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좋은 일 - 책에서 배우는 삶의 기술
정혜윤 지음 / 창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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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좋다 읽으면서 느낌이 전해지는 책이 있는가하면 읽고 나서 돌아보면 마음에 파스를 붙인 듯 후끈거리는 책이 있다. 정혜윤의 책은 후자이다. , 자아, 사랑과 우정 등을 주제로 다른 책들을 통해 다양한 작가들이 했던 말들을 정혜윤의 생각과 함께 엮어놓은 책이다. 각각의 짧은 글들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로 귀결된다. 사랑에 대해서 A는 이런 말을 했고, B는 이런 말을, C는 이런 말도 했어.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렇다면 당신은? 이런 식이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했던 말들을 나열해놓은 점이 처음에는 나의 개인적인 취향과 맞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책을 덮고 나서도 개운한 느낌은 없었다.

변화는 그 후에 일어났다. 메모해놓은 문장들을 정독해보니 문장들이 꿈틀거리며 일어나 마음을 툭툭 건드렸다. 마음 언저리를 맴돌아 자꾸 걸리는 말들이 버블 넷이 되었다. 흑고래들이 청어 무리를 사냥할 때 만들어낸다는 원기둥 모양의 거품 벽, ‘버블 넷말이다. 내게 버블 넷이 된 것들과 뜻밖의 좋은 일이 되어준 일들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끔 내가 스스로 기특한 게 고독을 글을 승화해낸 점이다. 외롭거나 마음이 아플 때면 나의 머릿속에는 종종 문장들이 떠다녔다. 외로움이 만들어낸 버블 넷을 뚫고 나온 청어 새끼라도 된 듯 글을 쓰는 순간 외로움은 물거품처럼 툭 터지곤 했다. 나의 글은 나의 고통을 나누어 들어주었다. ‘이 우주에서 우리가 즐길 수 있는 따뜻함은 우리가 직접 만들어낸 따뜻함뿐이다.(p116)’ 내가 만들어낸 따뜻함은 나의 글이었다. 글로 인해 마음의 고통이 조금은 녹아내렸으니까. ‘우리는 풍요로움으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과 부족함으로 글을 쓴다.(p250)’ 요즘은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나를 가장 외롭게 하는 사람이지만 그로 인해 나의 글이 더욱 깊어진 것 같아서이다. , 돌려 까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인 팩트일 뿐이다. 그는 단지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다. 맞지 않음이 좋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 이 미묘한 차이점을 구분할 만큼 이제는 성숙해졌다. 책과 글의 힘 덕분이다.

 

어떤 글을 쓸 것인가. 언제부터인가 무슨 책이든 읽을 때마다 스스로 던지게 되는 질문이 되어버렸다. ‘미래가 알고 싶다면 필요한 것은 예언이 아니라 지향점이다.(p325)’ 곰곰 생각해보면 내 글의 소재는 어머니가 많다. 당신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릿하다. 생기는 마음을 길어 올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그 안으로 들어가 흠뻑 젖어 쓸 수 있는 소재이다. 함께 살아온 27년을 생각해도, 함께 살아오지 못한 24년을 생각해보아도 매번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당신의 모습을 길어 올린다. ‘나는 단 하루, 딱 한 단어를 정복해본 일이 있다. ‘일몰이다.(p314)’ ‘정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게는 어머니라는 단어가 이런 의미인 듯하다. 가족, 이팝꽃, 선물, 향기, 아침, 겨울에 대한 글들도 모두 어머니로부터 출발했으니 나의 글에 있어 어머니란 우주와 같은 맥락이다. 어머니, 세 글자 안에 이토록 많은 요소들을 품고 있으니.

 

다들 그렇게 살아. 아마 몇 십 년 전의 당신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며칠 후의 한 끼도 장담하기 어려운 형편에 네 명의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려는 당신에게 그냥 실업계 고등학교로 보내라고 종용했을 거다. 그 형편에 무슨 대학이냐고. 얼른 여상 졸업시켜서 돈 벌게 하라고. ‘다들은 누구인가? (중략) 왜 자기 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보편성을 끌어오는가?(p126)’ 작가의 문장을 보고 나를 돌아본다. 주변 사람들을 어쭙잖게 위로한답시고 다들이란 말을 남발한 적은 없던가. 누구도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개입하지 말아야 함을 생각한다. 당신은 결국 자식들 모두를 대학에 보내셨다. 경제적인 상황의 버블 넷을 뚫고 나오신 당신. 과감한 결단이었으리라. 그로 인해 지금, 커피숍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있다.

뭔가를 하고 있다면 다른 것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p184)’ 당신이 안간힘을 써서 해주신 일. 새삼 당신이 하지 못한 다른 것을 상상한다.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40대의 나이에 놓아버렸을 것들을 생각한다. 다시 가슴이 아릿해진다.

 

어제 친정집 주방. 배달시킨 생선가스를 배부르게 먹고 나서 참외 하나를 깎았다. 지난번에 청주 갔을 때 외삼촌께서 사주신 단팥빵을 꺼내셔서 얼마나 속이 알찬 지 열변을 토하시는 아버지. 싸줄 테니까 너도 한 번 먹어봐라. 어머니가 내리신 커피 잔을 쟁반에 놓으신다. 이 빨간 게 네 꺼야. 커피 잔을 살펴보니 두 개는 땡땡이 무늬가 있고, 하나만 민무늬다. ~ 커플이야? 우리는 항상 이렇게 마셔. 환하게 웃는 어머니. 작은 행동으로 우린 서로 사랑해 라는 말을 하신다. 행동만큼 확실한 말은 없다는 듯이. ‘언제나 말에 깊이를 주는 것은 행동이다.(p299)’

쟁반에 놓인 참외 접시, 커피 세 잔. 이게 행복이구나 싶은 느낌이 바닷가 파도처럼 심장 언저리에 찰랑찰랑 밀려왔다. ‘우리에게 한 가지 좋은 일이 생기기 위해서 그전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p27)’ 행복의 가치는 그전에 일어났던 많은 고통과 버블 넷을 넘어선 용기만큼 저울 반대편에 놓이면서 매겨지는 것일까. 어려웠던 시절의 무게가 심장을 훑고 지나는 순간 마음이 부력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p88, 밑에서 6째줄 : 메피스토텔레스 ~펠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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