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만든 공간 -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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볶음 요리용 양파를 썰 때면 떠오르는 건축물이 있다.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이다. 사진으로 본 게 전부이지만 강렬한 아름다움이 각인되어 비슷한 사물을 볼 때면 종종 생각난다.

실물로 본 건축물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서울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다. 실용을 넘어 거대한 규모의 미술 작품을 보는 듯 주변 공간은 순식간에 미술관이 되어버렸다. 스케일과 디자인에 압도당했다. 한참을 바라보니 궁금해졌다. 저런 곡면으로 꿀렁거리면 무너지지 않을까.

A4용지를 이용한 다리 만들기를 주제로 융합과학탐구대회를 진행했던 기억도 난다. 견뎌야하는 무게와 미적인 요소까지 고려해야 하는 과제였다.

여러 건축물을 떠올리다보니 하나의 건축물이 완공되기까지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아주 많다. 건축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분야임을 새삼 깨닫는다. 지반의 구조와 성질도 알아야하며 측량에서는 수학이, 주변 환경의 영향을 고려한 건축 재료를 선택하려면 물질의 특성을, 건축물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역학을, 채광을 위한 빛의 투과율을, 태양의 이동 방향에 따른 일조량을, 게다가 외관의 미적인 요소까지 고려해야 하니 종합 예술이라 할 수 있겠다.

 

과학적인 내용을 시작으로 문명의 발생과정을 따라가다 보니 의아했다. 건축에 관한 책인데 벽돌 한 장 언급되지 않고 뜬금없이 빅뱅과 문명의 기원이라니! 건축물에 적용되는 과학적인 원리가 아니라면 무슨 관련성이 있단 말인가.

베일은 서서히 벗겨졌다. 저자는 결과물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근원을 파헤치고 싶었던 거다. 빛이나 빅뱅은 건축물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기원을 말하기 위함이었다. 문명의 발생은 집의 필요성을 말하기 위한 역사적 배경이었다.

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아래의 뿌리를 보아야 한다.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 문명의 발생뿐 아니라 그 이전에 나타난 기후의 변화부터 성찰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과정일터이다. 기초 공사부터 건축물이 완공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간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는 결국 문화의 차이로 발현된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과학적인 요소도 놀라웠지만 그 사실을 발견하고 적용한 사람들의 노력도 대단했다. 저자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따라갔다. 이유 없다 여겼던 현상들이 긴밀한 인과 관계로 맞물렸다. 내가 몰랐을 뿐인 이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건축의 기원은 빙하기 이후 발생한 지구온난화에서 출발한다. 빙하가 녹아 바다로 흘러들어가면서 육지의 물이 부족해진다. 사람들이 물을 찾아 모여들다보니 식량문제가 생긴다. 이를 농사로 해결하면서 정착생활이 시작된다. 문명의 출발이다.

농사에 있어 강수량은 곡물의 종류를 결정하게 만드는 요소이다재배방식은 건축물의 형태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 저자는 동양과 서양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 강수량의 차이에 따른 건축물의 차이를 설명한다.

강수량이 많아 벼농사를 짓는 지역에서는 농사가 집단으로 이루어진다. 상대적인 관계가 중요해진다. 건축물 역시 주변의 자연환경과 관계를 맺는 형태로 지어진다. 개방적이며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야까지 고려하게 된다. 반면 강수량이 적어 밀농사를 짓는 지역에서는 농사방식이 개인주의적이다. 절대적인 가치관이 형성되며 기하학적인 건물의 형태를 낳는다.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시야를 고려하다보니 건물 자체가 웅장하다. 벽으로 가려진 사적인 공간이 만들어지며 무거운 벽을 지탱해야 하므로 창문은 작을 수밖에 없다.

강수량이 적은 서양의 땅은 단단하므로 돌과 벽돌을 사용한 벽 중심의 건축물이 지어진다. 반면 동양의 땅은 강수량이 많아 무르므로 상대적으로 가벼운 나무를 이용하여 기둥 중심의 건축물이 지어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서양의 체스와 동양의 바둑, 한자와 알파벳 등 동서양의 문화를 비교하면서 건축과의 연관성을 찾는다. 기본적인 골조부터, 지붕의 형태, 담장의 높이, 창문에 이르기까지 동양과 서양을 비교하며 차이를 서술한다. 책을 읽다 보면 무심코 지나치던 건물들을 한 번 더 바라보게 된다.

공간과 시간이 건축물에 미치는 영향도 흥미롭다. 공간이 넘쳐나는 지역은 시간 거리를 줄이는 방향으로 건축이 이루어지며 공간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지연시키는 방향으로 건축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적절한 예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 버스, 철길을 두 그룹으로 구분해보라 하고 이를 해석하는 부분은 감탄스럽다. 당연히 기차와 철길이지! 이 두 가지를 하나의 범주로 묶은 나의 사고방식이 동양적인 관점에서 나왔다는 해석을 보며 놀랐다. 원숭이, 사자, 바나나가 언급된 문제에서도 나는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었다. 관계를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유전자가 이어지듯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살짝 소름이 돋았다.

건축의 한가운데서 다방면으로 손을 뻗어 건축을 외치는 저자답게 다양한 요소들이 건축과 연결되어 있었다. 여행지에서 가이드를 따라가듯 저자가 언급하는 건축물들의 디테일한 매력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는 듯했다.

 

곤충의 탈피가 일어나듯 도약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건축물의 발달사를 지켜보면서 묘한 생각이 들었다. 무생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여겨졌다. 이 책이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열린 결말이라는 점이다.

철골과 콘크리트라는 단단한 재료는 건축디자인의 폭발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불필요한 구조물이 제거되자 상상 속의 건축물이 재현되었다. 미적이고 창의적인 현대 건축물을 보면서 우주처럼 확장해가는 인간 상상력의 크기를 상상했다. 저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발전하는 기술과 생각을 건축물에 적용하기위해 계속 도전하기를 권한다. 제약과 융합이라는 원리를 적용하여 제약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방향으로 발전할 미래의 건축을 전망한다.

건축물 자체만 보다가 건축물이 품고 있는 공간으로도 시선이 옮겨졌다유형의 건축물을 통해 무형의 공간을 바라보게 되었다동양화의 여백이 주는 의미를 새삼 느꼈던 시간이었다.

총, 균, 쇠문명과 식량이 떠올랐다. 총, 균, 쇠가 인간 존재의 이유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라면, 문명과 식량은 기본적인 식의주의 버전, 공간이 만든 공간버전이랄까. 패션 쪽에서도 문명부터 파고들어가는 이토록 거대한 스케일의 책이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동아리 수업 시간에 발명뉴스탐구반을 진행하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던 집이 생각난다. 슬로바키아에 부부의 주말 별장용으로 지어졌다는 14평의 소형 목조주택이다.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전통 가옥인 유르트를 모티브한 건축으로 도면에서 구조 사진에 이르기까지 JRKVC라는 설계사무소에서 맡아 지은 것이다.

설계 도면에서 집의 구조 사진, 각각의 공간에 대한 설명을 보며 예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건축물을 바라보는 나를 느꼈다. 건축가에 빙의라도 한 듯 나도 모르게 공간의 효율적인 분배와 채광, 디자인, 문의 형태, 통풍, 전망 등을 구석구석 살피고 있었다. 도면까지 자세히 분석하니 전체적인 구조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개안이라도 한 양 눈이 탁 틔어 뿌듯했다.

세상에는 이유 없이 나타나는 현상이 많이 존재한다고 여겨왔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원인과 결과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이유 없는 현상은 없다. 다만 이유를 모르는 현상만 있을 뿐이라고 나만의 결론을 내려 본다.

다양한 상상력이 적용된 집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만으로 가슴 뛰는 일이다. 공간이 만든 공간이 어떤 형태일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설레는 것일까.

 

p187, 그림 설명, 험프리 랩턴 ~렙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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