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돈키호테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4월
평점 :
품절


줄거리와 등장인물, 심지어 주제까지 너무나 잘 알지만 막상 읽어본 적은 별로 없는 문학 작품. 나에게 '고전'은 이런 의미였다. '읽고 싶다'가 아니라' 읽어야 하는데'에 가까웠던 책. 당위성은 절실하나 자발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으니 고전을 읽어내느라 고전한다. 학창 시절의 심장에는 감동의 물결이 출렁일 틈이 없었다. 광활한 삶의 의미를 담기에 나의 그릇은 좁은 데다 경직되어 있었다.  

한데 시험으로부터 탈출하니 백조가 된 미운 오리 새끼를 영접한 기분이다. 우주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다 별을 마주치면 이런 느낌일까. <데미안>,<오만과 편견>,<노인과 바다>,<프랑켄슈타인> 등 고전 소설을 뒤늦게 읽으며 생경한 느낌을 안는다. 스스로의 동기로 별의 중력에 끌리니 설렘이 깃든다.

인스턴트 식품인 양 시험 공부용 요약본만 휘리릭 맛보던 순간을 벗어나니 비로소 작품에서 우러나는 깊은 맛이 느껴진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온 삶의 경험치가 마음을 보다 유연하게 확장시킨 걸까. 몇몇 고전 소설을 읽으며 슈퍼마켓 매대 위에 누워있는 식자재 대신 생명력을 뿜어내는 실체를 마주하는 듯한 경이를 품는다.


이 책은 고전 소설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다. 실제로 읽어본 사람보다 풍문으로 명성을 들은 이가 많을 것으로 짐작되는 고전. 나 역시 <돈키호테>를 읽어본 적은 없다. AI, ChatGPT가 일상으로 빠르게 침투하는 시대에 17세기 복고풍의 제목 앞에서 주춤한다. 첨단 미래가 휘몰아치는 마당에 과거를 답습하는 게 의미가 있나.

책 표지에 보이는 비디오 가게 간판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보니 얼핏 <응답하라 시리즈>와 겹친다. 추억을 말하는 내용인가. 성급한 가설을 앞세우니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살짝 식상하다. 이거 다 아는 맛 아냐. 워~ 워, 어설픈 편견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세상은 넓고 같은 소재로 펼칠 수 있는 이야기는 무한대로 발산하거늘.

작가는 <돈키호테>의 자유, 모험, 정의(正義), 꿈 같은 요소를 이 작품에 접목한다. 등장인물 역시 돈키호테, 산초, 둘시네아, 로시난테 등에 대응하는 인물들을 설정한다. 30세에 방송국 PD를 그만두고 엄마가 사는 대전으로 온 주인공 솔이 유튜브 채널 '돈키호테 비디오'를 개설하여 15세 때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추억을 만들어주던 돈 아저씨를 찾는 과정이 흡인력 있게 그려진다. <돈키호테>의 21세기판 리메이크 버전이랄까.


뒷부분의 '감사의 글'을 먼저 읽는다. "계속 쓰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어찌나 든든한지. 2013년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적어도 격년에 한 번, 2019년 이후에는 매년 책을 출간한 저자의 약력을 책날개에서 본다. 꾸준함이 주는 신뢰와 함께 뭉클함이 번져온다.

그의 소설 <파우스터>를 읽었을 때 받았던 강렬한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불편한 편의점>시리즈에서는 톡톡 튀는 재치에 반했다면 <파우스터>는 어나더 레벨 상상력으로 감탄을 안겨준 작품이다. 괴테의 <파우스트>도 읽어본 적이 없다. 주입식 교육 현장에서 살아온 덕분에 주제부터 등장인물, 줄거리까지 착실히 꿰고 있을 뿐이다.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했다는 말에 원작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파우스터>의 매력에 폭 빠져 주변 사람들에게 여러 번 추천을 했다. 실감나게 상황을 묘사하며 서사를 이끌어가는 글의 힘에 반했다. 머지않아 꼭 일어날 미래인 것만 같았다. 2D로만 접하던 장면을 3D 입체 영상으로 감상한 듯 생생했다. <나의 돈키호테>에서도 작가의 필력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김호연의 작품은 매번 다음 장면을 궁금하게 만든다. 드라마나 영화인 듯 장면과 장면 사이의 쉼표가 명확하며 읽다 보면 영상으로 동시에 재생이 되는 듯하다. 이야기의 흡인력이 상당해서 마지막까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초반에는 영화 '시네마 천국'이 떠오른다. 비디오 가게, 석유 난로, 예전 영화 등 소설에 등장하는 풍경들에 의식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삶의 흔적들이 펼쳐진다. 익숙한 대전의 동네명이 추억을 끌어온다. 예전에 가졌던 것과 놓친 것을 생각한다. 그 옛날 아픔을 꺼내 보이던 친구를 떠올린다. 보이는 것보다 사물이 가까이 있다는 볼록 거울이라도 마주친 듯 훅 다가오던 느낌이 소환된다. 친정 엄마의 반찬을 맛보는 순간처럼 몇십 년을 거스르는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소설 '어린 왕자'도 떠오른다. 여러 행성을 거치며 왕, 가로등 소등인, 학자 등을 만나는 것처럼 학원장, 학원강사, 출판계 및 영화계 종사자, PD 등의 삶을 돌아가면서 서술한다. 저자는 그 과정에서 업계의 모순, 자본주의와 결합한 인간의 본성을 날카로운 풍자와 함께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돈키호테에서 산초로, 다시 세르반테스로. 돈 아저씨는 결국 돈키호테를 창작한 작가인 세르반테스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산초에서 돈키호테로. 솔이 역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다. 이 책은 두 주인공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담긴 소설이기도 하다.

작가 역시 글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고 있으리라. 그처럼 몰입감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이가 고전 소설을 모티브로 한 소설을 시리즈로 창작한다면, 고전에 대한 관심이 덩달아 높아지지 않을까. 리메이크 곡으로 원곡이 재조명되는 것처럼 말이다. 원작은 자체로도 이미 훌륭하여 몇 세기 동안 읽히는 것이지만, 두 작품을 비교하는 건 또 다른 재미로 신선할 듯하다. 윈윈 리메이크랄까. 나의 리뷰 역시 당신을 이 책으로 끌어당기는 윈윈 리메이크가 되기를.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계속 생각 중이다. 지인들이 퇴직 후 글을 쓰면 되겠다, 책은 안 내냐며 가볍게 말하면 비슷한 무게로 웃어 넘긴다. 사실 책을 내는 데 회의적이다. 현실적으로 독서 인구가 많지 않을 뿐더러 보험 상품을 팔 듯 지인에게 강매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퇴직 후 인생 2막이 열리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삶을 이어갈까.


이야기에는 몰입감과 이벤트가 있어야 한다. 약간의 미스터리와 상큼한 디저트처럼 뿌려지는 반전까지. 에필로그를 읽는 순간, 살짝 소름이 돋는다. 주어인 '나'의 주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와 본문 내내 '나'였던 솔이 대신 돈 아저씨가 등장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나의 돈키호테'는 서로 다른 인물을 지칭하게 된다. 소설의 주제를 관통하는 설정이라 판단한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이 책에 등장하는 멋진 문장들 중에서 내 마음의 원픽은 '인간은 서로에게 매개체' 라는 문장이다. 돈키호테 비디오도, 솔이도, 돈 아저씨도, 다른 인물들도 서로 얽히면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소설 밖에서도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이 소설이 매개체가 되어 나에게 손을 내민다.

마침표가 되기보다 쉼표가 되겠다는 솔이처럼 삶은 문장 부호의 나열인 듯하다. 나는 지금 어떤 문장 부호를 통과하고 있을까. 누군가에게 '나의 돈키호테'라 불릴 순간을 위하여 지금은 내 삶의 모험을 시작할 순간인가. 돈키호테를 열정으로 바꾸어 발음해본다. 나의 열정, 내 삶의 열정... 어쩐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들썩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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