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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나는 개인주의자야. 나만 생각해서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무한정 퍼주는 것도 아니니까.”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중간 지점에 있는 개인주의에 매력을 느꼈다. 자아가 형성될 즈음이다. 개인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걸맞게 행동하지 못하니 뚜렷한 정체성을 드러낸 건 아니다. 양극단의 뾰족함을 피해 두루뭉술한 그림자 뒤로 숨었던 셈이다.
『개인주의자 선언』을 접하기 전까지 한동안 나의 성향에 대하여 생각하는 걸 잊는다. 제목을 보는 순간, 기억이 소환된다. 선언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논리로 무장한 기억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는 치기였으리라. 개인주의의 진정한 의미도 모르면서 겉도는 김치찌개 맛처럼 어설픈 옷을 입었던 듯하다.
이 책은 합리적인 개인주의자를 꿈꾸는 판사 문유석의 에세이이다. 그는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 사회를 살아가며 질문을 던진다. 스스로 개인주의 성향임을 당당히 밝히고 주변의 풍경을 그리며 해석한다. 3부로 구성된 이야기는 나, 너, 우리의 카테고리에 포함된 듯 점진적으로 범주를 확대한다. 자신에서 타인으로, 세상으로 점차 사고의 영역을 넓히며 합리적 개인주의의 특질을 고찰한다.
1부에서는 집단주의의 비합리성 비판을 통해 합리적 개인주의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저자는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개인이 주체로 서야 함을 강조한다. 합리성이란 나와 타인을 모두 동등한 존재로 인지하는 것이니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함을 말한다.
1부는 제목부터 벌써 좋다.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라니! 지지받는 느낌에 든든해진다. 거절하지 못했던 예전이 떠오른다. 딱히 상대방의 상처를 걱정한 것도 아닌데 내키지 않으면서도 일을 해준다.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라는 저자의 말이 냉철하다.
2부는 법정 사례를 통해 타인의 속성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린다. 결국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라며 마음을 파악하는 능력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말하기 전에 거쳐야 한다는 「세 황금문」이 인상적이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이 질문들이 떠올라 삼킨 말들이 제법 있다.
3부에서는 세상을 해석한다. 현실을 포함해서 다큐멘터리와 영화, 책 속에 담긴 세상의 모습이 등장한다. ‘있는 그대로 외면하지 않고 직시할 것, 진짜 용감한 건 자그마한 시도라도 해보는 것.’ 저자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인지하고 주체적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는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배스킨라빈스 입구에서 나를 가로막던 네모난 덩치의 압도적인 존재감. 되돌아갈 타이밍을 놓쳐 주춤주춤 헛손질하던 느린 손가락. 등을 향해 쏘아지던 침묵의 눈총. 가차 없이 친절하여 더욱 민망하던 ‘카드를 다시 대주세요.’의 단호함. 오른손엔 스마트폰을, 왼손엔 스페어타이어인 양 교통카드를 들고 “띡”의 허락음을 기다리던 손바닥의 땀. 테이블 한쪽 옆에 얌전히 대기타고 있는 식당 메뉴 모니터에 흠칫 흔들리던 동공. 신․구 문물의 경계에 서 있는 원시인이 바로 나다. 눈 딱 감고 한 발을 내딛는 데 얼마나 조마조마한 용기가 필요했던가.
얼마 전, 지마켓에서 물건을 주문하셨다는 친정어머니가 생각난다. 은행 거래도 영업시간 전에 가셔서 통장으로 처리하시는 당신이 그 어려운 걸 해내셨다. 80대 노인이 느끼는 세상은 나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고 낯선 모습이리라. 혼란 속에서 끌어내셨을 당신의 용기를 가늠하며 덩달아 더듬더듬 세상을 따라갈 용기를 낸다.
온라인을 통한 표현의 비중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저자는 SNS에서 이루어지는 인정투쟁의 현실을 날카롭게 조명한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나는 ‘나’이면서도 완벽하게 ‘나’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보여주고 싶은 ‘나’이니까. 글쓰기도 같은 맥락으로 본다. 의도한 문장만을 보여주니까. 많은 행위가 참과 거짓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다. 세상에 완벽한 진실이 있을까. 진실이라고 믿는 주체의 믿음만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빅데이터 전문가 송길영의 인터뷰 장면을 보았다. 지난 9월에 출간한 저서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를 중심으로 진행된 대담이다. 핵개인은 핵가족과 비슷한 맥락으로 정의한 신조어이다. 대가족이 붕괴되어 핵가족이 되었다지만, 이마저 더욱 작게 쪼개져 개인으로 서는 시대가 왔음을 예측한다. 빅데이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도출한 결과이다.
사회자와 작가의 대화를 경청하니 살짝 소름이 돋는다. 8년 전 문유석 판사가 이 책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묘사한 합리적 개인주의의 개념과 상당 부분 맥락이 통하기 때문이다. 송길영과 문유석 모두 ‘세대가 아니라 시대’가 변했음을 강조한다. 공감한다. 나만 해도 이 인터뷰를 접한 미디어가 그렇게나 생소하게 느껴지던 유튜브였으니까.
유튜브로 ‘김필 노래 모음’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쓴다. 요즘 가장 많이 찾는 미디어 콘텐츠는 유튜브와 알라딘 인터넷서점의 창작 플랫폼 서비스 ‘투비컨티뉴드’이다. TV 앞에 앉았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라면 환장을 하는 드라매니아지만 본방 사수도 드물어졌다. 넷플릭스로 몰아보거나 연휴를 이용해서 전편을 정주행한다. 유튜브에서 음악 모음을 찾아 듣는다. 예능 프로그램은 클립 영상을 보거나 쇼츠로 볼 때가 많다. 2~3분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게 느껴지는 중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한 행동이 아니야. 내가 보기에 지저분한 게 불편해서 치운 것뿐이야.”
대학교 1학년 때, 칭찬하는 나에게 친구 C가 웃음 지으며 한 말이다. 수업에 미리 와 있던 C는 강의실 바닥에 널려있던 휴지들을 치운다. 나의 관점에서 C의 행동은 이타적이었지만, 그의 관점에서는 자신의 주변을 청결하게 만드는 개인주의적 행동이었던 거다.
주변이 지저분할 때면 그 말을 떠올리며 정리했다. 쓰레기를 줍고 나의 책무가 아니어도 일 처리를 했다. 그저 보고 있기가 답답해서 나를 위해 움직였다. 행동하면서 스스로 약속한다.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인데’라는 떨떠름한 생각은 갖지 말자고. 자발적인 동기로 움직이니 불만은 없다. 약간의 원망이라도 끼어들면 행동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하예일님의 시 ‘디딤돌 2’(feat. 투비컨티뉴드)가 생각난다. ‘디딤돌’은 비 오는 날, 놀이터 옆에 생긴 물웅덩이에 발이 젖지 않도록 누군가 놓아둔 돌 두어 개에 관한 시이다. 낯 모르는 따스한 배려에 말랑해진 마음이 담긴다. 압권은 2탄이다. 시인은 맑은 날, 같은 장소에 놓여 있던 디딤돌이 치워진 장면을 목격한다. 놀이터에서 노는 어린 발을 위한 배려다. ‘같은 장소 다른 생각 / 결국은 닮은 맘’. 반대의 행동이지만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세상은 한 개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우리는 모두 함께이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세상을 산다. 앞서 언급한 두 편의 시 ‘디딤돌’,‘디딤돌 2’의 주인공도 자신을 위해서 돌을 가져다 놓았을지 모른다. 그 옛날 나의 친구가 그러했듯이 스스로 보기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우리 사회에서 집단주의 문화가 붕괴해가는 현상은 분명한 사실이다.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중심축은 자존감으로 세울 수 있으리라.
봄부터 신호를 보내오던 무릎이 여전히 말을 건다. 의식적으로 평지 걷기 시간을 늘려서인지 점점 통증이 약해지는 중이다. 골관절염약을 복용하면서 근육을 키우는 치료법이 현재로서는 유일하다. 다양한 운동 방법을 검색하면서 깨닫는다.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나만의 운동이 가장 좋은 선택지라는 것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의 크기는 어느 만큼일까. 이기주의, 개인주의, 이타주의 모두를 개인주의의 범주에 넣어본다. 사유하는 영역의 크기가 다른 동심원을 상상한다. 발바닥만큼이냐, 두 팔 벌린 크기냐, 전 지구를 품고 자신과 동일시하느냐의 차이로 구분하면 어떨까. 누군가의 원이 작다면 한계가 거기까지라 여기는 식으로 말이다. 개인주의의 합리성은 개개인이 그리는 동심원에서 교집합이 만들어질 때 구현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