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사랑
전경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한 권의 책이 ‘의미 있었다’라 말하게 하는 최소한의 것은 무엇일까? 책이 보여주는 색깔이 평소 좋아하는 것이 아니어도,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단 한 줄의 문장이나 스스로에게 되묻는 질문이라도 마음에 들어온다면 그것만으로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내게 의미 있게 다가온 책이었다.

깔끔한 표지는 마음에 들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다소 답답하게 흐르는 이야기, 독립 영화나 프랑스 영화를 생각할 때 연상되는 무채색의 배경, 그 안에서 비슷한 느낌을 주면서 섞여 있는 여러 이야기들, 주인공을 비롯해서 주변 사람들의 상처받은 삶이 느리고도 습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읽는 내내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최소한의 사랑’이라는 제목이 강렬했던 탓일까? 참 묘한 것은 이 책을 읽어가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조금씩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무심코 넘어갔던,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갔던, 때로는 의도적으로 생각하기를 거부했던 관계들까지도……. ‘관계를 정의하는 최소한의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계속 머물렀다.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지. 자기의 사랑을 지키는 사람과 자신의 미움을 지키는 사람. 그리고 아무것도 지키지 않는 사람.(p78~79)'

아무것도 지키지 않는 사람…….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도 있지만, 어쩌면 세 단계를 거치면서 변해가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 사랑을 지키고자 한 사람, 그러다 미움을 품게 된 사람, 시간이 흘러 아무 것도 지킬 수 없게 된 사람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만큼 스스로 아픔을 품게 된다고는 하지만 아무 것도 지킬 수 없는 무감각함이 오히려 더 큰 아픔이라는 생각이 든다. 2도 화상의 아픔보다 감각조차 느낄 수 없는 3도 화상이 더욱 큰 상처인 것처럼.

한 사람에게 얽혀있는 수많은 관계들도 세 가지 유형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사랑으로 지키고 싶은 사람, 미움으로 머무는 사람, 아무 것도 지키지 않게 되는 사람.

 

내 핸드폰의 ‘친구’폴더에는 2명의 전화번호가 들어있다. 그 중 한 명은 내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 친구이다. 먼저 얘기하지 않으면 절대로 묻지 않기에 어쩌면 그저 그런 관계의 사람들보다 나에 대해 모를 수 있지만, 그 점이 오히려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오묘한 관계이다.

직장에서 만났기에 처음부터 그 친구가 ‘친구’폴더에 들어왔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기타’에서, 다음에는‘직장’으로, ‘동호회’로 가더니 ‘친구’폴더까지 와버렸다. 언제부터였을까? 인간관계는 아날로그적이므로 분명 전환되는 시점이 있었을 텐데 서서히 색깔이 변하는 노을처럼 마음이 점점 물들어가게 된 걸까?

드러내는 만큼의 아픔만을 바라보고, 드러내고 싶지 않는 아픔의 시간은 웃음으로 같이 위로해주는, 같이 있으면 편안함을 주고, 떨어져있어도 애절하게 그립지는 않은 친구. 학창시절에 들었던 말이 정말로 맞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우정은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처럼 투명한 ‘무색’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알게 된 지 7년 쯤 되었을까? 며칠 전, 그 친구가 내게 처음으로 질문을 하면서 대화가 길게 이어졌다. 나는 그 질문에 덤덤하게 답을 했고, 우리는 좀 더 많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과 평소 좋아하는 책의 장르, 작가, 그 작가의 작품들, 음악, 가수, 스타일, 굳이 감추려하지 않았지만 아무 것도 지키지 않게 되는 사람들, 이제는 무덤덤하게 답할 수 있는 관계들에 대하여. 말을 하다 보니 그날 직장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도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이상한 날이었다. 지난 7년 간 나누었던 대화보다 더 많은 말들이 오간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친구의 마음 가까이에 한 발짝 다가선 듯했다. ‘사람의 머릿속에는 저마다 깊은 우물에 종이배 하나가 까닥까닥 떠 있는 게 아닐까.(p16)' 일부러 외면하고 내팽개쳤던 마음이 조금씩 떠올라 종이배처럼 까닥거렸다.

근처 악세서리 가게에 가서 내 머리띠도 사고, 생일 선물로 미리 머리띠도 사주었다. “내 생일 선물은 알아서 구체적으로 정해서 알려줄게~! 아예 내가 사서 비용 청구할 수도 있어~.”“오우~! 그런 거 완전 좋아~!”낄낄대면서 서로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 이런 말을 맘 편히 할 수 있는 사이인 것이 너무 좋았다. 어떤 것이 이쁜가 이것저것 해보고, 이리저리 거울도 쳐다보고, 괜찮냐고 물어보는 행동들이 어색하고도 즐거웠다. 악세서리 가게 앞집에서 파는 순대도 같이 먹고, 생크림을 듬뿍 넣은 커피도 마셨다. 어렸을 때는 물건을 사러갈 정도로 가정이 넉넉지 못했고, 그런 물건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직장을 잡아 돈을 벌게 되었을 때는 일상을 공유할 만큼 가까운 친구가 없었더랬다. 그 친구는 알까? 내게는 여자 친구와 이런 물건을 같이 사본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다음 날, 다시 그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요즘은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많네. 지금 가도 돼?”“그럼! 맛있는 거 사 줄께!”사실 야간 운전을 할 때에는 눈이 다소 침침해져서 집으로 돌아가는 밤길 운전이 늘 긴장되기는 하지만, 그 친구는 종종 그런 걱정을 넘어서게 한다. 보고 싶다는 쑥스러운 마음을 스트레스로 포장해가서 만족스러운 양과 질을 지닌 쟁반짜장도 먹고, 복잡하게 얽힌 직장 일도 풀고, 음악도 듣고, 책도 읽었다. “커피 마실래?”“음~ 뭐 마실까?”“뭘 생각해? 또 캬라멜 마끼아또에 생크림 듬뿍 얹은 거 먹을 거면서…….”그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헉! 어떻게 알았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했다. ‘내게 있어 이 친구는 어떤 의미일까?’책에서 읽었던 또 다른 문장이 생각났다. ‘꿰매야 할 것…….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닐까.(p81)' 이 친구는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을 조금씩 꿰매어주고 있었다.

언제든 전화하면 그 자리에 있는 친구가 많이 고맙다.

‘나는 모든 문제를 최소한의 것들을 되찾게 해서 풀지요. 난마처럼 얽히는 이 많은 고통과 상처가 실은, 가장 최소한의 것을 지키지 못해 생기거든요.(p342)'

나와 그 친구를 ‘친구’이게 하는 최소한의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든‘친구’폴더에 담겨있는 그 친구의 전화번호처럼 내 마음의 폴더에 담아 오래도록 지켜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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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소년 2012-09-25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최소한의 사랑'은 '최소한 나와 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요. '예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