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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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거야. 사람들이 무심코 흘리는 문장이다. 끄트머리에 물음표를 붙여본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거야? 귀신과 맞서는 보건교사 안은영.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죽음 이후의 세상을 상상한다.

불현듯 떠오르는 내용이 있다. 출처도 희미해 어디서 읽었는지 가물가물하지만, 대략적인 얼개는 이렇다. 우주 어딘가에는 영혼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존재하는데 생명체가 죽으면 육체는 사라져도 영혼은 그곳으로 빨려 들어간다나. 윤회와 차원적 개념이 결합 되어 이를테면 계단처럼 점차 높아지는 차원들이 존재하고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드디어 가장 높은 차원의 계로 올라가게 된 존재는 육체조차 필요 없이 영적인 에너지의 뭉치로만 모여있다고. 꿈을 꾸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도 꿈꿀 때 그 공간으로의 순간이동이 가능해 잠시 거기에서 가져온 결과물이란다. 삼라만상의 해답이 거기에 있다나. 물리학 관련 도서였건만 사이비 종교의 냄새가 풍겨 황당하다며 웃어넘겼던 기억이 난다. 한데 과연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을까. 그 책에 등장하는 세계가 존재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을까.

마차 바퀴를 굴리던 사람들이 막연히 그려보았을 미래의 모습은 어땠을까. 기록된 소수의 자료 말고 물속에 잠긴 빙산의 아랫부분처럼 꺼내어지지 못했던 상상들이 궁금해진다. 날개 달린 물체가 하늘을 넘치게 날다 못해 우주를 향하고, 걸어 다니면서 통화하는 미래 사람들의 모습을 과거의 그들이 본다면? 같은 맥락으로 우리 역시 앞으로 펼쳐질 세상의 모습을 단언할 수 없다.

작가 정세랑의 기발한 상상력과 만화책에서나 등장할 법한 사건들을 따라가며 생각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조차 이루어지는 세상에서 가능성 제로인 일이 존재하기는 할까.

 

보통의 인간은 20~20,000Hz의 가청 진동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범위를 넘어서는 초음파나 초저파는 일부 생물들만이 감지할 수 있다. 빛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인 가시광선의 범위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조금만 확장해서 빛을 정의한다면 자외선, 적외선처럼 보이지 않는 빛도 있다. 들을 수 없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내가 모르지만 다른 세상은 이런 식으로 분명 존재하므로. 죽음이란 삶의 끝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다른 차원으로 옮겨가기 위해 잠시 멈춤의 의미를 지닌 현상인 걸까. 위로 던져진 공이 아래로 내려올 때 순간적으로 멈추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주인공 안은영은 죽었거나 살아있는 존재들이 뿜어낸다는 액토플라즘이라는 입자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사립고등학교 보건교사로 일하면서 사람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기운들을 없애는 정의의 퇴마사로 등극한다. 귀신과 얽힌 이야기인데도 섬찟하거나 음산하지 않다. 경쾌한 그녀의 성격처럼 살짝 유머러스하고 발랄한 에너지가 감돈다.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갖춘 에피소드들이 시트콤을 연상시킨다. 학생, 교사, 평범한 이, 다른 계통의 능력을 지닌 존재, 귀신 등 각각의 이야기에서는 핀 조명을 받는 대상들이 매번 달라진다. 이들과 얽힌 크고 작은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을 따라 몇 개의 동산을 넘어가면 어느새 <작가의 말>을 만나는 순간이 온다.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해 쉴 틈 없이 책장을 넘기게 된다. 다소 맥이 빠지는 결말, 통쾌해지는 결말, 상상을 뛰어넘는 결말,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결말, 마음이 짠해지는 결말 등 각양각색의 버전이 있다.

소설에서는 그녀의 조력자이자 남주인공 한문 교사 홍인표가 등장하는데 첫 에피소드는 그들의 만남에서 시작하며, 마지막 에피소드는 두 사람의 러브러브가 시작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끝이지만 끝이 아닌 느낌이 있다. 요즘 핫하다는 <낭만닥터 김사부2>처럼 2, 3탄이 등장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학교라는 공간적 배경과 교사 또는 학생이라는 등장인물들 덕분에 학생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교사로서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세계의 단단한 부분을 밟고 살아간다면 자신은 발이 빠지는 가장자리를 걸어야 함을 슬슬 깨달아가던 중이었다.(p45)’,‘자주 스스로를 누군가 버리는 걸 까먹은 채 구겨 놓은 영수증 같은 존재라고 여겼는데 한 번이라도 그렇게 구김살 없이 웃어 보고 싶었다.(p104)’, ‘어떤 나이에는 정말로 사랑과 보호가 필요한데 모두가 그걸 얻지는 못한다.(p125)’ 세 문장에서 아이들의 시린 모습이 연상되어 마음이 아팠다.

바깥은 죽어 있고 안은 살아 있는 걸로는 다 할 수 있어.(p118)’ 씨앗을 의미하는 이 문장에서 아이들이 떠올랐다. 무표정한 아이들, 반항하는 아이들, 비뚤어질 테다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아이들. 겉에서는 굳어지고 차가운 벽으로 둘러싸인 듯 보이지만, 안에 있는 마음은 몰랑몰랑 살아있어 정성껏 물을 주고 적절한 환경만 주어진다면 씨앗처럼 싹을 틔우지 않을까.

아직 남아 있는 순수한 표정과 열려 있는 눈동자가 선생님들을 버텨 내게 하는 힘이기도 했다.(p38)’,‘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흥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 얻었다.(p233)’ 이 문장들은 느슨해져 가는 마음을 팽팽하게 당겨주었다. 그래, 아이들에게서 빛을 보고 싶은 마음이, 민감한 빛을 감지하고 싶은 센서가 아직은 내 심장에서 꺼지지 않았구나.

 

어둠 속에서는 빛이 더 잘 보인다. BGM처럼 귀신이 깔린 이야기라 죽음이 주제일 것 같지만 귀신 이야기는 코팅지에 불과하다. ‘살아간다는 동사가 유달리 많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한 꺼풀 벗겨보면 곳곳에 삶이 보인다. 죽음의 충격파를 통과한 이야기들은 생명 활동을 유지하는 본능적인 이 아닌 살아가는 일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건네어 준다.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이란 걸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p185)’,‘사람보다 다른 것들이 비싸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살아가는 일이 너무나 값없게 느껴졌다.(p189)’,‘살아간다는 거 마음이 조급해지는 거구나. 욕심이 나는 거구나.(p216)’,‘은영은 살아 내는 일이 버거워서 먼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며 모든 상황이 임시적이라는 걸 늘 암시했다.(p238)’ 나열한 문장들을 되짚어보니 삶만큼 위태위태하고 불안정한 일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서로의 흉터에 입을 맞추고 사는 삶은 삶의 다른 나쁜 조건들을 잊게 해 주었다.(p272)’ 이런 친절한 작가님 같으니라고! 그녀는 마지막 부분에서 회심의 한 방을 날림으로써 축 처져 가라앉은 문장들을 깔끔하게 갈무리한다. 막강 파워를 장착한 주인공들이 아니라 어딘지 불완전한 캐릭터를 설정한 깊은 뜻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죽음 이후의 세상이 존재하건 보이지 않고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공간이 존재하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지금 빛이 있는 곳에 머문다면 어둠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며, 어둠 속에 머문다면 빛을 바라보며, 기쁘다면 슬픈 이를 다독이며, 슬프다면 기쁨의 순간을 생각하며, 삶에 머무는 지금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어디에 있든 나 있는 장소에는 의지할 무언가 존재할 것이므로 그렇게 살아가면 충분하리라. ‘살아가는 일앞에는 더불어라는 세 글자가 곳곳에 숨어있으므로.

 

 

p57, 2째줄 : 박민우(본명보다~)박민우( )

p58, 마지막 줄 : 낡을 고무장화를 낡은~

p5, 차례, p89, 제목 : 원어민 교사 메켄지 ~ 매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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