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껑을 열자 새하얀 김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연탄불 위에 올려진, 작은 밥상 크기는 족히 됨직한 솥단지 한가득 물이 출렁였다. 겨울이면 당신은 매번 하얀 아침을 자식들에게 건네어주셨다.
새벽 5시. 눈뜨자마자 어머니께서는 씻을 물을 데우셨다. 방문을 열면 밖이었던 단칸방. 문턱 옆 방바닥에는 꽁꽁 언 걸레가 바삭거렸다. 코끝까지 담요를 덮고 자던 우리 4남매는 서로 먼저 씻으라며 미적거렸다. 수돗가에 놓인 찜통 뚜껑을 열고 찬물 한 바가지를 섞어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했다.
사십여 년을 거슬러야 만나지는 기억은 결혼을 하고 물을 데울 필요가 없는 아파트에 살면서 모락모락 연기처럼 희미해졌다. 하얀 아침들이 떠오른 것은 아파트 온수 공사로 며칠 동안 물을 데우게 되면서부터였다. 그 옛날 물을 데우시던 당신만큼 나이가 들어버린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를 위해 가스레인지로 데운 물을 욕실로 날라야 했다.
새벽 5시. 부스스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가스레인지의 불을 켜고 식탁 옆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3일을 보냈다. 퍼뜩 당신의 아침이 떠올랐다.
어릴 적의 나는 온수가 나오지 않는 집에 살면서도 따뜻하게 세수를 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나의 아침은 당연하지 않았던 당신의 아침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즈음, 철렁했던 아침도 있었다. 세 들어 살던 그 집과 함께 선명하게 그려지는 장면이다. 물을 데우시던 당신은 솥단지의 물을 찜통에 덜어 나르던 중이셨다. 갑자기 솥단지가 기우뚱하며 발등으로 뜨거운 물이 떨어졌다.
벌겋게 부어올랐던 당신의 발등이 기억난다. 열 두 살의 나는 당신의 아픔이 어느 정도였을지 잘 몰랐다. 육체적인 고통만을 어렴풋이 짐작했을 것이다. 사십여 년이 지나 그 때의 어머니보다 더 나이 들어보니 그 날이 점점 또렷한 기억으로 자리 잡는다. 화상의 쓰라림보다 안간힘을 쓰며 시린 아침을 데워야했던 삶의 쓰라림이 당신을 더 힘겹지 하지 않았을까. 한여름에도 얼어붙어있었을 하루. 새벽 5시는 자식을 향하는 절실함이 시작되는 시간이었으리라. 어머니의 눈으로 나의 아이를 바라보게 되어서야 나를 생각하던 당신 마음의 언저리를 더듬게 되는 걸까.
<뜨거운 겨울>이란 시를 지어 새벽마다 물을 데우시던 모습을 스케치했던 적이 있다. 블로그를 뒤적여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여전히 뜨겁고 아직도 울컥하다. 녹지 않은 눈인 양 꺼낼 때마다 뜨겁게 흘러내리는 기억으로 눈가가 촉촉해진다.
‘시’가 접힌 우산이라면 ‘산문’은 펼쳐진 우산이다. 맑은 날이면 우산이 접혀있든 펼쳐져있든 상관없지만, 이 생각 저 생각 비처럼 쏟아지는 마음을 담기에는 산문이 좀 더 적절해 보인다. 시에 담았던 마음을 산문으로 옮겼다.
글이 품은 당신을 생각하며 어린 시절의 아침을 곱씹어본다. 참으로 따뜻한 아침을 보냈던 내가,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내가 거기 있다. 그 아침의 기억이 남아있어 정말 다행이다.
내게 아침은 하얀 빛깔이다. 새벽 5시는 뜨거운 아침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단어들은 사전적인 의미 외에 각기 다른 의미로 심장을 뛰게 한다. ‘아침’이란 말이 나에게는 어머니와 겹쳐지듯이. 올해 여든을 넘기신 당신과의 기억을 하나하나 붙들어두고 싶다. 더 이상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될 먹먹한 어느 날, 오래된 앨범인 양 두고두고 펼쳐보기 위해 화석처럼 글로 새기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