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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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욱! 헛구역질은 계속 나오는데 차가운 감촉의 검은 줄은 내 안으로 들어온다. 옆으로 누운 채 눈물, 콧물 질질 흘려가며 영겁의 시간을 견딘다. 이보다 더 찌질할 수 없는 몰골이었을 게 분명하리라. 그토록 길게 느껴지던 시간이 저스트 텐 미닛이라는 사실을 알고 상대성 이론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의무적인 건강 검진만 아니라면 하고 싶지 않은, 위내시경 검사의 기억이다.

제발 그만 들어오라며 자꾸 밀어내는 몸의 반응을 전혀 개의치 않는 부드러운 곡선의 직진이여! ~ 10여 년이 지났는데도 순간적으로 몸이 부르르 떨린다. 고통에 소심했던 나는 그전까지 줄기차게 위장 조영 검사를 선택한다. "간접적으로 그림자만 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눈물을 머금고 시도한다. 상상 그 이상의 체험은 치과나 산부인과를 제치고 워스트 넘버 원으로 등극한다.

 

이 책을 읽으며 위내시경 검사의 기억이 겹친 이유를 곰곰 생각한다.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던 이물감 때문일까. 내 안을 구석구석 파헤치며 출혈이 발생한 부위를 영상으로 보여주던 장면 때문일까. 고상한 이성으로 포장하려 해도 제어되지 않던 눈물과 콧물의 민망한 흐름 때문일까.

인간의 내밀한 욕망과 본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한강 작가의 문장을 마주하며 당황스러웠다. 한 번쯤 떠올려보았던 은밀한 상상을 들킨 듯 가슴이 일렁였다. 그녀의 글은 작정하고 파고들어 오는 내시경의 검은 줄처럼 마음 깊은 곳에 숨겨 놓은 금기의 풍선을 툭툭 터뜨린다. 외면하고 싶지만, 언제까지 보기 좋은 그림자들만 볼까 싶어 정면으로 도전해 본다. 담담하지만 뜨겁고 붉은 문장이다. 그 안에 담긴 이성은 냉철하고 몽고반점의 푸른 빛에 가깝다. 찌르는 듯한 아픔도 아닌 것이 내내 답답하게 얹혀 거북한 고통이 심장을 파헤친다.

 

소설 채식주의자는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지닌 연작 소설이다.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 불꽃>의 이야기가 독립된 작품으로 기능하면서 전체적으로 연결을 해도 한 편으로 어우러지는 시리즈물이다. 주인공 영혜와 연결된 가족 구성원의 서사에 각각 핀 조명이 비추어진다.

처음에 차례를 보았을 때는 <채식주의자>를 표제작으로 한 소설집인가 여긴다. 조금 읽다 65쪽 뒤의 여백을 보며 당황한다. 뭐야. 이게 끝? 열심히 달리다 갑자기 낭떠러지를 만난 허탈함. 한참 몰입하던 연극에 갑자기 막이 내려진 기분이랄까. 멍하니 앉아 있다, 다음 작품의 제목을 보다, 남아있는 책장들을 뒤적인다. '영혜'라는 익숙한 이름을 발견한다. 뒤이어 책 표지를 보고 '연작 소설'이라는 문구를 발견한다. ! 아직 끝나지는 않았구나. 살짝 안도의 숨을 고른다.

 

<채식주의자>의 주요 화자는 일인칭 관찰자의 시점을 가진 영혜의 남편이다. 영혜는 중간 중간 기울어진 이탤릭체의 독백으로 ''의 마음을 서술한다. 어느 날 꿈을 꾼 영혜는 채식주의를 표방한다. 또한 집안뿐 아니라 사회적인 모임 자리에서도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다. 소설은 영혜의 변화로 인한 에피소드를 남편의 시각에서 서술한다.

사회적 통념을 거스르는 사람을 향한 폭력성은 의외로 완고하다. 육식주의와 브래지어 착용을 은연중에 디폴트 값으로 설정하고 이에 반하는 사람들을 구분하여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낸다. 같은 인체 구조를 지녔음을 뻔히 알면서도 노브라를 '꼭툭튀'라며 민망해한다. 20대까지는 잘 때까지도 브래지어를 착용했던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시선을 지닌 채 살아왔다. 채식주의자의 반대말은 육식주의자이지만, 우리는 전자에 독특한 정체성을 부여하여 명명한다. 무슨 대단한 신념이라도 있어야 채식주의를 고수할 수 있는 듯 여긴다.

 

음식은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섭취해야 하는 에너지원이다. 의복 역시 몸을 가리고 보호하는 게 일차적인 기능일 터이다. 삶이 각자의 몫인 것처럼 무엇을 먹거나 입든 엄밀하게 말하면 타인이 관여할 영역은 아니다.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답답해서." 분명하게 의사 표현을 하는 영혜를 가족들은 이해할 수 없다.

채식주의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강요와 폭력성은 주위의 냉소와 함께 영혜의 부모를 통해 직접적인 행동으로 드러난다. 아버지는 영혜의 뺨을 때리고 억지로 몸을 붙들게 하여 입을 벌리게 만든다. 어머니는 흑염소를 한약이라 속이며 억지로 먹이려 한다. 딸에 대한 사랑이라는 포장지로 감쌌지만, 그들의 행위는 본질적으로는 강요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스스로 몸을 자해하는 행위뿐이다. 병원 앞 벤치에 앉아 상의를 벗은 채 작은 동박새를 이빨로 물어뜯은 듯한 마지막 장면은 세상을 향한 처절한 항변이다.

 

장면이 바뀐 두 번째 이야기의 문을 열고 주춤한다. 엄훠?! 두 손가락을 벌려 눈을 가리는 훼이크를 취한 뒤 그 틈새로 초집중하여 보았을 장면이 듬뿍 들어있는 게 아닌가. 젊었을 때 읽었더라면 은밀하게 몇 번이고 책장을 넘기며 복기했으리라. "옷을 벗어." 크헉!! 순간, 숨을 멈춘 채 흔들리는 나의 동공. 내가 좋아하는 야시시한 문장들이 '여기가 19금 맛집일세'라며 대기를 타고 있다.

<몽고반점>에서 영혜를 관찰하는 이는 형부이다. 비디오 아트를 하는 ''는 아내로부터 처제의 왼쪽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예술적인 영감과 동시에 성적인 욕구를 느낀다. 그는 영혜가 지닌 식물성에 매혹된다. 그녀의 몸에 꽃을 그리고 또 다른 남자 후배의 몸에도 꽃을 그린다. 꽃과 꽃이 만나는 장면을 완성하고 싶었던 그는 결국 다른 화가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몸에도 꽃을 그려 넣은 다음, 금기의 경계를 넘는다.

 

꽃은 생식 기관이다. 햇살을 향해 야들야들한 꽃잎과 한들한들 바람에 흔들리는 암술과 수술을 대놓고 드러낸다. 누구도 이 장면을 보고 부끄럽다거나 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아담과 이브가 최후의 보루로 나뭇잎 아래 감추었던 부위를 드러내는 장면인데 말이다.

<몽고반점>은 꽃과 인간의 생식을 묘하게 결합한 소설이다. 부분과 전체가 다른 느낌을 준다. 뭉텅뭉텅 끊어서 보면 분명 야릇한데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면 슬픔과 환희가 어우러진 허무가 배어 나온다. 소설 속 그가 영혜의 몸에 꽃을 그려 넣는 작업을 하면서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느낀 것처럼. '모든 욕망이 배제된 육체, 기이한 덧없음, 단지 덧없음이 아닌, 힘이 있는 덧없음'이라는 문장들이 들썩이던 동요를 잔잔하게 만든다. '단단한 고독'이라는 문구에서 고독의 질감을 상상한다.

 

세 작품의 주인공은 과연 영혜였을까. 세 번째 이야기 <나무 불꽃>을 읽으며 관점이 서서히 달라짐을 인지한다. 어쩌면 소설의 주인공은 이 모든 폭력을 지켜보며 거센 파도를 감당해야 했던 영혜의 언니, 인혜가 아니었을까.

마지막 소설의 화자인 '그녀'는 영혜의 언니이자 <몽고반점>에서의 ''의 아내이다. 모든 서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존재다. 경계를 뚫고 달려 나간 동생과 남편의 일을 복기하며 그녀는 허무한 물음표를 날린다. '막을 수 없었을까, 만약에 ~였다면'. 삶을 살아본 적이 없고 다만 견뎌왔을 뿐이라는 문장에 마음이 아프다.

남겨진 사람, 이 모든 일들을 견뎌야 하는 사람, 미쳐버린 동생을 차마 외면할 수 없던 사람, 아이를 두고 죽음을 택할 수도 없는 사람, 훌훌 떠나버릴 자유조차 의무에 박제되어 버린 사람이다. 어쩌면 꿈인지 모른다며 세상을 향해 독백하는 그녀의 담담한 말이 따끔따끔하다.

 

나무가 왜 불꽃일까. 제목을 보며 가졌던 의문이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장에서 풀린다.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을,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이토록 동물적이면서도 시적인 묘사가 식물을 대상으로도 가능하다니! 몇 번이나 눈으로 더듬으며 감탄한다.

작가 한강에게 식물은 동물만큼이나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생명체인가. <나무 불꽃>에서 영혜가 물구나무를 서며 나무가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고 한 말 역시 식물을 동물인 듯 묘사한 문장이다. 생식 기관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꽤 일리가 있는 발상이다. 뿌리 역시 짧게 갈라진 발가락보다는 길게 뻗을 수 있는 팔 끝, 손가락에 비유하는 게 더 어울리는 듯하다. 축축한 나무껍질의 감촉을 느끼며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이 만났음을 인지하는 작가의 감성이 이런 섬세한 작품을 탄생시켰으리라.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외면하고 지내왔던 생각들 속으로 작가의 문장들이 위내시경 검사를 하듯 계속 밀려들어와서였기 때문이다. 식물처럼 섬세하면서 집요하게 마음을 결을 더듬었기 때문이다.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야기 속에서 과거의 나를 돌아보고, 무심코 주변에 휘둘렀던 폭력을 되짚어본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했던 시간을 뒤적여본다.

부드러운 곡선이 직선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시경 검사를 통해 알았다. 이제는 자고 일어나면 이미 상황이 종료가 되지만 가끔 그때의 경험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시경 검사를 하듯 마음으로 밀고 들어오는 작가의 문장에서 동물적인 식물의 이중성을 감지한다. 뾰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직선이다. 불현듯 생생하게 떠오를 듯한 감각이다. 따끔거리는 통증 속에서 한 꺼풀 외피를 벗은 나의 영혼이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일까.

 

p11, 밑에서 9째 줄: 친구 들의 친구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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