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박상영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6월
평점 :
품절


제목만으로도 힘이 되는 책들이 있다. 안방 한쪽 벽면에는 책장이 있다. 종종 꽂힌 책들의 제목을 주욱 훑어본다. 제각각의 문구들이 나에게 와서 짧은 문장의 조합이 되거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전혀 상관없는 별들이 모여 이야기가 담긴 별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사는 게 뭐라고,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언제 들어도 좋은 말, 내 옆에 있는 사람, 익숙한 새벽 세 시, 오늘처럼 고요히, 인생의 일요일들, 안으로 멀리뛰기, 빼기의 여행,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나를 읽다, 나란 인간,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등이다.

한동안 정신없는 일상을 보낸다. 해야 할 일이 하고 싶은 일을 밀어내고 영역을 넓힌다는 위기감이 들 무렵, 책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책을 뽑아 든다. 제목에 몇 번이나 눈길을 주며 ‘언젠가는 나도’ 를 되뇌던 책이다.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은 친구와 함께 한 여행기이다. 휴식의 공간에서 함께 하는 친구 이야기이다. 그는 '언젠가'나 '어딘가'를 꿈꾸는 게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작은 빈틈을 찾아보고자 한다. 저자에게 휴식은 친구와 동급이 아닐까. 휴식을 목적으로 하는 많은 시간에 친구들이 담겨있는 걸 보면.

소설 같은 에세이다. 저자가 주인공인 탐정 소설 같은  분위기가 있다. 드라마 엔딩처럼 결정적인 장면에서 전개가 끊어진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그의 소설도 이런 느낌일까. 책장에서 대기 타고 있는 『대도시의 사랑법』이 궁금해진다.

구성 면에서는 논설문이 떠오른다. 서론, 본론, 결론의 영역에 소소한 에피소드를 적절히 배치한다. 때로 억지스런 유머 코드가 잠시 걸음을 멈칫하게 만들지만, 여행, 휴식, 관계에 대하여 보다 깊이 사유하는 시간을 건네는 것으로 이 책의 의미는 충분하다. 


1부에서는 휴식 프로젝트를 세우기까지의 배경을 서술한다. 소설로 말하면 본격적으로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에 펼쳐지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다. 슬럼프에 빠져있던 작가는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을 꿈꾼다.

2부는 본론이다. 우연한 기회로 그는 가파도에 있는 레지던시에 입주할 기회를 얻는다. 완벽한 휴식도 취하고 새로운 장편 소설을 완성하고자 하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함께 생활하게 된 작가와 예술가들, 섬의 주민들, 섬으로 놀러 온 친구들과의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휴식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이 맞나 싶게 역동적인 사건들이 그의 일상을 흔든다. 스스로도 섬 생활이 자유와 휴식의 동의어가 되어주지 못했다고 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신선한 삶의 형태를 경험한 것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3부에서는 아나운서 이금희의 삶을 지켜보며 자신만의 결론을 짓는다.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나간 일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 지금 좋으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고, 인연이 다 되면 후회 없이 저벅저벅 걸어가는 삶' 을 보며 커다란 느낌표를 안는다.

그는 여행에서 함께 했던 친구들을 바라보며 관계의 속성을 분석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화석처럼 굳어지는 관계가 많아짐을, 애써 노력하지 않고는 영원할 줄 알았던 관계가 퇴색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목도한다. 지금 이 순간의 반짝임이 곧 인생이라는 게 박상영이 내린 결론적인 믿음이다.

여행 후기처럼 서술한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여행과 관계의 본질을 통찰한다. 일상으로부터의 도피를 꿈꾸며 휴식을 위해 떠나온 여행에서 가장 열렬히 일상에 대하여 생각했음을 말한다.  

 

진정한 휴식은 무엇일까. 퇴근 후에 엄마로서의 일정까지 마치고 100퍼센트의 순도로 갖는 나만의 시간에 여기, 스터디 카페에 와 있다. 책을 읽고, 시나 짧은 에세이를 쓰고, 리뷰를 쓰고, 하루를 돌아본다. 쉬러 가면서 노트북을 챙기는 저자 박상영처럼 내 가방 역시 노트북과 책 등으로 묵직하다.

휴식에 대한 리뷰를 쓰며 나를 돌아본다. 리뷰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어떤 글을 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 일단 말을 꺼내면 줄줄 이어지는 가래떡처럼 생각은 물꼬를 튼다. 나의 글이 나도 모르는 결론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전혀 낯선 생각으로 채워진 공간을 맞이하며 새로운 세상을 포용한다. 나의 영역이 조금씩 넓어진다.

사람은 '휴식'이라는 단어로 이루어진 그릇에 저마다 다른 의미를 채우는 듯하다. 감정의 색채가 드넓음에도 불구하고 꼴랑 '사랑'이라는 두 글자로 퉁치는 것처럼. 나의 휴식 그릇에는 어떤 것이 담겨있나. 박상영의 에세이를 읽어가는 동안 스스로 묻는다.

나에게 휴식은 무엇일까. 단어의 정의를 내리기 전에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야 함을 깨닫는다. 테스 할배를 잠시 소환한다.

나는 휴식에 무엇을 담고 싶은가? 글이다. 책도 글을 쓰기 위해 읽는 목적이 크다.

글에 무엇을 담고 싶은가? '나'이다.

나의 무엇을 담고 싶은가? 아픔, 슬픔, 원망, 공허, 고독 등이다.

무엇을 위해 휴식을 취하는가? 스스로 나를 치유하기 위해서다.

글을 쓰면 후련해지고 뭉클해지고 따뜻해지는 이유가 선명해진다. 토닥토닥 위로를 받고 싶었나 보다, 지금처럼. 그의 여행을 구경하며 나는, 나의 마음을 여행하고 있었던 걸까.


p29, 첫째 줄: 낡고 → 낡은

p42, 2째 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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