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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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라고 해서 이 감정을 공유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들의 발라드> 참가자 이지훈의 인터뷰다. 깊고 맑은 소년의 눈동자에 60대의 시선이 담기는 듯하다. 진지한 울림에 담긴 5분 여의 시간을 지켜본다. 50여 년 지나온 나의 시간이 소환된다. '잘 가라, 나를 떠나가는 것들 / 그것은 젊음, 자유, 사랑 같은 것들 / 잘 가라, 나를 지켜주던 것들 / 그것은 열정, 방황, 순수 같은 것들(feat. 최백호의 '나를 떠나가는 것들')' 담담하게 건네는 말들이 고요한 리듬을 타고 귓가로 흘러든다.

문학 작품을 읽기 전에 찾아보는 자료가 있다. 작가가 해당 작품을 몇 살에 창작했느냐이다. 43세의 존 윌리엄스가 1965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스토너 .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렸던 작가의 사유가 담긴 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출간된 60년 전 작품이 2025년을 살아가는 50대 후반의 심장을 얼마나 움직일 수 있을까. 그다지 많은 기대를 하지 않고 첫 장을 펼친다.

"어떻게 이런 감성이! 이제 겨우 10대잖아요." "하긴 천재는 나이를 가리지 않는구나." 이지훈의 노래에 심사위원들이 감탄한다. 나이를 가리지 않는 건 작가로서의 감성이나 사유도 마찬가지일까. 스토너 의 마지막 책 장을 천천히 덮으며 생각한다. 삶에서 중요한 건 그가 지나온 물리적인 시간보다 시간을 건너온 밀도라는 사실을.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문학의 세계에 눈을 뜬 뒤 묵묵하게 내면의 가치와 존엄을 지켜나가는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이 담긴 소설이다. 한눈에 반한 여자와 결혼하여 딸을 낳지만 그리 행복하지 못했던 결혼 생활과 외도, 40년 동안 영문과 대학교수로 일하면서 동료들이나 제자와의 관계에서 겪은 갈등, 60대 중반에 암으로 죽을 때까지. 그가 겪은 고난은 뉴스의 사회 면을 차지하는 사건들에 비해서는 비교적 평범해 보인다. 한 번쯤 일어났을 법한 사건, 한 번쯤 했을 법한 생각이나 행동이다.

특별할 것 없는 그의 삶이 묵직한 울림을 주는 이유는 뭘까. 시린 아침, 고난을 회피하지 않는 이에게 이슬처럼 맺히는 용기 때문일까. 매번 그러지는 못하지만 가끔은 당신도 나도 한 번쯤 내보았을 작고 소중한 용기 말이다. 거울처럼 마주하는 문장들에 공감하며 주인공이 걸어온 삶에 소리 없는 박수를 보낸다.

시간을 거슬러 온 우직한 인내가 은근한 손길로 나를 위로한다. 그래, 잘하고 있어. 그렇게 꿋꿋하게 나아가면 되는 거야. 나의 직업을, 나의 열정을, 나의 가족을, 나의 부모님을, 이 모든 것이 담긴 나의 삶을. 작가는 스토너의 삶을 통해 관조적으로 독자 스스로 바라보는 시간을 선물한다. 평범한 삶 속에 숨어있는 보석을 보여준다. 담백한 음식들을 소박하게 차린 채식을 맛본 느낌이다. 위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정갈한 뒷맛이 여운으로 남는다.

 

중학교 1학년의 큰 아이를 바라볼 때까지만 해도 자식과 함께하는 시간이 영원할 줄 안다. 둘째 아이까지 타지로 떠나 직장을 다니는 지금, 곁에 머물던 이들이 조금씩 떠나가는 중이다. 그토록 나를 기쁘게 했던 물건들도 하나둘 세월의 더께를 입다 정리되고 있다. 떠나가는 것들 사이로 떠나보내야 할 것들이 점차 늘어나는 시기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따뜻한 봄 같은 사람이야." 결혼 초, 지인들에게 남편을 묘사했던 말이다. 꽃샘추위를 품고 있는 계절 역시 봄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원망과 갈등과 우울과 슬픔이 봄을 둘러싼 얇은 장막에 상처를 입힌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앞두고 스토너가 반복적으로 되뇌는 자조적인 질문이다. 덩달아 움찔한다. 나는 당신에게 무엇을 기대했을까.

죽음에 임박한 스토너는 아내를 차분하게 다시 바라본다.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내가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내가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내가 저 사람을 좀 더 사랑했더라면.' 가정법이 담긴 문장을 덩달아 따라 읽는다. 심장을 두드리는 문장들이 다른 메아리로 돌아온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행운의 편지처럼 이 문장들을 수시로 펼쳐보며 나머지 삶을 살아가면 된다고.

 

돌아보면 누구든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던 듯하다. 넘어진 몸을 일으킬 시도는 하지 않는 채 그저 땅만 바라보며. 땅이 나에게 다가온 거라 억지를 부리며. 대지처럼 가만히 내 곁에 머무는 당신이 거기 있었기에. 좀 더 강하지 못했던 나를, 좀 더 많은 것을 알지 못했던 나를, 좀 더 이해하지 못했던 나를, 좀 더 당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까진 무릎을 살펴본다. 조금씩 손가락을 까닥이며 글이라는 연고를 바른다. 구부러진 다리를 바라본다. 저린 다리에 조금씩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킨다. 나의 몸을 일으킬 수 있는 건 나의 근육이니. 내가 할 일은 주변을 탓하지 말고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일이리라. 조금 더 넓어진 세상 사이로 부드러운 바람이 호호 상처를 간질이며 지나간다.

묘한 소설이다. 서술하는 문장들의 주어를 나로 바꾸어도 전혀 이질감이 없으니 말이다. 스펙터클한 서사 없이도 매력적인 캐릭터가 없어도 마음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이유가 뭘까. 평범한 스토너의 삶과 평범한 나의 삶이 공진을 일으키는 걸까. 'stoner'라는 이름처럼 묵직한 감동이 서서히 나를 압도한다. 삶은 누구의 것이든 소중하고 유일한 고유 명사임을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보통 명사가 나만의 고유 명사로 바뀌는 데는 두 달 반이면 충분했다. 누구도 지켜보지 못했던 순간, 평소 주무시던 침대에서 주무시듯 떠나가신 아버지.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말을 남기는 건 드라마에나 존재하는 보기 드문 장면임을 깨닫는다. 죽음은 예고 없이 찍히는 삶의 마침표니까.

'죽음은 이기적이야. (중략) 죽어가는 사람은 혼자만의 순간을 원하지. 아이들처럼.' 작가의 문장에 붙들려 한동안 창밖을 바라본다. 올여름, 떠나보낸 당신을 떠올린다. 누구도 지켜보지 못했던 마지막 순간이, 부디 당신이 원했던 혼자만의 것이었기를. 아직도 생생한 목소리, 함께 한 순간들이 선명한데 시끌벅적한 세상 속에서 한 사람의 부재를 안고 걸어간다. 걸어가야만 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당신과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보낸다. 아이러니한 건 죽음의 포장을 벗기면 거기엔 늘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속에 머무는 삶을 건져 올린다.

나의 삶에 부쩍 '감사'라는 단어가 등장하게 된다. 그렇게 평온한 표정으로 당신의 마지막을 기억하게 해주셔서, 한 줌의 뽀얀 가루로 삶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해주셔서, 남기신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주셔서.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을 뜨끈한 난로처럼 품으며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자유 의지로 걸어가고 싶은 길을 향한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스토너는 스스로의 장래를 '탐험가인 자신의 발길을 기다리는 땅'으로 본다. 걸어가야 만들어지는 길처럼 삶도 걸어가는 대로 만들어진다.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는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잊으면 안되네.' 스승이 하는 말이 주인공에게 반사되었다 내게 온다.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작가의 문장이 나를 향한다. '상대가 여성이든 시(),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 나는 살아 있어.' 삶을 돌아보는 주인공을 바라보며 나의 삶을 바라본다. '가끔 내가 놓치고 산 것들, 아직 가보지 못한 곳들을 생각해.' 스토너의 친구가 나에게 말을 건다.

내게 남겨진 것들을 생각한다. 떠나간 아버지 뒤로 남겨진 어머니, 떠나간 아이들 뒤로 마주 보고 삶을 대화할 수 있는 어른이 된 딸들, 떠나간 흑백의 시간 뒤로 햇살처럼 내 곁에 머무는 당신, 떠나간 서투름 뒤로 남아있는 삶의 두근거림을, 글과 함께 할 나의 열정을글을 쓰는 손가락의 걸음이 발걸음이라도 되는 듯 키보드 위를 통통 튀며 걷는다. 나의 삶도 이렇게 가뿐하고 경쾌하기를. 툭툭 털고 몸을 일으켜 원하는 길로 걸어가고 있으니.

p194, 밑에서 8번째 줄: 드리콜 드리스콜

p301, 밑에서 3번째 줄: 행복했던 같아요 행복했던 것 같아요

p337, 밑에서 8번째 줄: 둘렸다.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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