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차인표 지음, 제딧 그림 / 해결책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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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된 기억이 있다. 15년 전이니 오래되었다 표현하기엔 다소 애매하지만. 2010년 봄, 나는 42명의 학생들과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나눔의 집>을 방문한다. 윤정모 작가의 소설 봉선화가 필 무렵2차원으로 박제된 인물들을 현실로 마주한다. 독서 모임을 함께했던 아이들은 특히 생생한 표현으로 그날의 후기를 남긴다.

탐방 후기 양식을 제작하며 책 속의 문구 '기억의 집'을 인용한다. '여러분들은 어떤 기억의 집을 지었나요?' 역사관 탐방 일정, 관련 용어의 정의, 뉴스 기사 등으로 구성된 참고 자료도 곁들인다. 일본군 '위안부', 정신대, 위안소, 종군위안부, 성노예, 성폭력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 나눔의 집,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에 대한 기록을 사전 교육 자료에 담는다.

짐짓 빵빵한 배경지식을 습득하고 당신들을 마주한다고 여겼건만. 3차원으로 구현된 <나눔의 집>속 풍경을 마주하던 날, 마음은 순식간에 바람 빠진 풍선이 된다. 사랑을 글로 배운 인간이라도 된 듯 생경한 느낌표가 털썩 내려앉는다. 장윤정의 노래 <>을 불러주시는 표정이, 특별할 게 없는 당신들의 모습이 너무 평범해서 당황한다. 할머니로 만난 분들이 처음부터 할머니는 아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퍼뜩 깨닫는다.

 

함께 간 10대의 학생들과 비슷한 나이에 겪어낸 역사의 무게는 묵직하다. 함께 부르는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공간을 울리니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다. 70여 년의 시간을 꾹꾹 눌러 담은 서툰 그림에서 꽃샘추위처럼 회한이 전해진다.

'어떤 향기로부터, 어떤 날엔 소리로부터, 아주 오래된 기억을 느껴...' 노트북을 두드리는 카페에서 백예린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기억은 다양한 방식으로 소환된다. 향기, 소리, 촉감, , 인상적인 장면이 오감을 자극하면 먼지 쌓인 기억은 바닥으로부터 비상한다. 한 편의 이야기가 오래된 기억을 현실로 불러오기도 한다. 이 책처럼.

차인표의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은 일제 강점기에 '위안부'로 끌려간 소녀 순이의 이야기가 담긴 장편 소설이다. 2009년 출간된 잘가요 언덕의 개정판이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백두산에 있는 호랑이 마을이다. 호랑이의 전설과 맞물린 이야기가 생동감 있게 펼쳐진다. 등장인물들의 서사에 담긴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이 균형 잡힌 시각 속에서 전개된다.

 

균형이 잡혀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상반된 캐릭터 때문이다. 조선인 순이를 구하려는 일본인 소위 가즈오와 오로지 돈만 좇아 일본에 협조하여 용이와 순이를 잡는 데 거리낌 없는 조선인 장 포수. 두 인물의 심리는 양국을 향한 편견을 지우도록 만든다.

일본군 가즈오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는 말미에 붙인 문구를 통해 그의 심리 변화를 섬세하게 구현한다. 9번째 편지에 등장하는 '대일본제국군' 소위라는 명칭은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반영한다. 68번째 편지에서 그 문구는 슬그머니 사라진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을 시사한다.

남자 주인공 용이는 잡혀간 순이를 구하기 위해 홀로 일본군 진지를 습격한다.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는 영화적 공식이 살짝 적용된다. 저자는 잠시나마 암울한 전개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독자에게 쾌감을 선사한다.

독특하게 다가온 점은 이야기의 무게 중심이 할머니가 아니라 어머니라는 점이다. 서두에 적힌 문장 '생명을 주신 어머니께'를 시작으로 소설의 마지막까지 누군가의 '어머니'BGM처럼 등장한다. 간지처럼 끼워진 가즈오의 편지를 받는 어머니, 새끼를 지키는 어미 호랑이, 백호에 의해 희생된 용이 어머니, 부부가 두고 간 아기 샘물이에게 어머니가 되어주는 순이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라는 보통 명사는 따스함을 품는다. '엄마별은 금색이나 은색이 아닌 따뜻한 색이니까요.', '가축을 해치던 무서운 육발이의 발이 새끼 호랑이에게는 따스한 엄마 발이었나 봅니다.', '전 엄마라는 이름으로 죽고 싶어요. 한 아이가 아닌 여러 아이들의 엄마.' 일본군 '위안부'가 되어 필리핀으로 끌려간 순이의 소박한 소원이 가시처럼 까끌거린다.

엄마를 죽인 백호를 용서할 수 없는 용이의 눈에는 엄마별이 보이지 않는다. 순이는 말한다. '용서는 백호가 용서를 빌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엄마별 때문에 하는 거야. 엄마별이 너무 보고 싶으니까. 엄마가 너무 소중하니까.' 작가는 어머니의 따뜻함을 이야기에 투영하며 자연스럽게 주제와 연결한다. '용서'. 어머니의 존재는 상대가 빌지도 않는 '용서'조차 커다란 품으로 포용한다.

<뒷이야기>에 묘사된 에피소드는 이 소설의 백미다. 70년 뒤 귀국한 89세의 쑤니 할머니는 어느덧 할머니가 된 샘물이에게서 용이의 메시지를 건네받는다. 아기를 업은 순이의 모습과 함께 글자가 새겨진 나무 조각이다. '따뜻하다, 엄마별.' 일곱 글자가 뭉클한 느낌표가 되어 눈물샘을 조용히 터뜨린다.

 

일본군 '위안부'와 성노예라는 명칭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전자는 역사적인 용어이다. 범죄의 주체는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위안부'라는 말은 여전히 껄끄럽다. ''로하고 ''심 시킨다니! 후자는 국제법적 용어이다. 전쟁 범죄이자 반인륜적 범죄라는 본질을 강조한다.

이 책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표지와 제목으로만 접했을 때, 그리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우리, 같은 별'이라는 제목의 문구와 표지에 등장하는 소년, 소녀를 보며 이들의 사랑 이야기라 여긴다.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라는 책 소개에 살짝 의아했던 이유다. 대동단결의 위력을 지닌 두 글자 '엄마'''이란 글자 앞에 숨겨둔 의도를 짐작하지 못한다. 사랑 이야기는 맞지만, 이런 방향의 서사는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억지스럽지 않고 다큐와 소설 사이에서 무게 중심을 찾아낸 저자의 지혜가 돋보인다. 영화를 본다는 착각이 들 만큼 동영상으로 그려지는 장면들, 가볍지 않은 흐름, 뚜렷한 주제 의식이 마음에 든다. 배우 차인표가 작가로 글을 쓴 게 아니라 작가 차인표가 배우로도 일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인상적이다.

 

이야기의 힘은 강하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기억의 집을 더욱 확장시킨다. 240페이지의 짧은 이야기는 15년 전 스쳐 갔던 기억을 순식간에 불러온다. 청소년 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역사 탐방에 참여했던 경험이 순이가 겪은 이야기와 연결된다.

과거의 자료들을 뒤적인다. 2010312일 현재 85명 생존, 최저 연령 11~13, 평균 연령 만 17세 전후, 등록되지 않은 피해자까지 20여만 명이 추정된다고 한다. 탐방 당시, <나눔의 집>에 거주하시던 할머니는 7명이다.

최신 자료를 검색하다 멈칫한다. 202512월 현재 평균 연령 95.7, 전체 등록된 피해자 240명 중 전국 생존자 총 6, <나눔의 집> 거주자 2. 불과 15년이 블랙홀처럼 80여 명의 생명을 빨아들인 거다.

확연하게 줄어든 숫자가 심장에 각인된다. 쉽게 잊혀졌던 당신들은 한순간도 잊을 수 없던 뜨거운 역사를 내내 간직하다 가셨으리라. 먹먹함을 안고 작가의 이야기에 나의 리뷰를 연결한다. DNA를 통해 유전자가 전달되듯 잊지 말아야 할 역사는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분들의 존재를 숫자로 새겨둔다. 이 글을 마주하는 당신에게도 잊히지 않을 이야기가 건네어지기를 바라며 기억의 집을 넓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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