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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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머니의 소원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평범하게 밥을 하고, 평범하게 커피를 마시고, 평범하게 책을 읽고, 평범하게 산책하고, 평범하게 슈퍼에 들르고, 평범하게 TV를 보고, 평범하게 세탁기를 돌리고, 평범하게 청소하고, 평범하게 화장실에 가고, 평범하게 친구를 만나고, 평범하게 이부자리를 펴고, 평범하게, 평범하게, 평범한 일상의 범주에 포함된 무언가를 하는 것.

비 오는 날에도 혹여 넘어질까 바깥 출입을 자제하시던 당신. 쨍쨍한 햇살이 퍼지던 생신날, 오랜만의 외출 길에 계단 세 개를 눈에 담지 못하신다. 왼쪽 고관절 골절, 응급실 입원, 인공 관절 전치환술, 재활 치료. 바늘에 꿰어진 실처럼 당신 삶의 동선에 내 삶의 시계가 덩달아 조정된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하루를 건너는 중이다. 몸은 분주한데 마음의 속도는 느려지는가. 퇴근 후 매일 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보며 당신의 삶과 주변 이들을 들여다본다. 상황이 바람처럼 불어와 마음을 덮고 있던 책장을 넘긴다. 책을 읽는 듯 현실 안에 담긴 사람들을 읽는다.

25일이 지난 오늘, 드라마틱한 현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오랜만에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참았던 숨을 쉬는 듯 한 달여 만에 책장을 다시 펼친다.

 

흐르는 강물처럼은 한 여인이 겪어내는 삶의 여정을 그린 장편 소설이다. 1940년대 미국의 콜로라도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며 가업으로 복숭아를 키우던 빅토리아의 삶은 한 남자를 만난 이후, 휘몰아치는 격변에 던져진다. 사랑하는 남자는 살해되고, 아들을 혼자 출산하고, 그 아이를 다른 가정에 버리게 된다. 어릴 적 사고로 어머니와 이모, 사촌 오빠를 잃었던 그녀에게 남은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고향은 수몰된다. 홀로 남겨진 주인공은 척박한 땅에 복숭아 묘목을 옮겨 심으며 상실의 아픔을 건너 자신만의 뿌리를 내린다.

상실의, 상실에 의한, 상실을 위한 소설이기라도 하듯 삶의 기반을 지탱하는 요소들에 대한 상실을 모아 놓은 작품이다. 부모, 사랑하는 이, 자식, 의지하던 사람, 고향에 이르기까지 작정하고 모래성 허물기 게임이라도 하는 듯 주인공의 삶에서 차례로 무언가를 앗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통 상실로 그득한 이야기는 암울하지 않다. 상실에만 머물지 않고 상실을 통해 점점 단단해지는 마음의 근육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숲으로 들어가 홀로 출산을 한 그녀는 숲이 들려주는 말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숲은 내게 말했다. 모든 존재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이라고.‘ '까슬까슬한 겉껍질을 벗겨야 달콤한 속살을 드러나는 복숭아처럼, 다시 그 순간을 지나면 단단한 씨앗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그녀의 삶은 복숭아를 닮아있다.

 

문장에서 달콤한 복숭아 향이 난다. 어쩌면 이런 비유를 생각해 낼까. '상냥함이 넘쳐흐르는 우물이 있을 것만 같은 눈, 수면 위의 나뭇잎이 걷힌 듯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물속이 보이는, 고요라는 즐거움을 위해 조각된 공간에 있는 것처럼 정적 속에서 매우 편안했던, 수제 버터처럼 보드라운 햇살을 주변 산봉우리에 나누어 주는 태양, 펄펄 끓는 시럽처럼 아주 미세한 틈으로도 스며들어 버리는 그런 슬픔, 아들의 흔적을 맛보려는 사람처럼 차가운 산 공기를 꿀꺽꿀꺽 삼켜대는, 내가 한 거짓말은 나의 침묵 그 자체여서 주워 담을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슬픔이라는 단단한 공이 목에 걸린 듯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는, 내 세상의 맨 바깥을 감싸고 있는 껍질이 아주 살짝 벗겨지는 느낌이라는, 숲은 마치 이끼로 뒤덮인 폭포 같다'는 표현들에 감탄한다.

그녀의 마음은 삶을 겪어내며 복숭아의 씨앗처럼 단단해진다. '좀처럼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없었고, 과거를 돌이켜는 일은 그보다도 없었으며, 후회도 아쉬움도 없이 오로지 현재의 순간만을 두 손에 소중히 담고서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경탄하는' 사람, '본질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비운 삶이야말로 참된 삶이라는 사실을, 그런 수준에 도달하면 삶을 지속하겠다는 마음 외에 그다지 중요한 게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사람을 마음에 품은 채 말이다.

'나를 받아줄 곳이 아무 데도 없으면, 모든 곳은 그저 아무 곳도 아닌 게 된다'는 사실을, '하루하루 선택한 삶을 만들어 나가는 건 좋은 삶'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내게 없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내 앞에 놓인 것들에 감사'한다.

 

책의 제목인 '흐르는 강물처럼'은 그녀가 사랑한 남자가 해준 말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소설의 3분의 1지점에서 등장한 이 문장의 의미는 그만큼의 시간을 건너며 깊이 있게 우러난다. '우리 삶은 지금을 지나야만 그다음이 펼쳐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가 없고 초대장이 없더라도 눈앞에 펼쳐진 공간으로 걸어 나가야만 한다.'

거대한 강물인 듯 서사가 한 방향으로 유려하게 흐른다. 이야기가 일관된 결로 흐르는 데는 소설 속 요소들의 상징적 역할이 크다. 척박한 땅에서도 피어나며 강인한 생명력을 드러내는 야생화와 야생초, 콜로라도의 자연과 원주민 문화를 연상시키는 모카신, 건조한 모래땅에서도 살아남는 세이지 덤불, 고산 지대에서 볼 수 있는 다람쥐과 마멋, 소박하면서도 건강한 비스킷, 주인공이 가족과 이웃을 위해 준비하는 복숭아 파이와 따뜻한 캐서롤, 거친 환경을 견디고 가장 늦지만 풍성하게 익어가는 만생종 복숭아, 행복과 섬세함이라는 꽃말도 있지만 척박한 땅에서 피어남으로써 외유내강의 삶을 드러내는 수레국화, 비바람을 견디며 구부러진 곡목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겪는 모든 요소가 모여 하나의 태피스트리를 완성할 때, 작품 전체는 한 덩어리의 주제로 묵직하게 다가온다.

외국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막힘없이 읽힌다. 번역의 영향력이 크리라 판단한다. 과속방지턱이 없는 문장으로 문맥이 부드럽다. 책 속에 등장하는 '지저깨비''악대말'이 순우리말이라는 걸 알고 나니 더욱 놀랍다. 원작을 충분히 소화한 번역가는 세심한 번역어를 선택하여 깔끔하게 재탄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주인공이 거쳐 가는 삶의 여정을 따라가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상실의 폭풍을 소설 속 그녀처럼 당당하게 마주하고 싶어진다. '강인함은 작은 승리와 무한한 실수로 만들어진 숲과 같고, 모든 걸 쓰러뜨린 폭풍이 지나가고 햇빛이 내리쬐는 숲과 같다. 우리는 넘어지고, 밀려나고, 다시 일어난다.'

'이제 좀 혼자 자유롭게 살려나 했더니.'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1년도 되지 않아 다시는 걷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순간을 마주하신 어머니는 이제 그 문턱을 넘어 조금씩 걸음마를 연습하신다. MBTITF를 양손에 쥔 당신은 점점 단단해지는 중이다. 소변 주머니를 털어내고, 피 주머니를 털어내고, 다리를 둘러싼 냉찜질팩을 털어내는 시간의 층도 통과하신다. 당신의 의지에 끌려 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몸의 변화에 울컥한다.

마음 구석구석 돋보기를 대어 보는 듯 나를 돌아본다. 마음의 원픽 키워드가 달라졌다. 요즘은 '일상의 평범함'이 눈에 들어온다. '잔잔한 수면 아래에 신비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듯,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 특별함이 숨어 있었다.' 책 속에 평범하게 숨어 있던 문장이 눈에 띄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보석처럼 떠오른다.

냉혹한 현실의 틈으로 드리워지는 햇살처럼 삶에는 시리고 따뜻한 징검다리가 번갈아 놓인다. 그 온기는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오늘도 어머니는 휠체어와 하이 워커와 로 워커와 지팡이와 함께 부지런히 하루를 보내신다. 평범한 일상으로 향하는 특별한 시간을 걷고 계시는 당신을 지켜보며 '평범함'의 의역은 '특별함'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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