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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 어느 외계인의 기록 ㅣ 매트 헤이그 걸작선
매트 헤이그 지음, 정현선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하나의 영역에만 머무르기에 그 의미하는 바가 큰 개념들이 있다. 관성도 그 중 하나. 어원은 ‘게으름’으로 변화를 싫어하는 개념이다. 관성을 맨 처음 언급한 과학자 케플러도 이토록 광범위한 의미로 적용되리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가시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분야에 사용된다면 보다 적절한 의미로 다가갈 수 있겠다. 이를테면 삶과 인간의 성향 같은 인문학적 영역 말이다.
‘정지’의 반대 개념은 ‘움직임’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지만 100% 옳은 문장은 아니다. 관성의 영역에 들어서면 움직이는 상황이 정지해있는 것과 동일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개념이 하나로 묶인다. 모순처럼 여겨지지만 몇 번을 음미하면 깨닫게 된다. ‘움직임’이 제로에서 무한대까지 폭넓은 범주를 지닌다는 사실을. 움직임은 조금 더 디테일하게 묘사되어야 한다. 또 다른 부사어가 추가되어야 제대로 설명된다.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그 정체성을 결정한다.
관성에 포함되는 움직임은 제로 상태의 개념이다. 속력이든 방향이든 아무런 변화 없이 단지 움직일 뿐이다. 영원히 직진만을 지속하는 상황이다. 생물이라면, 살아있지만 살아있다고 보기 어려운 존재랄까. 정반대의 개념이 결합된 식물인간에 비견된다. 동물이지만 움직일 수 없다는 점에서 식물의 정체성을 지닌 사람. 식물을 규정짓는 광합성도 하지 못하니 이도저도 아닌 서글픈 대상 말이다.
소설『휴먼』은 지적으로 뛰어난 외계인이 리만 가설을 증명한 수학자로 변신하여 그의 아내와 아들을 죽이라는 지령을 수행하려다 그들을 사랑하게 되어 인간으로 눌러앉는다는 이야기이다. 키워드는 인간의 ‘관계’와 ‘사랑’이다. 저자 매트 헤이그는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낯설게 하기’ 기법을 도입한다. 문학의 본성이야 근본적으로 낯섦을 전제하지만 그는 모든 개념을 새로 정의하고자 한다. 인간이라면 당연하게 여기는 개념 하나하나에 낯섦을 불어넣으려 한다면 인간의 여집합은 필수적이다. 외계인 능력자 등장하신다.
많은 이들이 당연함의 의자에 편하게 앉아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고 당연하게 말한다. 저자는 최소한의 의자조차 걷어차고 벌떡 일어난다. 천을 떠다 옷을 만드는 게 아니라 씨실과 날실을 엮어 천을 직조하는 과정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런 시도를 하는 저자를 따라가는 독자는 당연하게 여기던 개념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당연함의 함정에 가장 먼저 빠져들기 쉬운 관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저자가 바라본 관계의 출발점은 가족이다. 그는 이 가족의 구성원을 해체한다. 아내와 자식과 남편을 민낯으로 바라보게 한다. 독자는 주인공을 바라보며 덩달아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편견 없이 바라보는 가족의 구성원들이 새삼 낯설다. 완전한 객관성이란 존재하기 어렵다지만 약간의 거리 두기만으로도 상당히 효과적이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가 <샘>이 되는 순간, 마음에는 낯선 바람이 분다. 예술에도 적용되는 ‘낯설게 하기’는 러시아의 형식주의자 빅토르 쉬클로프스키가 제안했다는 개념이다. ‘형식’이라 하면 얼핏 실속 없는 껍질, 물건을 잠시 둘러쌌다 버리는 포장재가 연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은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형식보다는 내용이 알차야함은 물론이다.
문학에서는 형식도 어느 부분 중요하다. 내용과 형식의 범주를 어디까지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겠지만 형식은 독자의 시선을 효과적으로 끌어당기는 최전선에 있다. 묵직한 산문보다 몇 줄의 시가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 시는 블랙홀처럼 많은 것들을 압축해서 넣어야 한다. 엄청난 내공이 필요한 장르이다. 산문보다 시가 어렵다는 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
많은 작가들이 ‘관계’와 ‘사랑’을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외계인을 도입하여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다시 정의한 매트 헤이그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무엇을 재현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관성의 옷을 입은 대상 중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관계’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시선이 가장 많이 간 부분은 아내와의 관계, 아들과의 관계였다. 분명 사랑에서 출발했을 관계성은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면서 점점 퇴색된다. 사랑이 메말라버린 채 관계만이 남은 삶. 그들의 연결은 문서 위의 화석인 듯 굳어진다. 그들에게 사랑은 과거형이다. 외계인은 관성을 깨뜨리는 외부의 자극과 같다. 저자는 이를 통해 ‘관계’와 ‘사랑’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라 속삭인다.
관성은 사람을 무감하게 만드는가. 당연하다 여겼던 것들을 돌아본다. 마음의 집에 당연하게 놓여있던 가구들이 들썩인다. 신선한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바람은 가구와 만난 최초의 순간으로 나를 데려다놓는다. 나만의 정의로 이름 붙여져 내 주변에 놓인 대상,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존재감이 흐려지던 무엇을.
태양이 하나인 것은 당연한가. 달이 지구 주위를 맴도는 건 또 어떠한가. 구름, 눈, 비, 바람, 안개에 이르기까지. 날씨에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 어딘가에는 존재할 텐데. 순간 이동, 물질 변환, 생체 설정 등 컴퓨터 프로그램을 재설정하듯 버튼 몇 개로 가능한 세상. 여행기 캡슐, 문자 캡슐, 알약 먹듯 책을 삼키며 소화하는 존재를 상상하며 즐거웠다. 일주일을 보내는 방식에 대한 제안이 새삼스러웠다. 일주일을 힘들게 허덕이고 주말과 휴일 이틀만을 즐기려할 게 아니라 닷새를 신나게 보내는 방식으로 관점을 바꿔보라는 것.
주인공이 지니고 다니는 ‘기프트’에도 감탄한다. 저자의 네이밍 중 베스트라 꼽는다. ‘gift’는 ‘선물’ 또는 ‘재능’을 의미한다. 의미를 곱씹으면 정반대의 개념을 내포한다. 대개의 경우, 선물은 밖으로부터 온다. 반면 재능은 가지고 태어난 능력이니 안으로부터 발휘되기 마련이다. 주인공의 기프트를 보며 나의 기프트를 생각한다. 레벨 차이가 엄청 나겠지만 나에게도 분명 기프트가 있으리라. 그게 어떤 ‘재능’이든 ‘선물’로 여기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내용면에서 굳이 아쉬운 점을 찾자면, 아들을 사랑하기까지의 동기가 살짝 억지스럽다는 점이다. 아내에게 사랑을 느끼는 과정은 첫눈처럼 너에게 갔다 쳐도 그 짧은 교류로 부성애가 느껴질까 싶은 거다. 외계인 주인공님! 보나도리아에도 금사빠가 있을 테죠?
작가의 또 다른 소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에서도 느꼈지만 매트 헤이그의 강점은 후반부의 휘몰아침에 있다고 본다. 소설의 전개에서 음악이 느껴진 달까. 크레센도인 듯 점점 세지면서 아첼레란도처럼 점점 빨라진다. 이런 이유로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개운하다. 뒷맛이 깔끔한 소설이다.
『휴먼 2』가 등장한다면 다른 버전의 외계인은 어떨까. 외계인이라고 전부 우리 지구인보다 뛰어나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이 광활한 우주에 우리보다 덜 뛰어난, 보살펴주어야 하는 외계인도 있지 않을까. 그런 존재가 억 년에 한 번씩 부는 차원 이동 폭풍에 휘말려 어쩌다 지구로 떨어지는 거다. 지구인으로 귀화되는 결말은 똑같다. 과정은 거울처럼 이루어진다. 소설의 핵심은 이 외계인에게 휴먼을 알려줘야 한다는 거다. 매트 헤이그의『휴먼』이 ‘뛰어난 외계인이 인간의 본성을 외부에서 깨닫고 습득하는 이야기’라면, 『휴먼 2』는 지구인의 내부에서 스스로 나온다는 점이 다르다. 어떤 점을 발췌하여 어떻게 가르쳐줄 것인가가 핵심이다. 가르치려면 근본적으로 제대로 알아야 하니까. 당신이라면 하얀 도화지에 인간의 무엇을 어떻게 언급하겠는가.
같은 작가의 글을 두 번씩이나 찾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처음의 선택은 우연의 요소가 개입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순전히 자발적인 의지의 소산이다. 그의 작품을 펼치면서 무심코 기대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을 보고나니까 알겠다. 삶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좋았던 거다.
매트 헤이그의 글에는 따스함과 희망이 담겨있다. ‘비극은 아직 익지 않은 코미디’이며 ‘실패는 빛의 속임수’ 이다. 깊은 삶을 중요하다 하면서도 태양을 볼 수 있을 정도의 깊은 굴만을 파도록 권한다. 할 수 있다고 해서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다독인다. 차가운 건 우주만으로도 족하다며 따스함의 중요성을 말한다. 우주의 평균 온도를 떠올리면 세상은 이토록 추울 수 없다. 그의 글은 영하 270도의 우주 안에도 뜨겁게 타오르는 별이 있음을 일깨워준다. 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린 마음은 데워진다. 희망은 심장으로부터 피어나는 불씨이기 때문이다.
사소해 보이는 방향의 변화로 달라지는 결과가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가. 관성으로 흘러가던 삶에서 낯선 글을 만난다는 건 결코 평범한 사건이 아니다. 삶이 느닷없는 힘을 받는 것과 같다. 3부의 제목처럼 상처 입은 사슴은 가장 높이 뛴다. 힘은 나를 변화로 이끈다. 삶의 관성을 깨뜨리고 얼마나 방향을 바꿀 것인지는 우주 안에서 오롯이 존재하는 스스로의 몫이다. 그 힘이 나를 아프게 하든 보듬어 주든 어느 쪽으로든 의미가 깊지 않을까.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휴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