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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와 얼굴
이슬아 지음 / 위고 / 2023년 2월
평점 :
"딸기 사 와야 하나?"
"나 오늘 안 나갔는뎅."
"엄마, 2단계는 생략된 말이라구. 구글도 이렇게 까다롭지 않아. 아빠한테 콕 집어서 딸기를 사오라고 해야지."
옆에서 듣고 있던 딸의 핀잔이다.
"새삼스럽지도 않아."
진짜 새삼스럽지 않은 말투에 웃음기가 묻어있다.
오늘 집 밖으로 안 나갔으니까 딸기를 사 왔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사오라는 얘기지. 속으로 구시렁거린다.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문장으로 옮겨 놓는다. 꺼내어지지 않은 말, 생략된 말, 투명하던 말들이 이제야 보인다. 뭉텅 잘린 문장에 살을 붙이며 의도를 유추했을 당신, 종종 답답했겠구나.
말 뿐만 아니라 얼굴도 그렇다. 사회에서 꺼내어지지 않은 얼굴, 세상에서 생략된 얼굴, 삶에서 투명하던 얼굴들이 있다. 이슬아 작가의 『날씨와 얼굴』은 이런 얼굴들을 스케치한 칼럼집이다. 2021년 1월부터 2023년 1월까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들과 새로 쓴 글 몇 편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는 지구 온난화로 변해가는 날씨에 우리 모두는 운명공동체임을 강조한다. '모두'의 범주에서 누락된 대상을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그녀가 지칭하는 '모두'는 인간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보다 범위를 넓혀 비인간 동물을 아우른다.
인간은 잦은 착각 속에 산다. 지구 위에 인간만이 존재하는 듯 비뚤어진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친다.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세상이라는 오만함 속에서 삶의 패턴을 그린다.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세상이라는 이기심과 더불어 말이다.
1부, '동물에 대해 잊어버린 것'은 동물의 삶과 죽음 등 2단계가 생략된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작가는 동물이 고기의 형태로 식탁 위나 슈퍼마켓 진열대에 놓이기 이전의 삶을 조명한다. 처음부터 고기로 존재하는 동물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동물은 인간과 동등한 생명의 무게를 지닌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언제부터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의 결과물만 바라보게 되었을까. 뭉텅뭉텅 잘려서 깔끔하게 포장되기 이전에 살아있었을 모습을 한 번이라도 떠올려본 적이 있던가. 인간과 대등하게 살아 숨 쉬는 생명체였음을, 인간과 똑같이 생명을 다하면 죽음을 맞이하는 생물이었음을 너무나 당연한 듯 잊고 지내왔다.
생명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먹이 사슬은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이치이리라. 다른 생명에 나의 삶을 빚지는 건 필연적인 과정일 테지만 인간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공장식 밀집 사육이나 동물이 강제 당하는 삶은 인간이 저지르는 명백한 착취의 결과이다.
작가가 비거니즘을 표방한 이유는 동물에 대한 착취에 동참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의 실천이다. '고기'라는 언어로 불리기 이전의 생명체로서의 삶을 존중한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저자는 언어가 은폐하는 폭력의 실체를 까발린다. 물에 사는 동물이지만 죽기 전까지는 '고기'로 불리다 죽으면 '생선'으로 변모하는 존재를, '고기' 덩어리로 포장되어 구체적인 고통이 씻겨 나간 생명체를 담담하게 묘사한다.
처음에는 오타인 줄 알았다. 15쪽에서 소 한 '명'이라는 말을 보며 이런 실수를 하네 싶었다. <목숨을 세는 방식>에 대한 칼럼을 읽고 서야 '마리'를 생명으로 여기는 의도된 명명이었음을 깨닫는다.
세상 대부분의 일을 '어차피'와 '최소한'의 싸움으로 보는 이슬아 작가의 시선에 나를 돌아본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와 '그래도 최소한 이것만을 하지 않겠다'는 문장을 번갈아 읽는다. 삶의 많은 장면에서 핑계처럼 기대왔던 '어차피'를 반성하며 '최소한'을 향해 마음을 뻗어본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냐. 2부, ' 나 아닌 얼굴들'은 나만 예쁜 줄 아는 인간이 쳐다보지 않는 얼굴들을 보여준다. 쿠팡 노동자, 이주여성, 시각 장애인, 농업인, 청소 노동자, 저소득 가구, 장애인, 보호 대상 아동, 아픔을 다스리는 이들, 성소수자, 빈곤층, 여성 등 타인의 얼굴을 차례로 비춘다.
더위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오지 않는다며 '내 더위의 무게와 그들 더위의 무게가 다르다'는 문장 앞에 한참 머문다. 묵직하게 내리 누르던 어린 시절의 더위를 떠올린다. 조금만 더워도 에어컨을 틀고, 한겨울에 집에서 반팔을 입던 작년의 행동이 겹친다. 날씨에 무관하게 살 수 있음에 매 순간 감사해야 하는 것을. 얼마나 지났다고 잊어버렸나.
<깊게 듣는 사람>에 대한 칼럼이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아주 깊게 들을 수만 있다면, 아주 깊게 말할 수만 있다면.' 정혜윤의 『마술 라디오』에 나온다는 문장 앞에서 서성인다. '내가 직접 하지 않는 노동으로 내 삶이 굴러간다는 사실이 자주 새삼스럽다'는 이슬아 작가의 문장 앞에서도. 내 삶에 다시 한 번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다.
3부,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의 목록'을 읽으며 지금까지 언급되었던 내용들을 되새긴다. 저자는 각종 개발과 건설 사업으로 파괴되는 환경을 언급하며 하늘과 땅과 물에 난 길들이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쓰레기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아직 쓰레기가 아니었음을 말하는 그녀는 '너무 많은 옷이 너무 빨리 만들어지고 너무 조금 입은 뒤 너무 쉽게 버려지는 세상' 의 모습을 개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모두가 버리지만 모두가 치우지는 않는 세계에서 어떻게든 해보려는 사람들'이다.
이슬아 작가는 삶에서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의 목록을 작성한다. 반복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실천을 하고 있는지, 그 실천을 이어나갈 건지 다짐을 적는다. 더불어 한 사람의 삶의 앞뒤에 스며들어 생략된 인간과 비인간적인 존재를 잊지 않으려 한다. 그 모습을 문장으로 지켜보는 나에게도 작은 파문이 인다.
오만한 일부 인간은 생략된 존재를 망각한다. 생태계라는 거대한 집단을 인간 중심의 세상으로 바꾼다. 맑은 날, 저 혼자 햇살을 쬐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다른 이들을 그늘에 가둔다. 비 오는 날, 저 혼자 우산으로 시선을 가리며 수많은 동물들을 토르소로 만들어버린다.
조각 미술에서 '토르소'는 얼굴과 팔 다리가 생략된 작품이다. 이탈리아어 '몸통'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예술 작품으로서의 토르소는 몸통에만 시선을 집중시켜 인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하지만 생명체는 예술 작품이 아니다. 마음대로 생략할 수 없고 생략되어서도 안된다.
'얼굴을 지닌 당신께 드립니다.' 책 날개를 펼치니 저자의 문장이 들어온다. 나는 얼굴을 지닌 존재인가. 나 아닌 대상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존재인가. 작가가 글을 통해 내미는 투명한 손이 보이는 듯하다. 무심코 생략해왔던 얼굴들이 느리게 재생된다.
"(지난 주에 내가 새끼 손톱 만한 것까지 몽땅 뜯어서 초토화 시켰던 상추가) 쪼끔 올라왔어."
"엄마,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들어!"
"왜에? 알아들었지?" 미소 짓는 남편에 의기양양해지는 나, "봐봐!"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문장으로 옮겨 놓는다. 꺼내어지지 않은 말, 생략된 말, 투명하던 말들이 이제야 보인다. 뭉텅 잘린 문장에 살을 붙여 정확한 의도를 유추한 놀라운 당신, 나는 이제야 놀라는 중이다.
"아까 내가 상추 얘기할 때 주어를 생략했었어?" "어." "근데, 어떻게 알아들었어?" "올라올 게 그거 밖에 더 있어?"
나의 토르소 화법에서 생략된 얼굴을 보는 당신에게서 은은한 햇살의 온기가 느껴진다. 내가 보지 못했던, 보고도 지나쳐왔을 많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들을 향한 이슬아 작가의 온기와 당신의 온기가 겹치니 덩달아 나도 맑은 날 햇살 한 가닥이 되고 싶어진다.
※ p172, 10째 줄: 중이다 공장식 ~ → 마침표 빠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