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속 아이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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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다섯 번째다. "오늘이 며칠이냐?" 해가 정해지지 않는 부정 방정식처럼 아버지의 오늘은 여전히 하나의 답을 찾지 못한다. 제주도로 갔다가 금산으로 갔다가 얼굴도 뵙지 못한 할아버지가 순식간에 소환된다. 현실을 사는 당신의 몸은 점점 야위어 가는데, 마음은 과거로 갔다, 순식간에 아직 오지도 않는 미래로 종횡무진한다.

병원과 친정을 정신없이 오가다 어느 순간 달력을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일주일이 훅 지나있다. 화들짝 놀라 휴대폰 캘린더를 다시 확인한다. 기억은 촘촘한데 시간은 수초에 싸인 축삭 돌기처럼 도약적으로 흐른다.

 

현실은 슬픔보다 세다. 슬픔에 잠식될 여력도 없이 빨간 불에 길을 건너려는 당신, 길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는 당신, 소리를 버럭 지르며 전혀 반대 방향을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당신 앞에서 뜨거운 여름에 공명하듯 감정이 폭발한다. "아빠! 대체 왜 그래!" 왜 그런지 알면서도 발악하듯 힘없는 말을 쏟아낸다.

날로 야위어가는 당신을 목욕시켜 드리면서 시외버스 표도 제대로 구입하지 못하는 융통성 없고 내성적인 딸을 데리고 거침없이 거리를 오가던 모습을 떠올린다. 당신의 나이를 훌쩍 넘은 자식이야말로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과거의 모습을 기대하는 건 아닌가.

 

'그 누구도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진실은 없다.' 기욤 뮈소 데뷔 20주년 기념작이라는 띠지 아래 적힌 두 문장에 시선이 머문다. 당신과 나, 모두 현재를 꾹 누르며 살아가지만, 접점을 찾지 못하고 미로를 서성이는 중인 듯해서.

추리 소설의 장점은 현실을 잠시 내려두고 눈앞의 사건에 몰입할 수 있다는 점일까. 출구가 없는 미로 속을 걷는 마음에 서스펜스 소설이라니! 6월 말 이후 근 한 달 동안 멈춰 있던 이야기의 재생 버튼을 누른다.

 

요트에서 피살된 이탈리아 기업가의 상속녀 오리아나 디 피에트로. 미로 속 아이는 그녀를 죽인 범인을 경찰청 팀장인 쥐스틴이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서사를 이끌어 가는 인물은 오리아나, 아델, 쥐스틴 등 세 명의 여인이다. 이들이 교대로 화자로 등장하면서 살인자를 찾기 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내가 주목한 점은 주어의 인칭이다. 3인칭으로 언급되는 등장인물들과는 대조적으로 ''라는 1인칭으로 내레이션 하듯 심리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은 아델이 유일하다. 왜 이 사람만 ''로 이야기할까. 의문은 마지막 4부에서 비로소 풀린다.

 

1'요트에 탑승한 여인'에서는 사건 관련 보도 자료와 오리아나의 남편 아드리앙을 쥐스틴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2'추락 천사'는 재즈 피아니스트인 아드리앙을 상징하는 별칭이다. 뇌종양 4기 판정을 받은 오리아나는 자신의 죽음 이후에 남편과 아이들을 대신 맡기기 위해 다른 여인을 찾는다. 아델이다. '나는 너의 삶을 바꿀 수 있고, 너는 나의 삶에서 남아 있는 것들을 바꿔줄 수 있거든.' 오리아나는 7살 때 자신의 실수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밀까지 털어놓는다. 거절하던 아델은 결국 황당해 보이는 제안을 수락하며 심지어 아드리앙을 사랑하게 된다.

 

2부의 또 다른 주요 내용은 쥐스틴이 아드리앙을 심문하는 과정이다. 알리바이에도 헛점이 있고, 막대한 유산을 노린 것으로 보이는 살해 동기는 충분하다.

3'사랑에 빠진 여인의 역설'에서는 분위기가 역전된다. 오리아나의 뇌종양이 불현듯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남편과 아델은 이미 사랑에 빠진 상황이다. 다시 원래대로 상황을 돌려놓으려는 오리아나, 그럴 수 없는 아델. '마치 우리 두 사람에게 U자 관의 원리가 작동하는 느낌이 든다. 오리아나가 비탄에 휩싸여 있는 동안 나는 그녀의 활력을 펌프질해 쓰기라도 하듯이 내 생애에서 가장 활기차고, 에너지로 넘치는 날들을 보냈다.'

 

두 여인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아델은 오리아나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고 킬러를 고용한다. 3부의 마지막은 킬러가 오리아나를 살해하는 장면이 전개된다. , 그렇군. 남편은 살인자가 아니었어.

한데 왠지 찜찜하다. 제목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아드리앙이 아델을 위해 작곡했다고 소개된 곡은 아델이 독백에서도 언급한 <미로 속 여인>인데 왜 책의 제목은 '여인'이 아니라 '아이'일까. 반전은 4'다른 누군가'에 있다. 남편이 살인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대단한 스포일러가 아니라는 건 마지막에서 모두 풀린다. 몇 편의 드라마가 생각나지만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작가는 중간중간 인간 심리의 복잡성을 어필한다. '인간 심리는 방정식 풀듯이 풀 수는 없다고 본다. (중략) 정확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영역이자 출구 없는 4차원의 미로다.', '분명 다른 세상이 있는데, 그건 이 세상 안에 있다.', '가장 위험한 환상은 오직 하나의 현실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현실은 여러 다른 버전들로 존재하며 그중 일부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관계성을 메모한 종이를 훑어본다. 그 안에 정답이 담겨있는데도 상상도 하지 못한 결말을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리뷰를 쓰기 전에 망설인다. 추리 소설은 결말이 포인트이니 스포일러를 언급하면 아니 된다. 그렇다면, 핵심을 피하면서 제대로 된 내용을 쓸 수 있을까. 알맹이가 빠진 글 안에 무슨 말을 담을 수 있을까.

신기한 건 그래도 용케 뭔가 중얼거릴 내용이 있다는 점이다. 더 신기한 건 주변 사람들이 '온몸과 온마음이 힘들어하고 있을 나비종'이라 위로하는 중에도 한 달 정도가 흐르니까 이렇게 더듬더듬 글이 써지고 있다는 점이다. 더더욱 신기한 건 열무김치와 고추장과 참기름을 섞어 쓱쓱 비빈 밥이 이제는 잘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금세 바뀐 컴퓨터 바탕 화면에 평온한 잠을 자는 듯한 갈색 여우 한 마리가 보인다. 섬세한 털 위로 눈발이 살포시 내려앉아 있다. 올해 눈 내리는 날이 아버지의 삶에 담길 수 있을까. 고통이 멈추기를 바라는 담담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이나마 다가올 현재를 공유하고 싶은 모순된 마음이 공존한다.

인간의 심리는 불능처럼 보이는 외피 안에 부정을 담고 있는 방정식일까. '해피 엔딩은 이야기를 언제 멈추느냐에 달려 있다.'는 에필로그의 문장이 마음에 스민다여러 답을 안고 지내시는 아버지. 당신의 이야기가 멈추는 날이 부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기를, 당신을 대입하는 방정식이 여러 해가 존재하는 부정(不定)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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