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말리온 아이들 창비청소년문학 45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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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전, 금요일 밤마다 TV 앞에 놓인 가구처럼 모니터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던 적이 있었다. 슈퍼스타K 2. 매주 반복되는 경연과 탈락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짜릿한 스릴감조차 느껴졌고, 한 단계씩 올라가는 그들을 보고 왠지 모를 뿌듯함에 즐거웠다. 결국 엄청난 상금을 안게 된 한 사람의 승자가 정해지면서 프로그램은 마무리되었다. 평소 다양한 방식으로 노래하는 경연 프로그램을 좋아했기에 우승한 그의 성공 스토리는 마음속에 감동의 물결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2년 후, 나는『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문강형준, 이매진)를 읽게 되었다. 책 내용의 처음 부분에서는 내가 그렇게나 좋아하고 감동받았던 프로그램의 이면이 언급되어 있었다. 그 시각의 차이는 충격적이었고, ‘이렇게까지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순간적인 거부감조차 일었다.

 ‘우리 사회의 되도록 밝은 면을 보여 주는 정보를 아무래도 많이 접하게 해 주고 싶죠. 요컨대 기준은 그와 같은 건전성에 있다고 하겠습니다.(p71)’역설적으로 말하는 윤의 주장은 몇 달 전 나를 거북하게 했던 그 책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당당하게 외치고 있어서였을까?

  134만 분의 1이 슈퍼스타 K라면 그를 제외한 나머지 133만 9999명은 좌절 속에 다시 무너져 내린다. 피라미드 꼭대기를 빛낼 단 하나의 별을 위해 패배감이 짓누르는 삶을 짊어지게 된다. 마는 말한다. ‘실제로는 지면에 다루어지지 않은 패배자들이 더 많습니다.(p71)’‘이 아이들이 이면을 간과하는 교육을 지속적으로 받고 잘못된 사회 구조에 대한 최소한의 비판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로 졸업과 함께 세상에 내보내지는 일에 아무런 문제가 없느냐는 겁니다.(p72)’사회 구조적인 잘못이 마치 개인의 능력 부족인 양 다루어지는 현실에 대하여 강하게 외친다. 모두 그들의 잘못이 절대로 아니라고 말하며 이 중요한 사실을 모른 채 무방비 상태로 사회에 던져지는 아이들을 염려한다. 이런 구조적인 모순에 대해 의심조차 해보지 못하는 아이들. 과연 누구의 책임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교사다. 교과 지도도 나름 아이들의 언어로 쉽게 풀어 가르친다고 자부해왔고, 다른 업무 능력이나 아이들과의 소통도 그런 대로 무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온. 그런데, 이 책은 그런 나에게 스스로 질문을 하게 만든다. 나는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쳐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교과서에 있는 지식만을 충실히 가르쳐온 교사가 제대로 된 교육을 했다고 볼 수 있을까? 책을 읽을수록 지그시 눌려지는 무게감은 질문에 대하여 선뜻 답을 못하게 한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질문은 교사로서의 내 존재를 점점 왜소해지게 한다. 그것만은 아니다. 그것만은 아니어야 한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로젠탈 효과와 함께 학생들의 긍정적인 변화를 나타낼 때 주로 쓰이는 말이다.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아! 주변 어른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는 아이들의 이야기로구나!’라 생각했다. 얼핏 보았던 책 표지에는 꽃도 있었기에 나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대한 채 책장을 펼쳤다. 학교 이름 ‘로젠탈 스쿨’도 로젠탈 효과처럼 교사의 긍정적인 시각에 사기가 북돋워지는 아이들을 연상시켰다. 그래서 서장에서 마가 쫓기는 장면을 보고 고개를 자꾸 갸우뚱했다. 책을 읽기 전에 연상했던 평화로움이 점점 미스테리 스릴러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비리를 묘사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도가니』(공지영, 창비)와 닮아있다. 하지만 조금만 읽어보면 다른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가니』가 청각 장애학생들의 삶을 다루었을 때, 많은 이들은 교장과 이사장을 향해 책을 읽는 내내 치를 떨며 분노하였다. 하지만 이 책은 교장과 교사들의 비열함에 분노하면서도 스스로를 슬며시 바라보게 한다. 온전히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과연 나는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직접적인 괴롭힘을 주지는 않았더라도 학교에 있는 많은 아이들의 고통을 외면하지는 않았던가? 아니면 마취약을 주면서 달랜 적은 없었던가? 아이들의 고통을 근본적으로 없애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사실과 진실의 기준을 정하는 일만 해도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어 자칫 진실을 알기도 전에 지쳐 버릴 수 있다는 걸 마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감당하기 힘들 만큼 구별이 모호할 때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다. 자기가 믿는 게 진실이라고 일단 간주하는 것.(p67)’

나는 이제껏 무엇을 믿어왔던가?

 ‘학교는 뭐다? 국가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집행하는 도구다.(p74)’

혹시 나는 학교라는 도구의 또 다른 도구가 되어 긍정적이고 밝은 면만을 잘라내어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은 아닐까?

 ‘특정 3종에 한해서만 접속할 수 있게 한 것(p68)’은 아니었지만, ‘정보가 과도하게 넘치는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정서적 혼란을 겪지 않도록 교사가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p69)’라 느끼며, ‘평소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보아 넘기는 편인 곽은 자신이 뭘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체념과 타협을 일찌감치 배웠을 뿐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곤 했다. 학습된 무기력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살아가는 거야말로 오늘을 보내는 요령으론 현명할지 몰랐다.(p75)’라고 은연중에 강요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아이들이 감동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 소설 속 그들처럼‘연소자를 지배하는 자기만의 방식이 몸에 배어 있고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표정.(p167)’을 짓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냥 아주 섬에다가 자기들만의 왕국을 만들고 싶다고 하세요.(p171)’그들은 왕국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데, ‘요컨대 이 아이들이 사회에 충실히 부역하는 동시에 기득권, 그러니까 기존의 구성원들에게 덤비지 못하도록 모아 놓고 순한 양이 되게 잘 길들이는 임무를 수행...(p170)’해온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질문이 스스로에게 하나씩 던져질 때마다 마음속이 답답해져왔다.

 

 ‘고립감을 느끼기 쉬운 자연환경에 철저하게 반복되는 기계적인 일과와 규칙, 거기에 원칙을 준수한다면 또래 집단 형성은 둘째 치고 최소한의 플라토닉 연애마저 불가능하다는 상황만으로도 돌아 버릴 조건은 충분했다.(p103)’‘나는 구제 불능으로 재활용조차 불가능한 쓰레기로 분류된 건가? 단 한 차례의 폭력 때문에?(p119)’‘낙인도’라는 섬 이름처럼 낙인이 찍힌 아이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 보았는가? 답변이 궁색해진다.

 ‘무엇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이 아이들은 기계가 아니며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켜 왔는데 단지 세상에 나가기 전까지 감추고 있었을 뿐인지, 이들이 섬을 전복할 힘이 없다면 최소한 섬에서 탈출하기를 원하는 것인지 알아야 했다.(p214)’

 ‘글쎄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야. 네가 움직이는 건 인간이기 때문이야.(p215)’

마의 말에, ‘여기서 멀쩡히 살아가려면 가능한 한 생각 같은 건 안 하는 편이 나아요.(p215)’라며 담담하게 답하는 혼모. 담담하기에 오히려 더 아프다.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사각의 교실 안에서, 사각의 책상 앞에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역시 비슷한 답이 나올까? 지난 주, 힘들었던 영재 캠프 중에 어떤 점이 가장 좋았냐는 질문에 “여기 오면 학원 안 가도 되잖아요.”라며 해맑게 답하던 아이도 비슷한 답을 할까?

 ‘다만 인간이라서, 를 말했을 뿐인데 과대평가라니, 이 아이들이 그동안 인간이 아니면 무엇으로 간주되고 있었을까.(p216)’‘어른이 하자는 대로 참는 건 아이가 아니다. 그런 아이가 있다면 그건 말 그대로 그저 참고 있을 뿐이다.(p235)’‘잠깐의 포근함이 혀끝에서 녹아 사라져 버릴 것을 알면서도 당장의 충동에 몸을 맡겨 보고, 이도 썩고, 아파서 눈물도 흘려 보고, 그러면 안 되나. 무엇이 옳은 걸까.(p236)’...무엇이 정말 옳은 걸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그가 암흑이라고 믿는 것조차 암흑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채로 그 자리에 견고히 버티고 있었으며 무엇이 진실인지 다퉈 볼 여지가 있음에도 공론화되지 못하고 논란의 대상에서 열외로 비켜나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p244)’

과연 바꿀 수는 없는 것일까? 저자 역시 무기력하기만 한 자신의 모습을 답답해하며 작은 힘이나마 보탤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지금, 그게 누구든 간에 등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똑바로 돌아볼 것이다.(p245)’마의 생각을 빌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이것은 우리 인생에 어림 반 푼어치 도움도 안 되는 한 어른의 정신적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p247)’ 작가의 말을 통해서 아프고 답답한 마음을 슬며시 표현해본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기 마련이다. 이 책은 빛만을 보아왔던 나에게 어둠 또한 정면으로 직시해야 함을 당당하게 알려주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표지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문득 꽃에 둘러싸인 여학생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얼핏 보면 화려한 꽃들에 가려 대단히 평온해보였을 지도 모르는 표정이다. 마네킹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아이는 마네킹처럼 앉아있다. 섬 안에 갇힌 채 저 멀리 암흑을 뚫고 아이를 감시하는 어른들인 양 비춰지는 두 개의 조명을 받고 조용히 앉아있다.

 ‘...무엇보다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수많은 갈라테이아들은 오늘도 부모 또는 교사 또는 이 세상 모두일지 모르는 자기들의 피그말리온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당신 소유가 아니고 당신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어디까지나, 말하고 싶다. 모두가 실제로 그리 말하지는 않는다, 못한다.(p247)’

  한여름 햇살이 유난히 따가운 요즘이다. 방학임에도 아이들은 여전히 학원으로, 특강으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느 만큼을 요구하던 피그말리온이었을까? 언제쯤이면 피그말리온의 모습을 벗고 자유롭게 갈라테이아들을 놓아줄 수 있을까?

  말썽피우고 재잘대는 아이들이 유난히 보고 싶은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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