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 정여울의 심리테라피
정여울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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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사람이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어. 외로움이 한기처럼 스며들 때마다 종종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한데 이 책을 읽고 생각해보니 나는 중요한 점 한 가지를 빠뜨리고 있었다. 다른 데서 사람을 찾을 게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위로해주면 되지 않은가. 나를 위로해줄 가장 적절한 적임자는 바로 나인걸 왜 인지하지 못했던 걸까.

일에 치이느라, 사람에 치이느라 제대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책 제목을 보는 순간 정곡을 찔린 듯 움찔했던 건 나를 향하는 말인 듯했기 때문이다. 작가 정여울이 독자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막연히 나를 사랑하라는 번드르르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자신을 보듬는 방법을 제시한다. 요리 레시피인 양 스스로에게 보다 가까이 접근하는 방법과 구체적인 순서까지 알려준다. 책을 펼쳐놓고 그대로 따라 행동하고 싶어진다.

 

엊그제는 얼떨결에 인터넷 무료간이 MBTI검사를 했다. 엄마는 분명 I타입일 거야. 내 생각에도 그럴 것 같아. 10분도 안 걸리는 검사 결과는 ENFJ형이다. 정의로운 사회운동가형이라나. ... 내가 모르는 내가 어딘가에 숨어있다 갑툭튀했나. 스스로 들여다본 내 성향은 내향성이 훨씬 더 강한 것 같더니만. %로도 나오는 요소별 결과를 보니 외향성과 내향성이 거의 반반이다. 5149로 외향성이 간소한 차이로 많다. 사람의 성향이 사과 가르듯 딱 쪼개져서 분리되는 건 아닐 텐데 예측과는 다른 의외의 결과가 새삼스럽다.

작가는 내향성에 대하여 섬세하게 다룬다. ‘내향적인 사람들의 침묵은 수많은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p20)’라는 문장에 잠시 머문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표현하지 않을 뿐 침묵 안에 많은 말들을 담고 있을 거다. 따뜻한 차를 두 손으로 감싸면 온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담긴 차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맛과 향기가 날 터이다. 글쓰기와 성향과의 관계를 말한 문장도 인상적이다. ‘글쓰기는 내향성의 집중력과 외향성의 표현력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일이다.(p21)’ MBTI 검사의 결과를 절대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재미라 할지라도 내향성과 외향성이 반반이라는 나의 결과가 글쓰기에 적합하다는 말로 들려 기분이 좋아진다.

돋보기로부터 물체까지의 거리가 맞지 않으면 제대로 된 상을 볼 수 없다. 크게 보려고 렌즈를 내밀었다가 거리 조절을 하지 못하면 엉뚱한 상이 눈으로 들어오게 된다. 작게 보이는 상의 크기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어느 순간 상이 거꾸로 보이니 다소 난감하다. 거리에 대한 문장을 보며 돋보기의 속성을 떠올렸다. ‘상대방뿐 아니라 나 자신도 가끔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제대로 보인다.(p32)’ 사람 사이의 거리도 볼록렌즈의 성격을 띠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와 나 사이의 거리조차도.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리라.

 

페르소나, 에고, 셀프, 블리스, 페르소나, 에고, 셀프, 블리스... 수업으로 들어가는 복도를 지나치는 머릿속에서 4개의 낱말이 번갈아 굴러다녔다. ‘페르소나는 가면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이다. ‘에고는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을, ‘셀프는 내면에 자리하는 나의 모습을, ‘블리스는 시간의 흐름을 잊게 만드는 내면의 희열을 뜻한다. 어떤 날은 페르소나를, 다른 날은 에고와 셀프를, 또 다른 날은 블리스를 생각했다.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진짜 나를 만날 시간이라는 부제로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의 다섯 가지 감정을 표현하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 책에서 방어 기제페르소나에 대한 문장을 읽다보니 <인사이드 아웃>슬픔이가 생각났다. 우울을 덮는 페르소나를 쓰고 흘려보낸 하루를 돌아보았다. 푸른 빛깔의 감정도 필요하다던 애니메이션의 메시지를 상기했다.

나의 에고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셀프가 원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 나는 에고를 따라가고 있을까, 셀프를 따라가고 있을까. 혹여 에고를 좇느라 셀프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가가 제시해주는 구체적인 방법을 메모했다. 첫째, 자신이 싫은 점, 후회되는 점, 고치고 싶은 점을 적어볼 것. 둘째, 그래도 기특한 점을 적어볼 것. 셋째,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을 적어볼 것.

태도와 자유에 대한 문장들에 위안을 받았다. ‘상처를 삭제할 수는 없지만, 상처를 바라보는 나의 프레임을 바꾸는 것, 그것이 진정한 치유의 시작이다.(p110)’, ‘그리하여 내가 점점 더 나다워지기를, 내가 다만 꾸밈없는 나임으로써 최고의 자유를 얻기를 꿈꾼다.(p113)’ 읽는 것만으로 가슴이 탁 트였다.

 

치유적인 글쓰기에 대한 문장이 마음에 남는다. ‘나는 글이나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쓸 때마다 내 인생을 걸고 있다.(p132~133)’ 작가의 마음이 어떤 것일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쓸 때마다 심장을 꺼내어 마주 보다 다시 집어넣는 행위를 반복하는 기분이다. 심장을 꺼내기까지의 시간은 매번 고통이다. 과감한 용기가 필요하다. 이 과정을 넘어 온기가 담긴 글로 심장을 어루만지면 행복이 스며든다. 내게 있어 글을 쓰는 행위는 이러한 과정들의 로테이션이다. 이런 이유로 내게 있어 글쓰기는 행복한 일이면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중성을 띤 뜨거운 블리스랄까.

 

번아웃에서 회복되기 위한 세 가지 길도 유용하게 활용될 것 같다. 첫째, 쏟아지는 일감이나 타인의 요구를 거절하고 그 대가를 치르는 것. 둘째, 삶의 속도를 구체적으로 줄이는 것. 셋째, 주변의 모든 자극을 일의 방해물로 여기는 대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감각 훈련이다.

예전의 나는 예스맨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주어져도 거절 한 번 못하고 끈질긴 인내심으로 부담감을 견디어왔다. 태양을 보고 퇴근하는 것이 소원이었던 날들로부터 불과 5년도 지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이러다 내가 못살겠다 싶은 거다. 하나 둘씩 거절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은 불편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처음이 어렵지 몇 번 거절하다보면 할만 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번아웃 증후군에서 치유된 이들의 공통점은 거절하는 용기라고 한다. 거절은 비인간적이나 냉정과는 다르다. 내가 그동안 섣불리 거절하지 못했던 것은 에고를 위한 페르소나가 아니었을까.

작가는 상처를 표현하는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에게 정직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상처를 핵심적으로 요약하는 문장을 스스로 찾아보라고도 한다. 그리하면 다른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정여울이 제시하는 자기치유법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일을 해보는 것이다. 올해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나 일들을 시도해본 해였다. 독립서점의 몇몇 프로그램에 참여하였고, 이제껏 버리지 못한 물건들을 버렸다. 망설이며 정리하지 못한 관계의 끈들을 과감하게 잘라냈다. 주요 관심사와 다소 동떨어진 분야의 책들을 읽어보기도 했다. 생각보다 효과가 좋아서 스스로 흡족해하는 중이다. 작가의 글을 보니 나의 삶에 응원군이 생긴 것만 같아 든든하다.

 

책 표지를 바라보며 그림의 제목을 음미한다. 그림의 제목은 <Pause Series 002>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책의 내용과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인다. 지고 다니던 짐을 잠시 내려놓고 그늘진 의자에 앉아 세상을 응시하며 한 발을 주무르는 장면. ‘pause’는 잠시 멈춤을 뜻한다. 아예 여기에서 멈추는 ‘stop’과는 완연히 다르다. 다시 길을 나서기 위한 휴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림 속 인물은 이렇게 잠시 쉬다 또 다시 세상을 향해 걸어가리라.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를 읽으며 심리학적인 시각에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책에 실린 문장 위에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위로가 되는 따스한 레시피를 따라 다시 걸어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작가는 이런 의미로 채워진 시간들을 독자에게 선물해주고 싶었던 걸까.

내 삶의 진짜 주인공이 되는 시간. 에필로그의 제목이 나에게 스며든다. 마지막 문장이 따스한 옷인 듯 심장을 감싼다. ‘내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한순간도 잃지 않는 것이다.(p245)’ 상상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두근거려 가슴이 벅차오른다. 눈이 뜨거워진다.

 

 

p221, 밑에서 4째줄 : 안심시키기고 안심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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