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마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21년 12월
평점 :
품절


열한 계단을 올라 우리가 언젠가 만나기를 희망했다. 지대넓얕안에서 그토록 방대한 우주적 스케일의 지식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하는 세심함이라니! 그의 소설도 전작들과 결이 비슷하리라. 어두운 공간을 걸어가는 발밑에 야광 이정표라도 깔아주면서 나를 이끌어줄지도 모르지. 채사장의 글에 홀딱 빠져버렸던 나는 그의 첫 소설에 은근한 기대감을 품은 채 겉표지를 넘긴다.

하아~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소설은 이런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며 무의식적으로 틀을 만들어 억지로 집어넣으려했나. 주인공의 아버지가 신의 개념까지 떨쳐내라며 신을 조각한 나무 형상을 태울 때부터 진즉 알아봤어야 했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멍했다.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이 소실된 듯했다. 이질적인 느낌이 나를 둘러쌌다. 소설을 건네주는 그는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원자의 크기를 언급할 때면 흔한 비유로 축구장이 등장한다. 원자가 축구장이라면 중심에 있는 원자핵은 축구장 중앙에 놓인 구슬이며 전자는 축구공 근처에 떠도는 먼지 정도라고 말이다. 상상하기 어렵지만 과학자들이 내린 현재까지의 결론은 원자가 텅 비어있다는 것이다. 소설소마를 읽어가면서 많은 시간동안 나는 원자를 떠올렸다. ‘전자에 의식을 실은 내가 원자핵까지 도달하면서 원자의 스케일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웠다. 작가가 주제로 심어놓은 고갱이까지의 거리가 내게는 너무 멀었다.

매끄러운 연결성이 동반되었더라면 조금은 나았을까. 채사장님! 이번에는 쫌 시크하셨습니다! 소설 속에 뿌려놓은 요소들에 비하여 다소 산만하게 서사의 얼개가 겉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뚝뚝 끊어지는 이야기를 접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의 운동장을 질주하여 중앙에 도달하려면 엄청난 내공의 근육질 다리가 필요하다. 한 번의 독서로 전체적인 서사를 아우르기에는 어려움이 컸다.

 

이 책은 소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전쟁 영웅 남자의 일대기를 그린 이야기이다. 영화로 제작된다면 19금 등급을 받으리라 짐작될 내용들이 지뢰처럼 포진해있다. , ~ 오해는 하지 마시길. ‘어멋!’이 아니라 으악!’이니까. 손으로 눈을 가리는 액션을 취하는 척하면서 실눈 뜨고 보고 싶을 내용이라서가 아니라 절로 눈이 감길만한 잔혹성 때문이다. 중세의 마녀 사냥이나 종교 탄압, 전쟁 중 자행되는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된 장면들이 가감 없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이야기 전개 상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그런 표현들이 커다란 틀에서는 은유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동굴이 그냥 동굴이 아니었던, 은유가 사막의 모래알인양 쫙 깔려있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말이다.

소마의 사전적 의미는 다중적이다. 고대 그리스어로는 을 의미한다. 인도 신화에 나오는 신이다. 환각 작용이 있는 고대 음료 겸 제례 도구 겸 힌두교의 신 이름이기도 하다. ‘힌두는 산스크리트어로 거대한 물을 의미하는 신두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여러 의미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탄생한 이름이리라 짐작한다. ‘물과 같고 바람과 같고 허공과도 같다며 주인공 이름의 의미를 언급한 책 속의 내용이 사전적 의미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세 번 바뀐다. 소마였다 사무엘이였다 아틸라였다 소마로 돌아온다. 매트 헤이그의 휴먼에서도 이름 관련 내용이 등장한다. 살아 있는 소는 카우(Cow)’라고 부르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소는 비프(Beef)’라 부른다며 인간의 이중성을 꼬집는다. 한때 생명체였던 소를 먹을 때는 이름을 바꿔 부르며 살아있는 소를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 소의 정체성이 사라지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이름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는 거다. 채사장이 주인공의 이름에 변주를 준 이유도 마찬가지 아닐까. 결국 소마의 이름으로 돌아온 것처럼 이름이 바뀌어도 그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분위기나 스케일로 보면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가 떠오른다. 드라마에서 서사가 펼쳐지는 초반에는 워낙 방대하게 전개되는 내용에 갈피를 잡지 못했더랬다. 주인공들이 그 상황에서 왜 그런 대사를 했는지, 그 장면이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후반부에 가서야 대략적인 얼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다시보기를 하면서 하나하나 의미를 짚어보니 짐작하지 못했던 거대 스케일의 서사가 쓰나미로 몰려왔던 기억이 난다. 소설소마에서도 비슷한 면이 보인다. 다만 겉표지의 홍보문구처럼 매혹적인 캐릭터나 압도적인 스케일은 아닌 듯하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주인공이나 이야기가 내 취향이 아닌 이유가 크다.

6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출입문에 해당하는 1부가 가장 견고하다. 1부는 내면을 묘사한 문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가장 넘기 어려운 관문이다. 여기에서 헤매면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는 데 난항을 겪는다. 입장료를 제대로 지불하면 2부부터는 점차 주인공의 발걸음에 맞춰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 1부는 다음과 같이 열일을 한다.

첫째, 과연 주인공은 화살을 찾을까 궁금증을 유발한다. 소마의 아버지가 화살을 쏜 다음 그걸 찾아오라고 한다. 이 내용을 접했을 때, 나는 작년 가을에 읽은 파울로 코엘료의 아처를 떠올린다. 비슷한 전개가 이루어질까 예상한다. 소설 초반에 화살의 행방에 집중했던 이유다. 화살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파란만장한 여정이 등장하겠구나.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 한 그루만 노려본 나의 잘못이 크다. 화살은 상징적인 도구였던 것을.

둘째, 신비스러움을 북돋는 깨알 같은 요소들이 기대감을 불러온다. 이를테면 오감을 상징하며 산스크리트어를 연상케 하는 신들, 방황하는 들개, 신비한 저수지, 퀴즈를 내며 세 가지를 갖다 바치라는 요상한 신 비스므레한 거대한 존재 같은 것들이다. 개별적인 요소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나는 의미심장한 복선을 예상한다. 소설 중반을 건너는 과정에서 연결고리를 찾으려다 망한다. 함정에 제대로 빠진다. 작가는 융단인양 깔린 서 말의 구슬을 마지막 6부에서 꿰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는 2부에 들어서면 서사는 점차 모습을 드러낸다. 재독을 할 때에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에 집중한다.

첫째, 주인공 소마의 시선에서 내면과 외면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서사이다.

주인공이 겪는 사건은 파란만장하다. 고난의 정도를 높낮이로 비유한다면 갭이 매우 크다. 1층에서 63층까지 올라갔다가 지하로 뚝 떨어진다. 다이내믹하다. 집도 부모도 모두 잃은 천애고아로부터 세상을 지배하는 왕으로 우뚝 섰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출발할 때는 육신이라도 멀쩡했건만. 작가는 작정이라도 한 듯 소마의 감각 기관을 하나씩 떼어낸다. 눈깔을 후벼 파고 혀를 뽑고 귀를 자르고 코와 손가락을 베어낸다. 외면을 상상하면 소름 돋지만 이 과정은 상징성이 짙다. 소설 초반에 등장한 오감과의 연결고리로 작용한다.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다시 소마 아버지가 등장하여 매듭을 짓는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정신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사유이다. 모든 걸 다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걸음을 멈추고 나서야 걸을 수는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외형적인 요소를 전부 상실한 주인공은 그제야 내면세계로 걸어 들어간다.

둘째, 소마 주변에서 환경으로 등장하는 인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서사이다.

이야기의 흐름을 중심으로 언급되는 문장들은 인간의 적나라한 속성을 날카롭게 조명한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를 말하니 자신이 하나에 하나를 더해서 말하는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믿어버린다든지, 진짜 고통에 이르기 전까지는 삶으로 돌아오고자 하지만 진짜 고통에 이른 후에는 어서 빨리 죽음에 이르기를 소망한다든지, 겁쟁이의 뱃속을 지난 말은 겁쟁이가 된다든지, 습관이 되어버린 삶이 나태한 일상으로 변모하는 과정이라든지. 진실과 거짓, 배반과 신뢰, 야망과 이기심, 진정한 사랑,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루어지는 복수, 복수가 복수를 낳듯 누군가에게 구원되었던 소마가 다시 누군가를 구원하는 과정들은 인간 존재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혹시 당신이 이 책을 읽으려는 마음이 동한다면 두 번 읽기를 권한다. 아무 생각 없이 내용을 받아들이는 일독은 직역이다. 겉표지에 그려진 멋들어진 바다에서 하얗게 부스러지는 파도의 물방울을 보는 과정이다. 재독에서는 의역하듯 내용의 상징성을 생각해보면서 심해로 들어가 거대한 바다가 품고 있는 무언가를 들여다본다. 당신의 눈앞에 다가올 장면은 내가 본 그것과는 분명 다르리라. 바다는 넓이와 깊이와 온도의 스펙트럼이 커다란 폭으로 펼쳐지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여행자로서의 여정에 비유하며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여행자를 멈춰 세우거나 계속 걷게 하는 동인은 무엇인가. 멈춰 세우는 건 지나온 여정에 있다고 한다. 충분했는가, 만족했는가, 이만하면 되었는가, 지쳤는가 하고. 더 걷게 하는 건 내일에 대한 기대에 있다고 한다. 볼 것이 남았는가, 해야 할 것이 남았는가, 닿아야 할 곳이 있는가 하고. 4부에 등장하는 이 문장들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유의 핵심이 있다고 해석한다.

두 번째 읽고 나서 표지를 다시 바라보니 바다라고 생각했던 이미지가 우주와 닮아있다. 파도로 부서지는 물방울 위로 우주 공간에 흐드러진 별들이 겹쳐진다. 바닷물을 머금은 채 깊어지는 짙푸름이 원자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텅 빈 우주 공간으로 보인다.

우주를 불러오는 책이 있다. 꼬깃꼬깃 접힌 형상기억합금마냥 내 안에 존재하는 지도 모를 우주가 밖으로 화들짝 펼쳐진다. 혹은 서늘하고도 몽글몽글한 우주만한 크기의 풍선이 내 안으로 빨려 들어와 마음이 확 넓어진다. ‘를 경계로 안과 밖으로 펼쳐지는 우주에 압도당한다. 우주에 흡수되듯 몽환적이다. 선택지는 두 가지. 받아들이든지 단지 나를 스쳐가도록 지켜보든지.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은 지나간 일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과거는 변한다. 변치 않는 사실을 뼈대로 한 채 우리는 해석의 살을 붙인다. 그때 내가 이랬어야 했나. 그러길 잘했지. 지점토를 이용하거나 찰흙을 붙이거나 혹은 커다란 틀을 제작하여 석고 물을 들이붓는다. 나의 서사는 현재의 나를 기준으로 재창조된다. 과거가 매번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과거에 대한 해석이 과거를 달라지게 한다는 것. 그 해석을 위안으로 삼아 미래를 향해 한 발씩 나아갈 수 있는 지도 모른다. 나만의 이정표를 가지고 조금은 덜 불안한 마음으로 내딛는지도.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찾는다. 모든 종류의 문학 작품은 이런 속성을 내포하는 건 아닐까. 판타지적 요소가 담겨있든 다큐의 형태이든 인간을 통해 언급되는 모든 종류의 이야기는 바로 인간의 의식을 통과해서 나오므로. 100% 현실적인 이야기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을 보도하는 뉴스도 보도하는 이의 관점에 따라 전혀 상반된 이야기로 탈바꿈하는 경우를 무수히 목도하지 않았는가. 모든 이야기 속에는 나의 삶으로 끌어들여 여행의 지도에 추가할만한 요소가 분명 존재하리라.

어떤 요소를 흡수할 지는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 여행을 하는 독자의 몫이다. 채사장이 언급한 것처럼 이야기는 삶과는 다르고 삶은 지리하게 이어지지만, 우리는 여행을 계속 해야 하니까. 작가는 소마의 여행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에게 허락된 하나의 좁은 길로 걸어갈 수만 있을 뿐, 멈출 수도 돌아갈 수도 없다고. 소마의 아버지는 말한다. 화살이 아니라 화살을 찾아가는 과정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이런 맥락이라면 주인공의 상황처럼 감각기관을 포함한 상실들에 대하여 절망할 필요가 없다. 결과는 순간일 뿐 마침표가 찍히기까지 걸어온 과정 자체로 그 의미는 충분하므로.

 

 

p210, 마지막 줄: 주신다며 주신다면

p235, 밑에서 9째줄: 옮기 때마다 옮길 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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