시다가 뜨거운 물이 쏟아져 발등을 데이고 마셨다. 정확히 발등이었는지, 손등이었는지, 솥을 들다가 그러셨는지, 찜통에 물을 옮기다 그러셨는지 어렴풋하다. 궁금했지만 차마 여쭤보지 못하는 기억. 눈곱만큼 튀어도 움찔 놀라게 되는 뜨거운 방울들. 도대체 몇 방울의 기억이 당신의 몸에 담겨있는 것일까? 상상할 때마다 가슴 한 끝이 아린 기억이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머니는 이것저것 안 해보신 일이 없었다. 파출부, 공장일, 공양주, 홀 서빙, 인형 눈 붙이기, 밤 깎기, 봉투 붙이기 등.

인근에 있는 절에서 밥을 해주는 공양주로 일하셨을 때, 어머니는 절에서 사용하고 남은 밥을 싸오셨다. 많은 기간 우리는 부처님의 밥을 먹고 자랐다. 그 밥으로 하루 2개씩 싸야 하는 내 것을 비롯해 다른 형제들의 도시락을 싸주셨다. 간혹 뚜껑을 열면 살짝 쉰 듯한 냄새가 났던 밥. 그래서 물을 말아 김치와 먹었던 그 밥.

순자 아줌마가 나나와 소라가 먹던 상해버린 떡을 끝까지 삼키고 아줌마 집에 있는 밥과 바꾸자는 장면에서 나는 고등학교 때의 어느 하루를 떠올렸다.

야간자율학습을 하기 전 그 날 저녁에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삭은 냄새가 확 나서 도저히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밥을 안 먹었던 기억은 확실한데,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처리 했나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깔끔하게 버리고 다 먹고 온 듯 시치미를 떼었겠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일관적으로 거의 없는 융통성은 아마 그대로 집에 가져가지 않았을까 생각하기 싫은 짐작을 하게 만든다.

 

뭉클하고 시린 기억들 사이에는 잔잔히 밀려오는 따뜻한 순간도 있다.

직접 쪄주셨던 빵, , 곶감 동동 뜨던 수정과, 밥알 동동 식혜, 참기름 냄새 고소하게 풍기는 김이 담긴 분홍색 통.

어머니, 아버지의 화투 내기에 우리들은 양편으로 갈라져 속으로는 아무나 빨리만 이기게 해주세요.’라 주문을 외며 과자를 기대하고 당신들을 응원했다. 아랫목에서 중심을 잡고 누워계시던 아버지의 이불 주위로 꼬물거리는 발가락을 집어넣고, 연말이면 스케줄을 짜가며 가요 경연이나 각종 시상식을 섭렵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며 재잘거렸던 기억들은 늘 내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이상한 텔레비전 시청. 그것은 시청이라고 해야 할지 대화라고 해야 할지. 나나도 언젠가는 텔레비전을 향해 말하게 되는 걸까...(중략)...어쨌든 남이 아닌 사람들. 보통의 가족이란 그런 걸까.’(p148)

남이 아니라는 이유로 남보다 못한 관계로 얽힌 사람들의 풍경. ‘가족의 의미가 묵직하다.

 

그 가족의 중심에 있는 어머니’. 가족 속에서 희생되는 한 존재를 생각한다. 책 안에는 많은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 사랑을 잃고 자식마저 외면한 채 무력감에 빠진 어머니 애자, 남의 집 자식들을 제 자식처럼 돌보며 집밥의 기억을 심어준 어머니 순자, 그리고 그들의 영향으로 자라나 또 다른 어머니가 되려하는 미래의 어머니 나나.

가끔 나의 어머니를 깊이 생각한다. 지금은 해탈 마인드로 즐겁게 살아가시지만, 나는 이따금 내 어린 시절의 어머니를, 내 기억을 따뜻하게 데워주시던 당신을 생각하곤 한다.

너무 소중하게 너무 열심히 들어서 기억에 남지 않고 몸이 되어버린 거야.’(p9)

내게는 기억이지만 당신에게는 삶 그 자체였을, 몸 한 구석 어딘가에 쓰라린 기억의 세포가 남아있을 지도 모를 나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아이를 낳고 부모로서 영향을 주고 그 아이가 뭔가로 자라가는 것을 남은 평생 지켜봐야 한다는 거…… 계속 걱정해야 하는 뭔가를 만들어버린다는 거…… 무섭지 않아?’(p122)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버린 나도 가끔 두려운데, 그 시절의 당신도 그런 생각이 드셨을까? 딸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존재가 되기까지 당신의 몸에는 얼마나 많은 삶의 흔적들이 스며들어 왔을까?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p227)

책 속에는 어둡고 결핍되어있는 자신을 무덤덤하게 그려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버텨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감히 하찮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을 몸으로 입고 있다.

 

계속해보겠습니다처음 보았을 때, ‘당최 뭘 해보겠다는 건지라며 코웃음 쳤던 제목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깨닫게 된다.‘계속 해보겠습니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보겠습니다라는 삶의 의지를 표현한 말이 아닐까?

 

무의미하다는 것은 나쁜 걸까....(중략)...세계의 입장에서는 무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덧없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p227)

삶에 있어 의미 없는 순간은 없다. 주인공들의 삶도, 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단편적인 경험의 기억들도 그래서 모두 의미 있고 소중하다. 경험은 사람의 몸을 이루며 그를 성장하게 한다. 삶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는 한 그의 삶은 더 이상 무의미하지 않다. 삶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무게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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