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0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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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상대라 여겼던 사람이나 매력적인 이들을 발견했을 때 종종 생각했다. ‘당신과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게 참 다행이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같은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이 행복한 공기처럼 스며들 때면 마음은 풍선인 양 두둥실 부풀어 올랐다. 그들과 나는 같은 세상을 살았던 걸까. 의외의 책에서 답을 찾았다.

 

포르투갈 작가의 문체는 생소했다. 재미는 둘째치고 481개의 텍스트를 지나오는 동안 몇 번씩 뒷걸음질을 치며 되돌아갔다. 당최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안 되는 문장들이 속속들이 등장했다. 밀가루 반죽을 하다가 양손으로 덩어리를 쭉 늘렸는데 탄력이 없어 툭툭 끊어지는 느낌이랄까. 긴 문장을 꾸역꾸역 따라가다 주어가 뭐였더라 놓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영어의 관계대명사를 배울 때가 생각났다. 어디까지가 주어인가를 끊어내는 게 문장 해석의 열쇠였지. 중간에 훅 들어온 그노무 문장 덩어리가 핵심 내용을 파악하려는 나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다. 군데군데 찍혀 있는 쉼표는 오히려 문맥을 파악하는 데 방해 요소로 작용했다.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불안의 책.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불안 불안했다. 중간에 집어 던져버리지 않을까 심히 불안했으니 제목은 참 적절하다 싶었다. 뭐 어쨌든 읽기는 다 읽었다. 읽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별개이니. 하하하. 가려진 커텐 틈 사이로 인간 내면의 심오한 성찰이 숨어있는 책이던가. 늪에서 건져 올린 양 음습하고 칙칙한 포스를 뿜어내는 문장들이 불안한 냄새를 풍기며 펼쳐졌다. 무기력, 공허, 불안, 무능, 절망, 권태. 온통 마이너적인 색채의 문장들을 접하며 점점 밑으로 가라앉는 듯 했다. 방황하는 정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 속에서 어느 순간 텅 비는 허허로움을 보았다. 음지에 자리한 인간의 감성을 생각했다. 영혼에도 깊이가 있다면 햇빛이 닿지 않는 심연에서 건져 올리는 인간의 본성이 이와 닮았을까.

 

609페이지를 건너 작가의 연보까지 읽고 잠시 멍해졌다. 묘한 꿈을 꾸고 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독서는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꿈을 꾸는 것이다.(p294)’ 페소아에 끌려 꿈을 꾸다 온 걸까.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만 일어나는가, 아니면 모두에게 일어나는가.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라면 전혀 새로울 게 없고, 오직 우리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면 다른 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텐데.(p26)’ 나의 무의식에도 그가 느낀 감성이 담겨있는 걸까. 그렇다면 익숙해야 할 텐데 생경한 느낌도 있다. 작가만이 느낀 감성이라면 이해하기 불가능할 텐데 또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익숙한 맛, 생소한 맛이 섞여 있는 반반 치킨 같다. 익숙함과 생소함의 적절한 배합이 독자를 이끄는 이야기가 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내면으로 용감하게 뛰어들어 마주한 감성을 표현하느냐, 표현하지 못하느냐의 차이일까. 내용의 절반이나 제대로 이해했나 싶다. . 몰이해투성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압도하는 묵직함과 인상 깊은 정서는 선명하게 새겨진다. 그의 책을 읽은 후로 나와 타인과 시와 세상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도 바라보게 되었다는 건 분명하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페소아는 그 중 으뜸인가. 47년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수십 명의 다른 이름을 통해 복수의 존재를 추구했다는 사람이다. ‘나의 크기는 내가 보는 것들의 크기이지 내 키의 크기가 아니라네.(p64)’ 오늘 하루 동안 내가 본 것들을 떠올려본다. 작가가 본 것은 얼마나 컸을까. 보는 것이 많아 글을 통해 그렇게 다양한 인격을 구현할 수 있었을까.

드라마 <킬미힐미>에서 배우 지성이 연기했던 다중인격이 과연 특이한 사례일까. 온종일 같은 감정으로 사는 사람은 없으리라.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기쁘고, 슬프고, 설레는 등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256색상환 같은 감정들은 무수한 조합으로 나의 일상을 채운다. 페르소나 속에 나를 숨기기도 한다. 제어 가능한 탄력성으로 언제든 디폴트값으로 돌아올 수 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나도 다중적인 인격들을 조금씩은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 독특했다. ‘타인이란 우리에게는 그저 풍경일 뿐인데, 대체로 너무 익숙한 거리처럼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풍경이다.(p397)’ 스스로가 가구처럼 느껴졌던 때가 떠올랐다. 그저 방 한구석에 물끄러미 놓여있어 새삼 찾기 전까지는 시선이 가지 않는 대상. 정서적인 교류 없이 공간을 차지하는 사물처럼 말이다. 그저 풍경,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풍경은 이런 느낌 비슷할까.

존재는 무엇으로 정의할까. 한 사람에 대하여 무엇을 알아야 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일상적인 접촉과 대화를 통해 나를 알고는 있지만 사실은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p51)’이란 문장도 의미 있게 다가온다. 아는 사람의 범주는 어디까지일까.

 

감각이 강아지풀의 솜털처럼 민감해졌다. 흑백 사진 같은 정서가 느리게 흐르는 그의 글을 따라가며 의 본질을 감각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았다. 시인은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에 서서 온 감각을 동원하여 빛깔, 소리, 냄새, 감촉, 맛을 구현한다. 순간의 느낌을 선명하게 남기고 싶은 마음이 찰칵! 셔터를 누른다. 나름대로 정의해본다. 시란, 글로 찍는 스냅 사진이라고.

 

세상은 여러 가지 사물을 품는다. ‘세 가지 요소가 서로 교차하여 한 사물을 이루는데 이는 물질의 양, 우리가 해석하는 방식, 사물이 놓인 환경이다.(p81)’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변수가 되는 요소는 해석하는 방식일 터이다. ‘모든 것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경이로운 것이 되거나 방해물이 될 수 있고, 모든 것이거나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고, 길이 되거나 문제가 될 수도 있다.(p124)’,‘삶이란 본질적으로 정신 상태이기에 우리가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길 때 가치 있는 것이고, 가치 평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p126)’ 엘리베이터 안이 설렘의 공간이 될 수도, 공포의 공간이 될 수도 있는 거다. 사물의 의미가 사람마다 다르다면 온통 다른 의미로 채워진 세상을 같은 세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비눗방울로 그려졌다. 한 통 안에 있는 비눗물이지만 후~ 공중으로 흩뿌려지는 순간, 그들은 각기 다른 공간을 유영하며 다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p333, 2번째 단락 2째 줄 : 내 조국은 포르투갈어다. ~ 포르투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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