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 우아하고 지혜롭게 세월의 강을 항해하는 법
메리 파이퍼 지음, 서유라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에서 격변이라 할 만한 일들이 몰아쳤다. 막내가 다른 지역의 대학에 들어가게 되면서 3월부터 집에는 오롯이 부부만 남게 되었다. 지난주에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왔다. 정기 인사이동으로 새로운 근무처로 발령이 났다. 남편은 6개월 무급 휴직을 냈다. 새로운 학교에서 5년 만에 담임을 맡게 되었다. 맡아본 적 없던 생소한 업무도 하게 될 예정이다. 여러 가지 준비와 정리들로 마음이 덩달아 복잡했다.

눈길 닿는 곳에 두었건만 책 한 장 들여다볼 여유가 나지 않았다. 이사 후 일주일가량 집 정리를 하다 문득 이러다 안 되겠다 싶었다. 집안 곳곳 자리를 잡지 못해 쌓여있는 짐들을 뒤로하고 무작정 낯선 커피숍을 향했다. 중요한 시기에 이 책을 펼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점점 떨어지는 체력을 몸으로 감지하며 업무능력도 덩달아 떨어지는 것만 같아 자신감이 조금씩 낮아지는 중이었다. 신학년 준비를 위해 새로운 학교로 가서 교과협의회를 하면서 4명 중 가장 연장자임을 깨닫고 살짝 움츠러들었다. 아이들도 동료들도 나이 든 교사가 그다지 반갑지는 않겠지. 젊었을 때는 쉽게 할 수 있던 일도 하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뒷걸음질을 쳤다. 기억력도 점점 예전 같지 않다. 하아! .

메리 파이퍼가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 라고 말한 이유가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50대 초반에도 나이의 무게감이 부담스러운데 70대 작가가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제목으로 드러낼 만큼의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원제는 <Women Rowing North>로 북쪽으로 노를 젓는 여자들이란 뜻이다. 북두칠성이 죽음을 상징하듯 북쪽은 죽음을 의미하는 방향이다. 태양이 지나지 않는 방향이라 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나. 노를 젓는 행위는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지 않고 죽음을 향해 주도적으로 나아가는 의지를 표명한다. 일러두기에는 이 제목이 긍정적인 태도와 방향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적혀있다.

나는 ‘Getting Older Getting Better’라는 부제도 좋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좋아진다니. 얼마나 희망적인 메시지인가. 숙성될수록 깊어진다는 와인의 맛처럼, 세월이 흐를수록 지혜로워진다는 인디언 추장처럼. 낡아가는 게 아니라 깊어지고 넓어진다는 시각이 좋았다.

임상심리학자로서의 경험을 녹여낸 이 책은 420장으로 구성된다. 본인과 주변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져 부담 없이 책장을 넘길 수 있다. 한데 속도감은 묵직하고 느리다. 여러 사람의 모습과 생각을 들여다보면서 현재의 나를 짚어보고 미래의 나를 상상하는 시간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이야기들은 나이 듦에서 발생할 수 있는 고민과 갈등을 넘어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을 보여준다. 각 부의 제목 옆에 있는 4개의 문구를 차례로 연결하면 저자가 말하는 핵심에 닿는다. ‘비록 이 여행이 쉽진 않을지라도, 방향감각을 잃지 않는다면, 함께 노를 저을 사람이 있다면, 우린 언제든 좋은 하루를 만들어갈 수 있지

 

사람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간다. 자극을 받으면 반응을 한다. 이때 자극은 외부에서 주어지므로 선택할 수 있는 요인이 아니다. 하지만 자극에 대한 반응은 선택 가능한 영역이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자극-반응의 세트로 삶의 무늬가 그려진다면, 반응 양상에 따라 삶이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이 반응을 태도로 해석한다. 똑같은 사건이 발생해도 사람들은 각기 다른 태도를 보인다. 그 태도가 누적되면서 삶이 고유성을 띠는 것이리라. 이 책에서 태도에 대한 언급이 유난히 많은 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일 거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와 계획이다.(p34)’,‘올바른 태도와 감사하는 마음만 있다면 낯선 상황에 얼마든지 적응할 수 있다.(p39)’,‘태도는 상황을 이긴다.(p166)’,‘태도는 의식을 바꾼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신경 써야 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p200)’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알았다. ‘한 사람의 철학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하는 말이 아니라 선택을 보는 것이다.(p164, 엘리너 루스벨트)’ 가까운 친구들이 했던 선택들이 떠올랐다. ! 이 친구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새삼스러웠다.

이 문장은 나에게도 의미가 깊었다. 지금까지 했던 선택을 돌아보았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참 멋진 선택이었어! 우쭐하다가도 이건 좀 비겁했어! 소심해지기도 했다.

요즘 나의 최애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주인공 박새로이도 생각났다. 드라마의 선택 상황을 복기해보니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문장이다 싶었다. 그 멋진 남자의 철학은 매번 소신 있는 선택으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손가락을 살짝 벤 적이 있다. 물에 닿을 때마다 쓰라려서 밴드를 감고 다녔다. 겨우 손가락 끝인데 그 이물감이 어찌나 신경 쓰이던지. 멀쩡한 손가락으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 며칠이었다. 어깨가 아파 팔을 들지 못했던 몇 달 동안은 무심코 외치던 만세 액션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더랬다. 아플 때마다 당연한 몸은 없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음을 반성하게 된다.

고통을 말하는 작가의 문장은 삶으로의 확장 버전이다. ‘고통이 없다면 인생의 모든 것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질 것이다.(p40)’,‘많은 것을 빼앗아갈수록, 공감과 감사를 담을 수 있는 여유 공간은 더욱 넓어진다.(p41)’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살아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마음의 고통까지도 기꺼이 깊은 의미로 수용해야 함을 시사한다.

 

삶을 단순하게, 빼는 것이 중요하다는 팁까지 장착한 나는 행복한 기억 하나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미래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어나지도 않은 먼 미래의 일을 걱정하느니, 차라리 매일 행복한 기억을 하나씩 만들어나가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p81~82)’

글자 하나가 키보드 버튼 하나 만한 동화책과 큰아이가 남기고 간 인터넷 소설을 처분하기로 했다. 어둠의 장소 구석에서 먼지로 연명하던 책들이다. 알라딘 중고에서도 매입 불가로 뜨는 녀석들을 과감하게 처분하기로 했다. 대략 15kg였다. 캐리어를 펼치고 꾸역꾸역 넣었다. 오다가다 발견한 고물상에 팔기로 했다. 이렇게 묵직한데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나? 캐리어를 질질 끌고 가며 기대에 부풀었다. 음하하! 버리면서 돈도 생기니 일석이조로군!

빈 캐리어를 통통 끌고 오며 또 웃었다. 그렇게 개고생을 한 대가는 천 원이었다! 처음에는 아저씨가 계산을 잘못하셨나 했다. 다시 보니 조그만 화이트보드에 종이의 가격이 50, 70원 등으로 적혀있다. 집에 와서야 인터넷 검색으로 폐지 대란을 알았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의 눈물 등 관련 기사들을 읽다 보니 천원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삶이란 참,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알려주는구나. 세상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엿보면서 내가 복에 겨운 삶을 누리고 있구나 싶었다.

 

나비인 듯 가볍게 흩날리는 보랏빛 꽃잎. 표지에 코끝을 들이대면 향긋한 라벤더 향이 날 것 같다. 이 책을 만난 것은 나에게 날아든 라벤더와 같은 행운이었다. 책을 읽을수록 무엇이 내게 중요한지,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중요하지 않은 일과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을 제쳐 두니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이 바로 우리의 미래다.(p185)’ 오늘만 생각하기로 했다. 미래까지 들고 있으려니 삶이 그리 무거웠던 거다. 공감했던 문장이 가장 많았던 10장의 제목처럼 좋은 하루 만들기만 생각하기로 했다. 모든 환경이 한꺼번에 바뀌어서 멘붕이 올 만했건만 따뜻한 손길 같은 문장들 덕분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좋은 하루를 만들기 위해 그저 하루 치의 용기만 내면 되는 거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환경을 마주할 담담한 용기가 생겼다.

 

 

p101, 마지막 단락 : 나를 그에게 나는 ~

p178, 3번째 단락 : 무엇인 필요한지 무엇이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