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이웃 - 허지웅 산문집
허지웅 지음 / 김영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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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말할까.  '저, 버튼을 누르셔야죠.' 이미 골든 타임을 지나친 듯하여 그냥 입을 다문다. 20층 아파트인데 엘리베이터는 10층에서 11층을 넘어가는 중이다. 어색한 침묵 속을 방황하는 나의 눈은 문 왼쪽에 있는 광고 전광판에 고정된다. 졸지에 지하 주차장 층별 청소 일자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인간으로 등극한다.

혼자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려는 순간, 올라타시던 아주머니가 어색한 침묵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내리는 층의 버튼을 누르지 않으신 그분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마자 응당 이루어져야 할 액션이 없음을 인지한 나, '버튼 안 누르셨어요.' 말할까 잠시 망설인다. '에이,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자. 알아서 누르시겠지.'

끝내 19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어떠한 액션도 없다. 당신의 짐작이 맞다.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은 같이 내린다. 순간 움찔! 인사도 뭣도 아닌 어색한 각도의 고개 숙임 후에 미련 없이 돌아서서 좌우로 갈라진다. 마스크로 만난 이웃의 얼굴을 나는 아직도 정확히 모른다.

여기로 이사 온 게 2020년 2월이다. 앞집 사람들과 나 사이에 삶의 교집합은 없다. 불과 3m도 안되는 거리에서 살아가건만. 물리적인 거리가 가깝다고 무조건 이웃이라 부를 수 없음을 피부로 느낀다. 같은 집에 산다고 무조건 가족이라 말할 수 없는 것처럼.


허지웅 산문집 『최소한의 이웃』은 이웃으로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 지를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에세이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팬데믹으로 인해 더욱 커진 분노와 불신을 거두고 최소한의 이웃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고 책을 펴냈음을 분명히 밝힌다.

그가 정의하는 이웃은 단순히 옆집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나와 너, 혹은 가족을 제외한 불특정 다수를 이웃의 범주에 넣는다. 현실에서, 문학 작품에서, 영화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이웃의 모습을 그린다. 우리는 짧은 일화를 통해 이웃의 모습을 보고, 이웃으로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이 깔끔하다. 최소한의 단단한 뼈대 만을 보는 듯하다. <최소한의 이웃>이라는 제목만큼 내용도 멋지다. 맑고 올곧은 직선으로 만들어진 문장이 심장에 꽂힌다. <작가의 말>이 적힌 두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허지웅 작가의 힘이다.

그는 무얼 알고 무얼 알지 못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우리말은 특히 조사에 따라 어감이 달라지는데, 그의 표현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서술어의 표현 방식이다. '모른다'가 아니라 '알지 못한다'라고 표현한 점이다. 진중한 발자국이 다가오는 듯하여 신뢰감과 겸허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내용은 크게 6부로 나뉜다. 각 부에서는 최소한의 이웃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을 소개한다. 덕목과 함께 나름대로 정의한 용어의 의미에 공감이 간다. 1부 '애정'은 '두 사람의 삶만큼 넓어지는 일', 2부 '상식'은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3부 '공존'은 '이웃의 자격', 4부 '반추'는 '가야 할 길이 아니라 지나온 길에 지혜가', 5부 '성찰'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는 고단함', 6부 '사유'는 '주저앉았을 때는 생각을 합니다'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에피소드는 서론-본론-결론이 깔끔하게 드러나는 구성을 지닌다. 여기에 감성이 더해지니 독자의 심장이 반응을 한다. 감성적인 논설문을 보는 듯하다.

도입부의 제목과 의미가 멋져서 내용을 읽기 전에 살짝 긴장을 한다. 막상 들어가 보면 겉도는 내용에 실망스러운 책을 종종 접한 기억 때문이다. 제목은 번지르르한데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허술하거나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경우 말이다. 1부를 읽고 나니 괜한 염려를 했음을 깨닫는다.

제목에 부응하는 내용이 알차게 들어 있다는 점을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로 꼽고 싶다. 구구절절 만연체로 지루하지도 않고, 너무 짧아 허탈감을 주지도 않는다. 한 호흡으로 읽기에 적절한 분량이다. 소제목이 없어도 누구나 제목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주제가 뚜렷하다.


이웃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에 공감한다.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줄 전능한 힘 같은 건 없지만, 적어도 비참하게 만들지 않을 힘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우리가 서로에게 최소한의 이웃일 때 서로 돕고 함께 기다리며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우리 모두는 결국 서로를 지키는 최후의 파수꾼'이라는 것.

갈수록 사람을 대하는 게 조심스럽다. 예전의 나는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는 인간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웃음 지으며 온화한 분위기는 다 뿜어내면서 속으로는 음흉하게 상대를 깐 적도 많았음을 고백한다. 종종 오만했던 나를 돌아보던 중이다. 이런 시기에 읽은 책이라 더욱 울림이 큰 걸까. 문장 곳곳에서 느껴지는 신중함과 타인을 바라보는 세심한 시선에 강한 매력을 느낀다.

자살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그의 따뜻한 시선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마음이 찡해진다. '그들이 생명을 내어주는 건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그게 가장 무겁고 소중하기 때문이라는 것'.

'아무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음에도 누군가 하고 있는 것들이 기둥이 되어 떠받치고 있기에 하늘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나눌 줄 모르는 둘보다 나눌 줄 아는 하나가 훨씬 행복하다는 것', '누군가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구제될 사람의 자격을 가리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거라는 것', '이웃은 오직 행동으로 결정된다는 것'.


며칠 전에는 행동이 소리 없는 말임을 깨닫는 순간을 경험한다. 이웃에 대한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생각을 하고 있어서 인지 저절로 같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동료에게 시선이 갔다. 세심하게 관찰하니 이기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눈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던 참이다.

지난 화요일, 퇴근 후에 사무실 바닥 왁싱 작업을 한다고 의자를 복도로 내놓고 가 달라는 전달이 왔다. 최소한의 도리는 나의 의자를 내놓고 가는 것이다. 한데 깜빡 잊고 그냥 퇴근해버린 동료들이 있는 거다. 1초를 망설이던 나와 달리 동료 세 명이 망설이지 않고 남은 의자들을 내놓는다. 평소 다른 분들을 자주 돕던 이들이다. 역시 하며 얼떨결에 같이 돕는다.

다음 날, 다시 복도에 있던 의자를 들여놓으면서 바람직한 이웃을 새롭게 발견한다. 업무 분장이 바뀌면서 우리 사무실로 몇 분이 자리를 옮겨오셨는데 그 중 한 명이다. 업무로 오가던 몇 마디 말고는 자세히 알지 못하던 분이다. 한데 나의 의자를 들여놓고 앉으려는 엉덩이를 이 분이 들썩이게 하신다. 아직 출근하지 않은 다른 동료의 의자를 계속 안으로 나르시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당연하지 않은 일을 당연하게 하던 행동은 어떤 말보다도 강력하게 그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 책 덕분에 친하게 지내고 싶은 유형의 동료를 빨리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인지라 책을 읽는 동안 삶을 돌아보는 시간도 덩달아 가졌다.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고  많은 문장을 메모했다.

'내가 쓰는 건 글이지만 결국 상대하는 건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내가 저지른 잘못으로 정해지지 않고 그것을 수습할 방법을 결정하는 순간에 정해진다는 것', '변하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변하지 못하는 것들에는 그보다 더 큰 사연이 있다는 것',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마치 자기가 3루타를 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배리 스위처)', '정답보다 오답에서 찾을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것', '내게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 '보이는 것이 늘 진실을 드러내는 건 아니라는 것', '중요한 건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

오랜만에 제대로 매듭지은 결말을 본다. 소설도 아닌 에세이에 구조적인 이야기 전개가 있을 리 없지만, 저자는 '최소한의 이웃'을 주제로 펼친 이야기에 어울리는 결론을 내린다. 깔끔한 음식을 먹은 기분이다.

이제 남은 건 나의 행동이다.  나는 이웃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모든 책이 그러하듯이 책 속의 이야기는 독자의 행동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므로 저자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p54, 5째 줄: 개재 → 게재

p253, 첫째 줄: 기억하시나요 → ~.(마침표 빠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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