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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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아저씨 게임’이란 게 있다. 나무 와인통처럼 생긴 몸통 옆구리에 군데군데 홈이 파여져 있고 플라스틱으로 된 칼을 번갈아가며 찔러 넣다가 어느 한 순간 가운데에 심어진 통아저씨가 위로 튀어 오르면 지는 게임. 언제 통아저씨가 튀어나올지 몰라 가슴을 졸이면서 칼을 찔러 넣었던 기억이 있다.

480쪽이나 되는, 결코 적지 않은 분량으로 첫 장을 넘기려는 손을 압도했던 책. 마음에 와 닿은 문장이 많아 밑줄을 그으면서 천천히 내용을 음미했다. 책을 읽고 나서는 줄친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정리해 놓고 보니 48개의 화두는 거의 일관된 얘기를 하고 있는 듯 했다.

뜬금없이 어릴 적 가족들과 즐겨했던 이 게임이 생각났다. 이야기의 소재는 다양했지만, 동심원을 보는 것처럼 결론은 하나의 중심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느 하나를 통해서도 통아저씨가 튀어 오르는 순간처럼 깨달음에 도달할 수도, 마지막까지 다 찔러 넣어도 도달을 못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강신주의 책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좋아하는 쪽은 거의 모든 책을 섭렵하고 예약 구매를 할 정도이고, 비판하는 쪽은 너무 깊이가 없고 쉽게 쓴다고 말한다. 나는 전자에 가까워지는 중이다.

예전부터 어려운 책은 집어던져 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대체할 수 없는 신개념의 전문 용어라면 몰라도 어떤 이론도 확실히 안다면 초등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라고 생각한다.

깊은 것이 좋은 것인가? 소수의 사람만이 아는 그 심오함의 바닥에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것이 있기에? 배움의 깊이가 얕은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지식을 폄하하는 행위인가? 모든 글의 목적은 결국 인간 내면을 울리기 위함이 아닌가?

 

나는 종교가 없다. 당연히 불교 이론이나 난해한 불경은 접해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 불교를 믿으시는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서 스님의 말씀을 몇 번 들었던 것, 어린이 법회에서 ‘반야심경’을 외우면 뭔가를 주신다 길래 뜻도 모르면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줄줄이 읊조렸던 기억이 전부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몰랐던 불교 용어를 많이 접하게 되었다.

혹자는 ‘무문관’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모르고 읽는 이들에게 그릇된 편견을 심어줄 수도 있다 말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완벽하게 객관적인 글은 없다. 지식의 바다는 무한히 넓기에 어떤 내용의 모든 면을 다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석고상을 스케치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보이는 모습을 그린다. 그 모습은 옆모습일 수도 있고 뒷모습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의 그림은 각자의 위치에서 보여 지는 진실이다.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보는 사람의 입장이나 생각에 따라 달리 보이듯이 강신주의 글도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신주의 시각에서 순서를 재배열하고 해석을 한 것을 나는 내식대로 다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2주 내내 커피 맛을 음미하듯 내용을 맛보면서 아주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아름다운 꽃을 그리려면 그 꽃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처럼, 불행한 자신을 이야기하는 나는 순간적이나마 불행한 자신이 아니게 됩니다.(p152)’

외로움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는 중간 중간 시를 썼다.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라는 이성복 시인의 말은 따뜻한 위안이 되었다. 내가 쓴 글은 스스로 스며드는 마음을 토닥여주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해야만 하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에도 침묵해야만 합니다.(p285)’

침묵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을 읽고서는 한동안 침묵을 하며 주위에 귀를 열기도 했다. 마음이 평온해졌다.

‘에베레스트 산을 올라갔다가 평지로 내려온 사람과 계속 평지에 머물렀던 사람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p363)’

한자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에 가깝기에 48칙의 그 어떤 것도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지만, 내 안 깊은 곳에서 뭔가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정직하게 ‘나’로서 보낸 시간이었다.

 

48개의 화두가 가리키는 하나의 중심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내 삶의 주인이 되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문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떠랴! 그냥 나는 나대로 주인이 되어 나의 세상을 살아가면 그뿐인 것을.

어쩌면 그 ‘문’이라는 것은 각자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밖에서 깨면 계란프라이가 되지만 안에서 깨면 새로운 생명체가 되는 알처럼, 스스로가 ‘문’을 만들기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이다. 문이 생기면 스스로 열 수 밖에 없고, 문을 만들지 않으면 세상을 향해 자유롭게 열리게 되는 것이다.

 

‘세계는 모든 인간에게 참되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마다 다르다.(…)사실은 단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몇 백만의 세계, 인간의 눈동자 및 지성과 거의 동수인 세계가 있고, 그것이 아침마다 깨어난다...프루스트(p135)’

같은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면서도 저마다 느끼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이 경이롭다. 그리고 이 모든 경이로움의 끝에는 제 스스로 주인인 사람들의 존중되어야 하는 삶이 존재한다.

‘자기만의 본래면목을 찾아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자리’라면, 타인에게 그만의 본래면목을 찾아서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바로 ‘이타’라는 것이지요.(p361)’

 

책을 읽는 동안 뮤지컬 ‘모차르트’를 보고 왔더랬다. 주인공이 부르던 ‘나는 나는 음악’의 노랫말이 생각난다.

『난 시인이 아냐/ 또 시인처럼 말도 못해/ 그저 떠오르는 대로/그저 내 마음 가는 그대로

난 화가도 아냐/ 빛과 어둠 아름다움도/ 그려내지는 못해/ 난 꿈속에서만 희망 그리지

나는 배우도 아냐/ 난 연기 할 줄 몰라/ 나 가식 없이 살고 싶어 있는 그대로/ 있는 내 모습 보이기를 원하네/ 이런 나의 모습을

나는 장조 나는 단조 나는 화음 나는 멜로디/ 나의 단어 나의 문장 나의 느낌 나의 리듬 음악속에/ 나는 박자 나는 쉼표 나는 하모니/ 나는 포르테 난 피아노 춤과 판타지

나는 난 난 음악

난 음악 없는 삶은 상상 할 수 없어

난 철학자 아냐/ 아무 것도 난 모르지/ 웃고 떠들썩한 그 곳에 난 항상 거기에 있지

난 예의도 몰라/ 무례하다는 말 듣더라도/ 지루한건 정말 질색이야/ 싫어 난 평범한 삶 따윈 필요 없어

내 마음 터질 것 같아/ 난 자유와 영광 찾아/ 어디로 가야 하는 지 알 수 없더라도/ 나 떠나가리 그 어디라도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 날 사랑해줘...』

 

있는 그대로...‘타타타’.

이 책을 통해서 얻은 나의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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