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 씨, 출근하세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어린이책 작가 모임(더작가) 지음 / 사계절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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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엔 좀 애매했다. 학창시절 순정만화 마니아였던 나를 순정만화가 아닌 만화로 재미와 동시에 경이로운 감동을 주었던 만화 『울기엔 좀 애매한』(최규석, 사계절, 2010)을 연상시키는 책이다. 무거운 주제가 가볍게 들어와 마음을 자꾸 당기는 듯한, 부드럽고 담담하게 그려내는 현실의 모습이 오히려 날카롭게 스며드는 느낌을 안고 이야기들을 마음속에 담았다. 지금껏 내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 이 책을 읽으면서 깨져버렸다. ‘비정규직’에 관련된 이야기는 무겁고, 안타까우면서 암울한 색깔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는……. 그래서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가장 웃기면서도 가장 뭉클하다.

‘사람은 분노가 아니라 웃음으로 남을 죽인다.’(프리드리히 니체)는 말처럼 웃음의 힘은 위대하다. 그것이 풍자나 해학의 형태를 띤다면 심각하고 무거운 서술보다 훨씬 큰 효과를 발휘하고, 그 힘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나 UV의 노래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처럼.

어린이 책이지만 어른들을 위한 책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비정규직 관련 용어도 깔끔하게 정리되어있고, 사진 찍듯이 묘사된 현실적인 글들이 생생하게 와 닿는다. 이제까지 읽었던 비정규직 관련 책 중에 감히 최고라고 말하고 싶다. 한 곡의 노래를 듣고 노래를 부른 가수에 반하게 되듯이, 이 책을 읽고 나는 ‘더작가’의 팬이 되었다.

  

내가 비정규직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던 때는 2010년 가을이었다. 그 즈음 동네의 상가에 있는 슈퍼가 거대한 슈퍼에 인수되어 일하시던 분들이 대거 바뀌어버린 일이 있었다. 당시의 나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에 이분들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써서 독서모임에서 같이 얘기를 나눈 기억이 있다.

 

《“이제 사모님 얼굴 보는 것도 마지막이네요.”

오랜만에 아파트 상가 슈퍼에 갔다가 생선 파는 아저씨를 만났다.

“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 그만 두세요?”

“이곳이 L슈퍼로 넘어갔잖아요. 4일까지 물건 값 세일하니까 서둘러 가져가세요.”

“여기 계셨던 분들은 전부 다른 데로 가시는 건가요?”

“예. 모두 그만 두어야 하구요, 7일부터는 L슈퍼 직원이 들어와요.”

“그럼, 어디로 가시는 건데요?”

“글쎄요……. 차차 생각해봐야죠.”

아저씨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셨다.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아파트 상가에 있는 지하 슈퍼에서 장을 보았다. 처음에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서 없는 물건이 종종 있었다. 썩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우리 동네에서는 가장 컸기에 그곳으로 다닐 수밖에 없었다. 대형 마트에서 볼 수 있는 카트가 없어서 물건을 많이 살 때면 플라스틱 바구니를 낑낑 거리며 계산대로 들고 가곤 했다.

올 봄 즈음 지하 슈퍼는 새 단장을 했다. 며칠 지나고 가보니 산뜻한 세부 간판으로 실내가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진열된 물건이나 시설이 그리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겉만 바뀌면 되나? 속이 바뀌어야지.’나는 속으로 살짝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몇 달이 지나니까 슈퍼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차츰 정이 들었다. 주인으로 추정되는 아저씨는 주로 밤늦게 슈퍼의 계산대를 보셨고, 내가 갈 때마다 “늦으셨네요?”라며 꼬박꼬박 인사말을 하셨다. 배달을 해 주시는 분은 키가 큰 아저씨였는데, 나를 볼 때마다 우리 동네 제일의 미인이 오셨다고 추켜세우시곤 하셨다. 상술이었겠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둘째 아이와 같이 슈퍼에 들를 때면 시식용으로 깎아 놓은 과일 조각이나 사탕을 아이에게 건네주시곤 하셨다. 생선 파는 아저씨는 내가 대하나 낙지를 자주 사는 것을 아셨기에 좋은 것이 들어오면 얼른 와서 귀뜸을 해 주시고 가격을 살짝 깎아주셨다. 과일 담당 아저씨는 키위를 고를 때면 “그건 어제 재고예요. 이거 가져가세요.”라며 좀 더 좋은 과일로 골라주셨다. 카운터를 보시는 아주머니들은 늘 웃음을 지으며 말이 없는 내게 한 마디씩 말을 건네시곤 하셨다. 퇴근 후 슈퍼에 다녀오는 일은 힘겨웠지만 그분들로 인해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받는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생선 파는 아저씨와 얘기를 나눈 이후로 한동안은 지하 슈퍼에 가지 않았다. 갑자기 바빠진 일상 때문에 소소한 물건들은 집 주변에 있는 작은 슈퍼에서 구입을 했다. 그렇게 상가 슈퍼의 존재는 잠시 내게서 잊혀졌다.

 

일주일가량이 지났다. 오랜만에 지하 슈퍼로 갔다. 그런데, 그곳에 들어선 순간 생선 파는 아저씨의 말이 생각났다. 슈퍼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진열된 물건마다 큼지막한 가격표가 붙어있었고 매장의 크기에 비해 과도할 정도로 직원의 수가 많았다. 슈퍼 바깥에는 포장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새 것으로 보이는 카트가 일렬로 줄을 맞춰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물건도 훨씬 싸고 개수가 많았다. 2~3개가 한 묶음으로 되어있어 물건을 사려면 필요 이상의 수를 사야한다는 점이 약간 불편하긴 했지만, 그것조차도 가격이 워낙 저렴해서 가계에 이득이 되는 듯 했다. 입구에서 물건을 계산하니 아주머니 한 분이 나타나셔서 배달될 물건을 상자에 담아 포장을 해 주신다. 가까운 대형 마트에 온 것처럼 너무나 편했다. 새로운 L슈퍼에서는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가격표가 붙어있는 물건을 집어서 말없이 장바구니에 담기만 하면 되었다.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물건도 많고 사람도 많았지만 마치 다른 곳에 온 듯이 지하 슈퍼는 낯설었다. 예전의 사람들과 지금의 L슈퍼의 모습이 묘하게 겹쳐졌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만 빈곤의 격차가, 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거대한 자본이 가지고 있는 힘의 논리가 적용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내 주변에서도 그런 종류의 일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컴퓨터 게임의 과정에서 새로운 스테이지로 자리가 옮겨진 것처럼 바뀌어버린 슈퍼의 모습에서 삭막함이 느껴졌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물건 사이로 간간히 흐르던 따스한 정이 한꺼번에 스르르 빠져나가 버린 것 같아 안타까웠다. 무거워진 발걸음에 무거워진 마음을 매달고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왔다.》

 

그분들 생각이 다시 새록새록 난다. 다들 어디로 가버리셨을까? 더 좋은 직장으로 가셨으리라 애써 생각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이 다시 무거워진다. ‘정말 그래도 될까?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정말 그래야 하는 걸까?(p5)’…….

 

머리말을 다시 읽어본다.‘우리는 정말 괜찮은 걸까?’(p6) 그래도 ‘이렇게 물을수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좋아질지 모른다고, 그런 기대로 이 책이 세상에 나왔다고(p6)'말하는 김해원 작가의 말에 슬며시 나의 기대를 얹어보련다. 164쪽의 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여러 작가들과, 이 책을 읽고 나처럼 뭉클한 느낌을 갖는 사람들과, 부족한 나의 리뷰를 읽고 이 책을 읽어보려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모인다면 자그마한 변화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사람의 몸이란 마음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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