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많은 햇살을 함께 바라본 기억이 없다. 친정아버지의 휠체어를 끌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 밖으로 나왔다. 탁 트인 시야에 바삭한 잔디와 싱싱한 브로콜리들이 들어왔다. 지금껏 가져보지 못한 부모님과의 시간들이 연둣빛 조각에 담겨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얼핏 불어오는 바람에 5월이 흘러들어왔다. 당신들과 보낸 병원에서의 시간들이 도미노처럼 좌르르 넘어지며 떠올랐다. 병원 냄새가 향기로웠다. 나와 당신들의 5월이 겹쳐진 시간. 괜히 눈물이 나왔다.
작년 5월 초, 여든이 되신 친정아버지께서 왼쪽 무릎 수술을 하셨다.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뛰시다가 넘어지셨다고 했다. 당황하신 당신들은 119를 부를 생각도 못 하셨다. 가방 속에 있던 화장지로 철철 흐르는 피를 닦고 또 닦아내다 가까스로 몸을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하루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에 며칠을 지내신 후 뒤늦게 자식들에게 말씀을 하셨다. 병원에 모시고 갔더니 무릎뼈가 몇 개의 조각으로 부서지셨다고 했다. 어쩐지 도무지 걸을 수가 없더라. 아버지는 멋쩍게 웃으셨다.
먹고 살기 바빴다. 10년 동안 계속되었던 아버지의 실업으로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든 찾아서 하셨던 어머니. 경제적으로 늘 어려웠기에 제대로 된 5월을 누린 기억은 없다. 그러다 나는 결혼을 했다. 직장 일에, 육아에 끌려가던 나는 당신들을 한 달에 한 번 찾아뵙기도 힘들었다. 둘째 아이가 고등학생이 될 만큼 커서 시간적인 여유가 다소 생겼어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 죄송한 마음을 밀어두고 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가정 안에서 살아갔던 건 어찌 보면 습관 비슷한 것일지도 몰랐다.
딸 딸 딸 아들 중 나는 둘째 딸이다. 병원에 입원하신 아버지의 간병은 어머니의 몫이었지만 여든을 1년 앞둔 당신 혼자 감당하시기 에는 벅찼다. 대전에는 언니와 내가 사는데, 하필이면 그때 즈음 언니는 해외교육을 받는 일정이 잡혀있었다. 나머지 형제들은 다른 지역에서 직장을 다니는 지라 주말이면 모를까 평일에 병원을 들르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나마 사정이 나은 나의 몫이 되었다. 퇴근 후 병원을 배경으로 한 5월의 시간들이 펼쳐졌다.
어버이날에 무릎사진이나 찍어보자고 동네병원에 모시고 갔다가 그 길로 종합병원 응급실과 입원실로 직행하신 아버지. 고통은 느끼셨지만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며칠을 버티셨던 당신은 무릎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왜 이제야 오셨냐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심적인 부담이 크셨나보다. 치매에 걸리신 게 아닐까 철렁할 정도로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하셨다. 일시적인 스트레스로 나타나는 증상이라 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 역시 많이 힘드셨을 터 였다. 근 한 달 가까이의 입원 기간은 당신들이 감당하기에는 커다란 시간이었다. 자식으로서의 나는 뭐라도 해야 했다.
퇴원하실 때까지 퇴근 후 매일 병원으로 출근을 했다. 처음에는 걱정이 되어서, 조금씩 나아지시고 부터는 이 때가 아니면 언제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나 싶은 생각에 갔다. 뭐라도 하기 위해 병원을 갔지만 사실 내가 한 일은 별로 없었다. 병원 밥 나온 거 많다 하셔서 같이 밥을 먹고, 가끔 휠체어를 끌고 물리치료실로 가고, 샤워하실 때 보조한 것, 어머니께서 집에 다녀오실 동안 아버지 곁을 지켜드린 것 밖에 없었다. “피곤할 텐데 내일은 오지마라.” 내 모습만 보면 활짝 핀 꽃이 되시는 당신들의 웃음은 매번 나의 발걸음을 병원으로 끌어당기셨다.
집으로 가기 위해 차의 시동을 걸면 늘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훅 끼쳤다. 오십여 년 살아오면서 병원 냄새를 가장 많이 맡아본 5월이다. 1년이 지나 다시 오월. 작년 이 시간 병원에 있던 나를 생각한다. 병원 마당에서 바라보던 5월이 당신들과 겹쳐진다. 난 참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구나. 가장 향기로운 5월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자 따뜻한 물에 던져진 수란이 된 양 물컹해진다.
* 2019.5.18. H백일장(글제: 향기로운 5월), 은상